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진학 전 주산·웅변·속셈학원, 고등학교 진학 전 수학의 정석·성문영어 종합반’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 관심이 있고 없고를 떠나 경제적인 여건이 허락하는 가정이라면 수십 년 전부터 선행교육은 필수코스였다. 공부시키지 않으면 진학 후 뒤떨어질지도 모른다는 학부모들의 공포심을 충분히 활용한 학원들의 마케팅전략도 주효했다. 덕분에 방학은 학원들의 대목이었다. 학기가 시작되면 다시 다음 학년 선행교육이 이어진다. 새 학기에 배워야 할 학습내용을 방학동안 배운 대다수의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딴짓을 하거나 아예 엎드려 자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면학분위기가 무너지기 쉽다. 비슷한 시기에 교권붕괴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한편 교사들은 자연스레 학생들이 선행교육을 받았다고 감안하고 수업을 진행하다 보니 여건상 학원을 다니지 못하는 학생들은 ‘눈뜬 장님’이 되기도 한다.
뒤늦게 정부가 무너진 공교육을 바로잡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공약이었던 선행학습금지법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관련내용을 담은 ‘공교육정상화촉진및선행교육규제특별법’이 지난 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구체적인 시행령이 마련되면 올해 9월부터 학교현장에 적용된다.
법안이 시행되면 학교에서 교육과정을 벗어난 내용을 가르치거나 시험에 출제할 경우 학교와 교사가 징계를 받게 된다. 사교육의 보고인 학원은 선행학습 자체를 제한받지는 않지만 이를 광고·선전하는 행위에 대해 규제받는다. 법안이 통과되자 예상되었던 비판이 사방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선행학습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설득력 있는 지적부터 교육제도의 근본적인 문제인 대학서열과 학벌중심 취업실태 등을 개선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비판도 눈에 띄고 학생들의 학업성취도가 하향평준화 될 것이라는 다소 근거가 부족한 예측까지 다양하다. 하루아침에 화제의 중심에 섰지만 선행학습금지법은 몇 년 전부터 논의되어온 주제였다.
현재 흘러나오는 비판이나 우려 들은 다양한 토론과정과 논의를 통해 이미 충분히 수렴과정을 거쳤다. 선행교육 규제법안을 반대하는 측도 논지를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부분은 공교육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공감대다. 정부도 관련 법안을 도입한 취지에 대해 공교육기관에서 선행학습을 유발할 수 있는 요인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안상진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연구소 부소장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현재 공교육 중학교 3학년생들이 고교입학 전 배치고사에는 고교 1학년 과정 내용에서 출제됐고 대학별 고사 자연계 논술의 경우 지난해 주요 15개 대학의 문제에서 대학교육과정에서 출제 됐다”고 밝히며 교과과정 자체가 선행교육을 전제하는 관행이 굳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교과부가 발표한 사교육 의식조사에 따르면 사교육 증가의 핵심원인 중 하나가 학교에서 실제 배우는 내용보다 훨씬 어렵게 출제된다는 점이 꼽히고 있다. 학생들의 핵심적인 평가기준이 되는 시험문제 출제에 선행학습을 전제하고 상위학년과정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교육이 소득수준에 따른 학력차를 유발하고 있다는 비판도 피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무너진 공교육을 바로 세우자는 기치 아래 오랜 논의과정으로 품은 결과물인 선행교육 규제법안이 부화했다. 당장 올해 2학기부터 어떤 변화가 있고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미진한 점은 없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어몰입교육 금지·사고력·응용력 요하는 문제 출제
선행교육금지법의 도입으로 변화될 주요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본적으로 초·중·고 전 과정에서 학교에서 정한 교육과정을 벗어나서 가르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됐다. 초등학교 1, 2학년 때 성행하던 영어몰입교육이나 수업을 진행할 수 없게 됐다. 고입전형은 학교 밖 경시대회 수상경력이나 각종 인증시험 성적 반영이 금지될 예정이다. 이러한 내용은 특수목적고에도 속속 적용되고 있다. 2015학년도 과학고 입시에서 자기소개서에 각종 경시대회와 인증시험 등 선행학습과 관련된 내용을 기재하게 되면 면접에서 ‘최하등급’을 받도록 할 예정이다.
대입전형에서는 대학별 논술고사 등에서 학교 교육과정에서 벗어나 출제하는 것을 금지해 고교생들이 따로 대학 논술에 대비해서 대학과정을 공부해야 하던 것을 막는다.
일선 교사들은 바빠질 예정이다. 교과과정 운영부터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수업과정에서 상위과정의 내용이 더해졌는지도 주의해야 한다. 한 교육연구단체 관계자는 “대다수의 학교들은 매년 초에 교육과정 운영계획과 별도로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다”며 “학과 과정과 방과 후 수업을 하나로 묶어 편법적으로 선행학습을 시키는 케이스도 많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단골 지적사항이었던 학생들의 선행학습을 전제하고 문제를 내는 패턴도 개선해 나가야 한다. 선행학습과 관련한 평가문항을 통해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평가하던 관행을 깨고 철저하게 교과과정 범위 내에서 사고력과 응용력을 평가하는 문제를 연구해야 하는 숙제도 주어졌다.
