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화병’이란 말이 떠돈다. 뉴스를 통해 접하는 절망적인 소식에 한숨과 분노가 깊어지고 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믿기 어려운 일들이 현실로 드러나면서 심리적인 공황상태에 빠졌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SNS상에서 ‘화병’과 ‘우울증’이라는 키워드가 심심찮게 보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태는 장기전으로 가는 모양새다. 가슴 속 ‘울화’가 장기화되면 자칫 건강을 해칠 우려가 커진다. 작은 촛불 하나라도 제대로 들기 위해서는 스스로 건강을 챙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김종우 강동경희대병원 한방신경정신과 교수는 “사회적 이슈나 뉴스를 접하고 생긴 화를 주체하지 못 하겠다고 호소하는 환자가 늘었다”며 “울화를 나만의 문제로 돌리기보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통해 표출하면서 이성적 해답을 찾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화(火)는 장기간 지속될 경우 우울증, 고혈압 등으로 악화될 수 있어 올바른 방법을 통해 초기에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에만 있다는 ‘hwa-byung’
화병의 의학적 명칭이 재밌다. 1995년 미국정신의학회에서 화병을 ‘화병(hwa-byung)’으로 표기하며 한국인 특유의 문화증후군으로 인정했다. 우리나라에서만 존재하는 특징적인 신경증인 셈이다.
마음이 병들면 몸도 망가질 수 있다. 신체 증상을 동반하는 우울증으로 규정된 화병은 우울감, 식욕저하, 불면증 등 우울 증상 외에도 호흡 곤란과 심계항진, 몸 전체의 통증 또는 명치에 뭔가 걸려 있는 느낌 등의 신체 증상도 동반되어 나타난다.
최근 광화문 집회에서 탈진, 호흡곤란 등으로 구급차에 실려 간 환자들이 발생한 것도 화병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화병은 약물 치료나 정신 치료를 병행하며 치료할 수 있고 대화와 취미활동을 통해 개선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집중할 수 있는 취미, 화병 최대의 명약
#40세 중학교 교사 박구속(가명) 씨는 요새 뉴스만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가도 때로는 울분이 치밀어 올라 주변사람에게 짜증을 자주 냈다. 수업을 하다가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여러 차례 울컥하기도 했다. 며칠을 보내고 나니 얼굴에 열이 차고 명치끝도 갑갑해 밥도 잘 안 넘어간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자려고 누워도 치밀어 오르는 화에 밤잠을 계속 설친다. 김 씨는 스스로 이상하다 싶어 정신과를 찾았다. 화병과 불안장애·분노조절장애 초기증상이란 진단결과가 나왔고 즐기며 집중할 수 있는 취미생활을 가져보라는 의사의 권유를 따르기로 했다.
음악이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는 사실은 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진 것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 김 씨는 평소에 관심이 있었던 클래식을 파보기로 했다. 이왕 취미생활을 가지는 김에 제대로 ‘배워 보자’고 다짐했다. 음악과 ‘배운다’라는 표현이 쉽게 어울리진 않지만 그만큼 어렵다는 인식이 강한 클래식인 만큼 가까이 다가가려 해도 방대함이나 화성학 혹은 악기에 대한 식견 등을 이유로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뉴스를 조금 멀리하고 수험생 공부하듯 집중해 증세를 완화시키자고 생각한 A의 생각은 첫 강의를 듣고 조금 달라졌다. 짤막한 공연으로 시작한 강의는 작곡가의 세계관은 물론 유년시절 성적, 여러 뮤즈와의 사랑(?) 등 정사와 야사를 넘나들며 음악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개설된 클래식 강좌들은 수준별로 다르게 구성되어 있지만, 초보자 과정은 음악의 가장 핵심적인 레퍼토리들을 이해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지루할 수 있는 강좌 외에 원음 스피커와 블루레이 영상을 통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감상하거나 실제 콘서트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필기도구와 포스트잇 등을 잔뜩 챙겨간 김 씨는 헛웃음을 지었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같은 이유로 강좌를 찾았다는 옆 사람과 대화도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이 됐다. 풍월당·세종문화회관 등 대표적으로 클래식 강좌를 운영하는 곳에는 꽤 많은 꽃중년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지적 유희’를 원하는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클래식 강좌가 인기를 끌고 있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포슬린페인팅 작품들
▶소화장애·고혈압 증세 동반
신체활동 동반한 취미로 이겨내야
#강남에서 편의점 3개를 운영하고 있는 40세 길라임(가명) 씨는 조금 더 상황이 심각했다. 앞의 김 씨와 비슷한 화병 증세를 겪었다. 이에 더해 평소 고혈압을 앓고 있었던 데다 최근 들어서는 소화장애 증세를 보여 신체적인 문제까지 도졌다. 이러다가 병이 커지겠다 싶어 찾은 곳은 바로 ‘크라브마가’ 도장이었다. 직업상 야간에 계산대를 지키다 보면 때때로 취객 등을 맞닥뜨리는 등 위험한 상황을 맞기도 한다는 안 씨는 운동을 취미로 선택했다. 그중에 호신술과 절도 있는 동작이 매력적인 실전격투술 ‘크라브마가’를 선택했다.
