“건강이죠.”
이건희 삼성 회장이 자신의 생일 때 밝힌 소망이다. 이 회장은 지난 1월9일 칠순(七旬) 생일을 맞아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삼성 사장단과 기념 만찬을 끝내고 나오면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새해 소망을 묻자 ‘건강’이라고 답했다. 이 같은 이 회장의 답변은 애플의 최고경영자인 스티브 잡스가 무기한 병가를 내고 경영일선을 떠난 시기에 나온 것이어서 더욱 주목받았다.
스티브 잡스의 병가는 이번이 세 번째다. 그러나 예전 두 차례 병가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췌장암과 간이식을 받은 병력을 감안하면 앞으로 경영 복귀 여부조차 예상하기 어렵다는 비관적 전망이 우세하다. 스티브 잡스의 병가 소식이 전해지자 증권시장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애플의 주가가 하락했으며 많은 애널리스트들이 회사의 장래를 우려하는 목소리를 쏟아냈다.
미국 자동차 산업 구조조정을 주도했던 미 재무부 전 고문인 스티브 래트너는 잡스의 부재가 길어지면 애플이 현재의 지위를 유지하기 힘들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위대한 CEO가 기업의 운명을 180도로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제너럴 일렉트릭(GE)과 웨스팅하우스의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래트너는 “스티브 잡스가 언제 돌아올지 알 수는 없지만 28년간 은행에서 일하면서 나는 개인이 기업을 놀라울 정도로 차별화할 수 있다는 것을 수차례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GE에는 잭 웰치라는 강력한 최고경영자가 있었던 반면 웨스팅하우스는 2류 경영자가 연이어 교체되면서 두 회사의 실적이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애플에는 뛰어난 팀이 있기 때문에 잡스가 있든 없든 계속 좋은 성과를 낼 것이라는 애플 측 주장이 일정기간 맞을진 몰라도 잡스가 없었다면 10년 전 위기에 처했던 애플이 시가총액 2위 기업으로 변신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잡스가 없는 애플이 지금과 같은 강력한 경쟁적 우위를 유지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고 단언했다.
이번 사태로 기업들은 다시 한 번 ‘CEO 부재 리스크’를 실감했다. 회사의 중심에 섰던 최고경영자가 갑작스럽게 업무에서 손을 뗄 경우 회사는 이런저런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특히 스티브 잡스처럼 창업자 출신의 카리스마가 강한 CEO가 사실상 전권을 행사하는 회사일수록 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애플=스티브 잡스’라는 공식이 이미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기업의 화두는 체계적인 후계자 양성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 2월17일(현지시간) 미국 IT업계 최고 경영자를 초청해 샌프란시스코 IT사업가 존 도어의 집에서 만찬을 열었다. 이 자리에 병가를 낸 스티브 잡스 애플 CEO(오바마 대통령 왼쪽 옆자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최고경영자의 공백으로 생길 리스크는 크게 3가지다. 우선 상징적 인물이 사라져 조직이 구심점을 잃게 된다. 조직의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고 조직원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구심점을 상실함으로써 발생하는 리스크다. 그동안은 “나를 따르라”며 앞서 진군하던 지휘관이 사라지면 조직원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방향감각을 잃기 쉽다. 이 같은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 해당 조직은 우왕좌왕하기 쉽고 사기가 저하돼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손실을 입을 수도 있다.
두 번째는 전략적 의사결정의 부재 또는 지연이다. 최고경영자의 주요 임무중 하나는 시장의 흐름이나 주요 거래처와의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투자나 고용, 사업전환 등에 관한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그런데 최고경영자가 없으면 이 같은 의사결정에 차질이 빚어지기 마련이다.
세 번째는 인사권자 부재로 인재 발굴, 적재적소 배치가 어려워질 수 있다. 여기에 조직 내부에서 최고경영자 자리를 놓고 다툼이 발생하거나 새로운 CEO를 뽑았으나 이 CEO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고위 임원들이 존재할 경우 사태는 더욱 복잡해진다.
