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보다 더 뛰어난 사고를 하는 범용인공지능(AGI) 시대가 눈앞으로 다가오면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도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다. 인류 역사상 불의 발견 이후 가장 큰 사건으로 꼽히는 시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총성 없는 전쟁’이 펼쳐지고 있다.
불과 지난해까지만 해도 공상과학 영화 속 AI 수준인 AGI의 시대가 현실이 되기엔 아직 멀었다는 전망이 많았다. 하지만 지난 2월 챗GPT 개발사 오픈AI가 이용자의 명령어로 동영상을 제작하는 AI 모델 ‘소라(Sora)’를 공개하며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소라는 키워드 몇 개만 입력하면 마치 실제 촬영한 것처럼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 영상을 순식간에 만들어낸다. 영상 생성 AI는 AGI 시대가 목전에 다가왔음을 증명하는 기술이다. 짧은 명령어만으로도 AI가 스스로 연관된 주변 세계를 상상해 추론해야만 구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픈AI의 샘 올트먼 CEO는 소라를 소개하며 “4~5년 안에 AGI가 완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소라는 기술 개발이 완성 수준임에도 곧바로 상용화되지 못하고 있다.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해야 하는 영상생성 AI를 다수의 이용자들이 쓰기엔 아직 반도체 서버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현재 생성형 AI에 주로 쓰이는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는 본래 AI가 아닌 게임에서 고화질 그래픽을 처리하는 데 쓰도록 고안된 반도체다. 다만 컴퓨팅 능력이 극도로 좋은 만큼 AI 연구에도 쓰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엔비디아의 H100 등 GPU 기반 슈퍼 칩은 가격이 비싸고 전력을 많이 소모한다는 문제가 있다. 또 사실상 엔비디아의 독점 공급 체제여서 칩 자체를 구하기도 어렵다.
이 같은 수요와 공급의 비효율을 해소하기 위해 업계에서는 AGI를 위한 맞춤형 반도체 개발과 생산망 확보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커졌다.
AGI 서비스 개발에는 압도적 저전력·고성능의 맞춤형 칩이 요구된다. 결국 다가올 AGI 시대는 ‘절대 칩’을 만들어내는 기업이 지배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같은 요구에 힘입어 세계 유일 종합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도 AI 연산의 두뇌 역할을 할 차세대 AI 반도체 개발에 착수했다.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AGI’ 개발을 위해 미국 실리콘밸리에 특별 연구 조직을 신설하고 이 분야 최고 전문가들을 영입했다.
이 조직의 리더는 구글의 텐서처리장치(TPU) 개발자 출신인 우동혁 박사(SVP)가 맡는다. 그는 구글에서 TPU 플랫폼을 설계했던 세명 중 한 명이다.
삼성전자의 이 조직은 ‘AGI컴퓨팅랩’이라는 명칭으로 운영된다. AGI컴퓨팅랩은 미 현지에서 ‘마이크로아키텍처’ 수석 개발자 등 핵심인력 채용 공고를 내면서 조직을 확대하고 있다. 그동안 삼성전자는 AI 반도체의 두뇌 역할을 담당하는 핵심 칩보다는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연산을 돕는 메모리반도체를 중심으로 시장에 대응해왔다. 이제 메모리를 넘어 AGI 칩 개발에 본격 뛰어든 것은 AI 시장의 핵심 분야를 정조준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AI 시장이 이제 막 꽃을 피운 만큼 차세대 AGI 칩 시장을 두고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선점 경쟁은 치열한 상황이다. 구글·오픈AI·소프트뱅크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수백조원을 쏟아부으며 ‘쩐의 전쟁’에 나설 정도로 시장 주도권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점도 삼성을 자극하고 있다.
구글은 최신 칩 ‘TPUv5p’를 자사 최신 모델 제미나이에 적용했고, 마이크로소프트(MS)는 칩 ‘마이아100’을 공개했다. AI 기업이 자체 칩 개발에 뛰어든 것이다. 샘 올트먼 오픈AI CEO가 1월 한국을 방문해 삼성전자·SK하이닉스 경영진을 면담한 것도 협업을 위해서다.
페이스북 운용사 메타의 마크 저커버그 CEO도 최근 약 10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AGI를 두고 협업을 논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메타도 AGI 개발을 선언한 상태다. 엔비디아 GPU를 대량 구입해 초거대 AI ‘라마3’ 성능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만약 저커버그 CEO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을 면담하면 AI 칩 생산 등을 논의할 가능성이 있다. 메타가 설계한 AI 칩을 삼성전자 파운드리에서 생산하는 시나리오다. 반면 삼성은 AI 추론용 칩 설계 부문에서 협력을 제안할 수 있다.