단 시행령을 통해 선행학습 문제출제 여부와, 예습과 심화학습과 선행교육을 구분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이 정해질 필요가 있다. 수학이나 과학과목의 경우 상대적으로 교과과정의 구분이 명확하지만 영어 과목은 특히 심화학습과 선행학습의 경계가 모호해 처벌에 명확한 기준규정이 필요하다.
학원가 선행교육 프로그램 처벌규정 없어
사교육도 일정부분 규제를 받는다. ‘초등학교부터 준비해야 SKY간다’ 등의 선행 사교육 상품을 광고·선전하는 행위는 금지된다. 그러나 문제는 처벌규정이 없어 관련기관이 적발해도 제재할 방안이 없다. 학원들의 선행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규제는 아예 규제대상에서 빠져있다.
한 서울지역 일선 교사는 이러한 점을 꼬집어 “선행교육의 숙주같은 사교육은 방관하고 공교육만 다그쳐서 문제가 개선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올 6월 선거를 의식한 반쪽짜리 법안”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관계자는 “당초 한 의원이 제출할 당시에는 학원들의 과도한 선행교육을 규제할 방안이 담겨 있었으나 이에 동조하는 의원이 적었다”며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강남지역 지역구의원들은 특히 학원업계의 입김에 휘둘렸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측은 “법률 제정으로 모든 사교육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고 학교 교육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한 보충 사교육은 오히려 바람직하다”며 “근본적인 대안을 관철시키기 불가능한 상황에서 학교 교육이나 시험 등에서 학원 선행학습 상품을 부추기는 상황을 먼저 해소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논평했다.
한편 유치원, 어린이집, 유아 학원 등 공교육 이전단계에서 초등학교 단계의 교과과정을 편법적으로 진행할 때 이를 법률로 제재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특히 유행을 넘어 필수코스가 되어버린 영어유치원은 기존 학원과 마찬가지로 공포마케팅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한 교육업계 전문가는 “영어유치원이나 영어유아원은 영어몰입교육이 대놓고 이뤄지고 있지만 이번 규제대상에서 빠져 있다”며 “선행교육 광고나 선전대상에서도 빠져 이를 홍보수단으로 사용하는 곳도 있다”고 밝혔다.
초·중등교육법의 적용을 받는 일반학교들과 달리 영재교육진흥법이 적용돼 규제를 피한 영재학교에 대한 논란도 지속되고 있다. 현재 전국에 초·중등 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재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교육기관은 약 3000여 개에 이를 정도로 증가했다. 한 영재교육업체 관계자는 “법안이 통과된 후 입학관련 문의가 전년도에 비해 20%정도 증가했다”면서 “특히 수학·과학과목의 심화과정에 대해 학부모들의 관심이 많다”고 밝혔다.
선행교육금지법은 오랫동안 준비기간을 거친 것치고는 보완해야 할 점이 많아 보인다. 교육계의 오랜 병폐인 사교육 제한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미흡한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제 트랙 출발선에 섰으니 자세를 바로하고 속도를 붙여가며 완주를 해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선행교육 규제법안의 약점으로 지적되는 사항들
1. 영재교육, 조기진급 또는 조기졸업 대상자 등은 대상에서 제외.
2. 학원의 선행교육 프로그램의 판매는 규제 대상이 아님.
3. 초등학교 이하 단계 영유아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기관 등은 제외.
4. 학원의 선행 교습 행위 홍보 및 광고의 경우, 이를 제재하는 규정 부재.
선행교육 규제법 주요내용
1. 학교의 장은 학부모, 학생, 교원에게 선행교육 및 선행학습을 예방하기 위한 정기적인 교육을 실시하고, 예방에 관한 계획을 수립·시행해야 한다.
2. 학교는 편성된 학교교육과정에 앞서는 교육과정을 운영하여서는 안 되며, 방과 후 학교과정도 적용된다.
3. 지필평가, 수행평가 등 학교 시험에서 학교교육과정의 범위와 수준을 벗어난 내용을 출제해서는 안 된다.
4. 사교육 기관(학원, 교습소, 개인과외교습자)은 선행교육을 광고하거나 선전해서는 안 된다.
5. 학교별 입학전형을 실시하는 학교의 장은 학교 밖 경시대회 실적, 각종 인증시험 성적 등을 반영해서는 안 된다.
6. 대학별 고사(논술 등 필답고사, 면접·구술고사, 인성검사 등)를 실시하는 경우 고등학교 교육과정 범위와 수준을 벗어난 내용을 출제해서는 안 된다.
7. 교육과정정상화심의위원회의 심의 결과에 따라 교육부장관 또는 교육감은 위반한 교육관련기관에 시정이나 변경을 명할 수 있고, 이를 어길 시 재정지원 중단, 학생정원 감축, 학급 또는 학과의 감축·폐지 또는 학생 모집 정지 조치 등을 내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