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경제 갈등의 파장에 대한 대응으로 이참에 우리 경제의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생물자원 활용과 관련된 나고야 의정서가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나고야 의정서는 1992년 리우에서 서명된 생물다양성 협약의 부속서로 유전자원에 대한 접근, 그리고 이용에 따른 이익의 공정한 배분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2010년 제 10차 생물다양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채택됐으며 현재 100여 개 국가가 비준했다. 의정서가 발효된 국가로부터 생약자원을 수입하여 연구 또는 제품 등을 제조할 경우 제공국가로부터 접근 및 사용에 대한 허가를 받아야 하고, 이후 제품 판매로 발생한 이익에 대한 로열티도 지불해야 한다.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는 우리의 생약자원을 확보 보존하여 관리하고 수입을 대체할 수 있는 대체 생약을 발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진 환경에 직면한 것이다.
한일 갈등 국면에 이 나고야 의정서가 재조명되는 것은 생약자원이 많이 쓰이는 식품·제약바이오·화장품 분야 등의 일본산 원료를 대체하자는 분위기가 일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분야는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품목에 들어가 있지 않지만 국내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이 거세지면서 영향을 받고 있는데, 다행(?)히도 이미 대외 의존도가 높은 원료를 대체하기 위해 연구 개발을 꾸준히 해오고 있어 그 파장을 줄일 수 있는 여건이 어느 정도 준비돼 있다. 우리 산업의 제약 여건이 되었던 나고야 의정서가 역설적으로 국가 위기 상황에 선택지를 넓혀주고 있는 것이다.
제주국가생약자원관리센터 조감도
2018년 국회에서 열린 관련 토론회에서 환경부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미래 산업으로 각광받는 바이오 산업의 경우 절반 정도가 해외 생물자원을 이용 중이다. 2017년 기준으로 중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해외 생물자원을 가져다 쓰고 있고, 그 다음이 유럽·미국 순이다. 나고야 의정서 발효에 따른 기업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이들 중 상당수는 대체 국산 자원을 발굴해야 한다.
예를 들어 보면 화장품의 경우 보습, 향료 등의 기능으로 식물 추출물, 오일 등의 소재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고, 의약품의 소재로 사용되는 생물자원은 은행잎 추출물, 계피, 정향 등이 있다. 클로렐라 인삼 등은 피부 관련 생약 원료도 애용된다.
이런 상황에서 내년 초 첫 삽을 뜨는 제주국가생약자원관리센터의 역할은 중요하다. 나고야 의정서 발효 이후 우리 정부의 구체적 대응 조치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아열대성 생약자원들은 사용 빈도에 비해 관리 체계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에 제주도 서귀포시 상효동에 들어서는 이 센터는 수요자 입장에서 민간생약, 아열대성 생약 등을 발굴하고, 수입대체생약을 위한 효능물질 연구, 그리고 해외유입 생약자원에 대한 안전관리 체계 마련에 집중할 예정이다.
우리나라에 자생하고 있는 생약, 고서 등에 사용이력이 있으며 전통지식과 연계된 생약,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량으로 사용하고 있는 빈도가 높은 생약, 의약품, 화장품, 건강기능식품 등에 사용되고 있는 생약 등을 우선순위에 둘 예정이다.
센터는 이를 바탕으로 표준 생약을 제조하는 한편, 아열대 생약에 대한 기준규격을 만들고 우리 종의 해외 무단 사용을 막는 노력도 할 예정이다. 국내 자생 생약자원을 확보·보존하여 이를 입증하는 근거자료를 마련하여 로열티 분쟁 시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생약의 기원 조사, 검체 수집, 품목별 DB 구축, 기원종별 표본 제작 등의 단계를 거칠 방침이다.
2015년도 통계에 따르면 아열대성 생약재의 경우 국내 유통 중인 생약(한약)제제의 약 72%가 관련 종 1개 이상 포함하고 있을 정도로 많이 쓰이고 있다. 전체 생약 수입량의 약 10%를 아열대성 생약이 차지하고 있다. 대한민국약전, 생약규격집에 있는 601품목의 한약재 중 100여 개가 아열대성 생약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쌍화탕에 들어있는 육계나 경옥고 성분 중 하나인 침향이 아열대성 생약이다. 쓰임새가 많은 종일수록 해외 분쟁 사례가 많이 나타날 수 있다.
해외 국가들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각국도 차분히 나고야 의정서가 본격적으로 발효됨에 따른 준비를 하고 있다.
아무래도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국가는 중국의 행보다.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생약들이 많아 로열티 문제가 가장 많이 발생할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관련 업계에서 중국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중국은 나고야 의정서를 발효하긴 했지만, 아직 관련 법안이 마련되지 못해 시행을 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중국은 나고야 의정서만 담당하는 부처를 만들어 생약 전쟁에 적극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중국과 사정이 조금 다르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일본은 자국 생약 자원의 해외 사용에 유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수입 규모도 비교적 크지 않은 상태에서 현재 한일 갈등에 일본산 생약제제를 사용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강하게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일본과 나고야 의정서 문제로 인해 갈등을 빚게 될 소지는 그리 높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 분야는 일본의 화이트 리스트 품목에서도 빠져 있다. 센터는 우리 생약 제제의 보존 및 관리뿐만 아니라 제품화 지원으로 우리 관련 산업의 경쟁력 제고 방안도 마련하고 있다. 한약진흥재단과 시제품을, 온난화대응농업연구소 및 농업기술원 등과 재배기술 등에 협력하고, 제주창조혁신센터와 기능성화장품 기술개발도 지원할 예정이다.
제주국가생약자원관리센터는 크게 4개 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아열대성 생약자원을 재배하는 재배장과 온실이 있으며, 품질관리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동도 있다. 생약의 모양이나 냄새 등을 직접 체험하고 실제 제품을 만드는 과정 등을 볼 수 있는 체험 및 홍보관도 마련돼 있다.
식약처 관계자는 “제주 센터 건립으로 나고야 의정서로 맞닥뜨릴 수 있는 생약 안보와 관련한 국제 환경 변화에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면서 “소비자와 생산자들에게 모두 이익이 돌아가며 국익도 동시에 지킬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