이 같은 전방위적인 AGI 시장 참전은 수백조원을 넘는 역대급 투자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 시장조사 업체 가트너는 올해 439억달러(약 59조원)로 전망되는 AI 반도체 시장이 성장을 이어가 2030년 1179억달러(약 158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글로벌 기업들의 투자 확대가 지속된다면 시장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현시점에서 가장 큰손으로 꼽히는 인물은 샘 올트먼 오픈AI CEO와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다. 올트먼 오픈AI CEO는 무려 7조달러(약 9000조원)를 조달해 자체 AI 반도체 제조 능력 확보를 추진 중이다. 올트먼 CEO는 이를 위해 아랍에미리트(UAE) 정부를 포함한 여러 투자자를 만나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도 100조원이 넘는 금액을 베팅했다. 블룸버그 등 외신들은 최근 “소프트뱅크가 엔비디아와 경쟁하고 AI에 필수적인 반도체를 공급하기 위해 1000억달러(약 133조6000억원)에 달하는 자금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손 회장이 추진하는 프로젝트는 ‘이자나기(Izanagi)’라는 프로젝트명으로도 불린다. 이자나기는 일본에서 ‘창조와 생명의 신’을 의미한다. 손 회장은 마지막 세 글자(agi)에다 모든 곳에 쓸 수 있는 AGI의 의미를 담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손 회장은 10년 안에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AGI가 등장할 것이라 예측하면서 “AGI는 앞으로 10~20년 후 모든 산업에서 인류를 선도하게 될 것”이라 공언했다.
소프트뱅크는 이자나기 프로젝트에 300억달러를 투입하고 나머지 700억달러는 중동의 ‘오일 머니’를 통해 투자받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토대로 소프트뱅크가 지분 90%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반도체 설계 업체 ARM을 지원하면서 엔비디아에 대항하는 AI 반도체 기업을 키우겠다는 복안이다.
삼성은 오픈AI·소프트뱅크 등 현시점에서의 ‘빅2’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향후 오픈AI와 소프트뱅크, 삼성전자로 이어지는 반(反)엔비디아 삼각편대가 꾸려질 가능성도 점쳐진다.
오픈AI는 최근 구글 출신의 리처드 호 시니어 디렉터를 하드웨어 부문 대표로 영입했다. 호 대표는 구글에서 AI 작업에 특화된 반도체인 ‘텐서 프로세싱 유닛(TPU)’ 프로젝트 리더를 맡으며 엔지니어링 수석 디렉터를 역임했다. 삼성전자의 신설 ‘AGI컴퓨팅랩’을 이끌게 된 우동혁 박사(SVP)와 함께 TPU 프로젝트를 초기부터 꾸려온 인물이다.
손정의 회장과 이재용 회장의 인연도 계기가 될 수 있다. 이 회장과 손 회장의 인연은 20년이 넘었다. 삼성전자와 소프트뱅크는 1990년대 말 ARM 인수를 공동으로 추진한 이후 현재까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현재 AI 반도체 시장의 절대강자로 꼽히는 엔비디아는 합종연횡으로 ‘독주 체제 굳히기’에 나서고 있다. 한편으로는 반(反)엔비디아 전선 형성을 경계하며 공개적으로 견제에 들어가기도 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도 AGI의 시대가 목전에 왔음에 동의하고 있다. 황 CEO는 “만약 AGI를 ‘인간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한다면 인간 수준의 인식을 가진 AGI의 등장은 멀지 않았다”면서 “AI에 여러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시험의 목록을 내놓으면, 5년 안에 그 시험 전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것”이라고 말했다.
예컨대 현재의 AI는 변호사 시험은 통과하더라도 소화기 내과 같은 전문 의학 시험에서는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5년 안에는 이를 비롯한 모든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젠슨 황 CEO는 다만 막대한 추가 투자가 필요하다는 반엔비디아 전선의 의견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연초 UAE 두바이에서 열린 세계정부정상회의(WGS)에서 반도체칩의 성능 개량으로 AI 투자 비용이 감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언급을 두고 시장에서는 올트먼 CEO가 추진하는 5조~7조달러(약 6600조~9300조원) 규모의 펀딩에 대한 반론으로 해석하고 있다.
최근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인 대만 TSMC가 세계 2위 메모리반도체 기업 SK하이닉스와 ‘AI 반도체 동맹’을 맺은 것도 엔비디아 중심의 AI 반도체 시장에서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맥락으로 풀이된다.
SK하이닉스와 대만의 TSMC가 ‘AI 반도체 동맹’을 구축했다. SK하이닉스는 생성형 AI 열풍을 타고 HBM 시장에서 강자로 떠오른 기업이고, TSMC는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기업이다. 차세대 AI 반도체 패키징에 기술력을 모아 AI 반도체 시장에서 두 회사가 승기를 굳히겠다는 전략이다.
이 같은 AI 반도체 동맹은 삼성전자에 대항해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차원으로 해석된다.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TSMC와 6세대 HBM인 HBM4 관련 개발협력을 포함해 ‘원팀 전략’을 수립했다. 두 회사는 AI 반도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엔비디아와 함께 각자 시장에서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TSMC는 엔비디아의 GPU를 위탁생산하면서 시장을 장악하고 있고, SK하이닉스는 GPU의 연산을 지원하는 HBM 시장에서 점유율이 절반을 넘어서고 있다. 두 회사 간 협력은 차세대 HBM으로 꼽히는 HBM4 일부 공정을 TSMC가 담당하는 방식으로 물꼬를 틀 것으로 관측된다. TSMC는 이를 바탕으로 기존 제품에 비해 호환성을 대폭 개선할 수 있도록 패키징 전략을 추진할 전망이다.
이 같은 동맹은 HBM4 시장에서 역전하겠다는 목표로 메모리·파운드리사업부가 일체형으로 움직이겠다는 삼성전자의 ‘턴키 전략’에 대응하는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오찬종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3호 (2024년 4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