영화 <아저씨>의 액션 장면에 차용된 크라브마가는 1946년 이스라엘의 이마이 리히텐필드(Imi Lichtenfeld)가 창시했다. 이 근접 격투술은 이슬람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는 이스라엘의 ‘죽여야 사는’ 현실이 반영됐다. 징병제가 유지되고 있는 이스라엘 국민들은 2년간의 군 복무를 하는 동안 여성을 포함해 모두 기초적인 크라브마가 기술을 익힌다.
1대 1뿐 아니라 1대 다수의 대치 상황에서의 생존 시스템을 목적으로 전문가에 의해 만들어진 시스템이 크라브마가의 핵심 철학으로 알려졌다. 크라브마가 강습도장은 일반적인 무술도장과 다르게 실제 크기와 같은 모형 칼과 총기류가 비치돼 있었다. 훈련도 총칼을 든 상대에 맞서 재빠르게 치명적인 반격을 가해 제압하는 동작을 반복한다. 낭심 차기, 눈 찌르기 등 가격 시 큰 고통을 주는 치명적인 동작을 다양한 자세로 시뮬레이션한다.
훈련은 체력훈련과 호신술을 조합한 지도가 약 1~2시간 행해진다. 하지만 레벨이 올라감에 따라 체력훈련보다는 테크닉에 중점을 둔다. 수련이 정점에 이를 경우 이스라엘에서 교관 자격을 주는데, 6명의 적과 실전과 다름없는 대결에서 제압할 정도의 실력을 갖춰야만 한다.
규격화된 품새는 없지만 수련자에게 불리한 상황인 상대가 권총이나 나이프를 들고 공격하는 여러 상황들을 상정해 두고 각자에 맞는 대응 동작을 정해서 가르친다. 반응력과 반사력을 키우며 주로 상대방의 공격을 쳐낸 다음 낭심 공격, 박치기 등 급소를 효율적으로 공략해 상대에게 최대의 손상을 주는 순서로 되어 있다.
입문한 지 2주가 됐다는 안 씨는 훈련을 마친 후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치고받는 와중에 스트레스도 풀리고 나도 모르게 반응속도가 빨라지고 동작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희열을 느낀다”며 “집중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어 스트레스도 많이 풀리는 것 같다”고 밝혔다.
▶갱년기 증상과 유사해 방치 우려도
#제약회사에 다니는 51세 여성 계순실(가명) 씨는 최근 우울증을 앓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소심한 성격으로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던 A씨는 딸의 입시문제까지 신경 쓰다가 빈혈증세가 심해졌다. 폐경기를 맞으며 겪는 자연스런 현상인줄 알았으나 진단명은 화병이었다.
화병은 특히 갱년기에 나타날 수 있는 증상과 혼동 가능성이 크다. 특히 중년 여성의 경우 여성호르몬이 감소되는 폐경기의 갱년기 증상과 화병 증상이 혼동될 수 있다. 평소 가슴에 열이 나고 뒷골이 당기며 뭔가 뭉친 것 같은 증세가 2주 이상 지속된다면 전문의와 면밀하게 상담한 후 진료 받는 것이 좋다고 한다.
섬세한 성격의 계 씨는 평소 예술적이면서 희귀한 취미생활을 가지길 원했다. 휴직계를 낸 후 지인의 권유를 받아 포슬린 페인팅을 시작했다. 포슬린 페인팅은 유럽 왕실과 귀족들의 우아한 취미생활로 알려진 예술 분야로 미국, 일본 등지에서도 취미 공예로 인기가 높다.
국내에 소개된 지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전문가나 클래스가 부족한 탓에 대중화 단계까지는 가지 못 했다. 덕분에 국내에서도 아는 사람만 즐기는 고급 취미 예술로 꼽힌다. 20가지 이상의 특수 물감을 사용해 유약 처리가 된 자기 표면에 그림을 그려 구워내는 공예 예술이다. 포슬린 페인팅에 사용되는 파우더 형태의 물감은 오일을 섞어 쓴다.
그림을 완성한 후에 가마에 구우면 물감이 유약 밑으로 스며들어 영구히 지워지지 않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자기를 소재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컵, 접시, 그릇, 도자기 등 어떤 것이라도 포슬린 페인팅의 도화지가 될 수 있다. 주로 주방용품에 그림을 그리는 형태로 보급된 탓에 여성들의 고상한 취미활동 정도로 알려졌지만 최근에는 벽화나 다양한 조형물을 소재로 한 전시 작품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클래스에 들어가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다 보면 2~3시간이 훌쩍 지난다”고 밝힌 계 씨는 “스스로 만든 작품을 집에서 사용하고 전시하면서 우울증을 극복했다”고 웃으며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