잭 웰치 전 GE 회장
이 때문에 글로벌 기업에서는 카리스마가 강한 CEO의 갑작스런 유고에 대비한 후계자 양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선진기업들은 체계적인 후계자 양성프로그램을 통해 CEO 부재 리스크를 줄이고 있다. 유능한 인재를 조기에 발굴해 풀(Pool)로 만들어 체계적으로 관리한다. 대표적인 곳이 GE다. 잭 웰치 회장은 1991년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거의 매일 누구를 후계자로 선정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은퇴일을 9년이나 남겨놓은 상황에서 나온 발언이다. GE 이사회는 1994년부터 3년에 걸쳐 잭 웰치 회장의 후임자를 놓고 24명을 선발, 인터뷰와 평가를 통해 3분의 1(8명)로 압축했다. 그 후 후보군을 3명으로 압축한 뒤 2001년 제프리 이멜트 회장을 선택했다. 후보군 선정부터 최종 낙점까지 무려 6년이 넘도록 평가해온 것이다.
P&G는 자사의 핵심역량중 하나인 마케팅에서의 강점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인재 양성 프로그램을 운용중이다. 마케팅 직군의 경우 1개 브랜드를 맡은 역량 있는 매니저가 좋은 실적을 보이면 복수의 브랜드를 맡긴다. 이 역할을 잘 수행할 경우 더 고차원의 일을 맡기고 업무범위도 확대해 이들을 CEO후보군으로 키운다. 최고경영자를 이 같은 훈련을 거친 후보군에서 뽑는 방식이다.
미국 맥도날드의 사례는 미리 미리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잘 보여준다. 맥도날드의 짐 칸탈루포(Jim Cantalupo) 회장은 2004년 4월20일 새벽 4시께 심장발작으로 병원에 후송됐다. 그러나 채 1시간이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떴다. 맥도날드는 오전 7시에 이사회 화상회의를 열어 최고운영책임자(COO)인 찰리 벨(Charlie Bell)을 신임 CEO로 선임했다. 경영권 공백이 생길 가능성을 조기에 차단한 것이다. 칸달루포 회장은 유사시 벨이 당황하지 않고 회사를 경영할 수 있도록 중요한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회의에는 빠짐없이 배석하도록 해 미리 준비시켰다. 그런데 찰리 벨 CEO도 그 해 11월 암이 발견돼 경영일선을 떠났다. 그러자 맥도날드는 이사회를 열어 짐 스키너 부회장을 선정했다. 불과 7개월 만에 2명의 최고경영자가 바뀌었지만 모두 CEO 승계를 염두에 둔 준비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미국 정부는 갑작스런 CEO 부재로 투자자가 주가폭락 등의 경제적 손실을 입을 것을 우려해 지난 2009년 말 방지책을 마련했다. 미 증권거래위원회가 각 기업의 이사회로 하여금 CEO 승계계획을 만들도록 의무화한 것이다.
일본에서도 창업자 출신의 강력한 CEO의 유고(有故)를 대비하려는 움직임이 재계의 화두다. 특히 통신업체인 소프트뱅크나 의류업체인 패스트리테일링 등 CEO 부재 리스크가 큰 기업들이 앞장서는 모습니다. 재일교포 출신의 손 마사요시(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아예 자신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로 이를 꼽고 있다. 손 회장은 “현재 소프트뱅크가 직면한 가장 큰 리스크 중 하나는 바로 후계자 문제다. 앞으로 10년 동안 이 문제 해결에 주력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소프트뱅크는 미래 CEO 양성을 위한 구체적인 프로그램도 마련해 가동 중이다. 2010년 7월 회사 내에 ‘소프트뱅크 아카데미’라는 인재양성 교육기관을 설립해 체계적으로 CEO후보군을 키우고 있다.
유니클로라는 중저가 캐주얼 브랜드로 글로벌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킨 패스트리테일링도 상황은 비슷하다. 패스트리테일링은 회사 내에 대학을 만들어 200명의 간부 후보를 양성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야나이 다다시 패스트리테일링 회장(60)은 “앞으로 회사를 이끌어 갈 후계자를 키우는 작업에 주력해 65세가 되면 현역에서 은퇴하고 싶다”고 공공연하게 얘기한다. 그는 2009년 ‘일본 부자 1위’로 뛰어올라 세간을 놀라게 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으로 사양산업으로 여겨지던 일본 의류업계를 부활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너경영 체제의 명암(明暗)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한국 대기업은 대부분 오너경영 체제를 택하고 있다. 매끄러운 경영권 계승을 위해 일찍부터 자녀들을 경영에 참여시키고 있다. 실무경험과 함께 아버지가 직접 경영하는 모습을 수십 년 간 지켜보면서 간접경험과 학습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이건희 삼성 회장은 1968년 입사 이후 1987년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타계할 때까지 경영수업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룹 부회장 재직기간만 따져도 1978년부터 근 9년에 달한다. 이 기간 동안 중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한 것을 물론 반도체 사업 등 그룹의 미래 성장동력이 될 사업에 관해서는 자신이 직접 관장했을 정도다. 그런 만큼 한국기업은 전문경영인 중심의 해외 기업들에 비해 후계 구도가 명확해 ‘CEO 부재 리스크’에 대비하기 쉬운 측면이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그룹이나 현대기아차그룹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이들 그룹은 이미 승계 계획(Succession Plan)을 마련해 놓았다.
이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최고운영책임자 사장은 체계적인 경영자 수업을 받아왔다. 2001년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경영전략담당 상무보로 처음 경영에 참여한 이래 전무, 부사장, 사장으로 차근차근 승진하면서 업무의 폭을 넓혀왔다. 삼성의 글로벌 사업을 챙기면서 해외 주요 거래처 최고경영진들을 만나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참여하고 있다. 삼성 고위관계자는 “삼성은 특검 사태로 이건희 회장이 2008년 4월 공식 퇴진한 후 23개월가량 그룹회장직이 공석인 경험을 했다. 그 때도 전문경영인들을 중심으로 시스템적으로 일이 처리되도록 해 별다른 문제없이 각 계열사가 가동됐다”고 밝혔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병가를 떠나면서 겪은 주가 하락 등의 동요도 삼성에서는 생길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 않아 보인다. 이미 1999년 ‘오너 병가 리스크’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건희 회장이 국내에서 폐암수술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MD앤더슨 암센터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런 만큼 CEO 건강리스크에 대해서도 상당부분 단련돼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기아차그룹도 상황이 비슷하다. 올해 만 73세인 정몽구 회장은 지금도 거의 매일 새벽에 출근할 만큼 업무를 챙기고 있다. 여기에 정 회장의 장남인 정의선 현대기아차 부회장이 경영 전면에서 뛰고 있어서 애플과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물론 한국의 오너 경영승계에도 약점은 있다. 역량이 부족한데도 오너 가문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경영을 승계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럴 경우 새로 바뀐 오너가 독단으로 잘못된 판단을 내릴 경우 실적 악화 정도가 아닌 회사의 존폐 자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사업상 한 번 잘못 판단한 중대결정은 되돌릴 수 없으며 막대한 비용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CEO가 중병에 걸렸거나 임기만료를 앞두고 부랴부랴 승계를 준비하는 기업은 이미 늦다. CEO의 건강 문제부터 불의의 사고, 개인 비리 등 갑자기 물러날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CEO 승계에 대한 준비는 빠르면 빠를수록 바람직하다. CEO 경영승계는 육상 릴레이 경기에서 바통 터치와 비슷하다. 아무리 자신이 훌륭한 레이스를 펼쳤더라도 후임 CEO에게 제대로 바통을 넘겨주지 못할 경우, 해당 기업은 어려움에 처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