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정우(41)는 2001년 영화의 단역으로 연기를 처음 시작, 올해로 ‘연기 인생’ 20년을 맞았다. 흔한 말로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고, 21세기 첫해 출생자들이 어느새 성인이 됐을 정도로 긴 시간, 연기 외길을 걸어온 그에겐 꽤나 긴 무명의 시절이 있었지만 그 시간을 뒤로 하고 어느새 어엿한 주연 배우로 발돋움했고, ‘믿보배(믿고 보는 배우)’라는 기분 좋은 수식어도 생겼다.
쉬지 않고 작품 활동(연기)에 몰두해 온 정우지만 작품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은 배우의 소관이 아닌 바, 정우는 영화 <이웃사촌>(감독 이환경)을 들고 오랜만에 관객들을 만난다.
2018년 2월 개봉한 영화 <흥부: 글로 세상을 바꾼 자> 이후 근 3년 만의 스크린 마실. 개봉을 앞두고 만난 정우에게선 ‘모처럼’이 주는 설렘의 기색이 역력했다.
“개봉하게 돼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관객들이 영화를 어떻게 봐주실지 설레기도 하고 기대도 되면서 궁금한 마음이 커요.”
영화는 좌천 위기의 도청팀이 자택 격리된 정치인 가족의 옆집으로 위장 이사를 오게 되어 낮이고 밤이고 감시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소재 면에선 1985년 고(故) 김대중 전(前) 대통령 가택연금 사건을 떠올리게 하지만 블랙 코미디성 웃음 코드와 휴머니즘이라는 메시지가 적절히 조화를 이룬 덕분에 정치색은 현저히 옅어졌고 대중성을 가미하게 됐다. <이웃사촌>을 선택한 계기는 시나리오가 1순위지만 실질적으론 이환경 감독에 대한 믿음이 우선했단다.
“배우들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것은 시나리오고 그다음이 감독과 제작진, 출연하는 배우들인데 이번 작품 같은 경우 이환경 감독님과 너무 하고 싶어서 선택한 게 커요. 감독님과는 알고 지낸 지 15년이 넘었는데, 감독님이 한번 보라고 시나리오를 주셨죠. 시나리오를 보기도 전에 감독님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이야기를 할지 어떤 캐릭터일지 잘 몰랐지만, 감독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고, 애정하는 마음이 있었거든요. 그런 상태에서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너무 신선하고 흥미롭고, 재미있었죠. 그래서 선택하게 됐어요.”
작품의 모티브가 된 역사적 ‘사건’이 있던 그 시절. 실제 도청이 공공연하게 존재했던 그 시절에 대한 감상을 묻자 정우는 “사실 그 부분은 영화 외적인 시나리오 장치라 생각하지, 우리 영화에 어떤 정치적인 요소가 있거나 역사적인 고증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라며 “그 부분보다는 드라마적인 스토리에서 감정 위주로 생각했다”고 답했다.
▶3년 만의 스크린 나들이… 좌천 위기 도청팀장 ‘대권’ 역 열연
극중 정우는 좌천 위기의 도청팀장 대권 역을 열연했다. 대권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자, 어설픈 도청팀원을 이끌어가는 팀장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안정부 김 실장(김희원)으로부터 미션을 받은 뒤 자택격리된 정치인 의식(오달수)의 이웃사촌으로 위장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미션을 부여 받은 인물이다. 대권은 자신의 감시 대상인 이웃사촌, 의식의 인간적인 모습에 감화되며 점차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대권은 (결과적으로) 극단적인 심리 변화를 보여주지만 그의 변화 과정은 우스꽝스러운 전개 속에도 섬세하고 치밀하게 그려진다. 이처럼 심리 변화가 큰 캐릭터에 대한 정우의 고민은 무엇이었을까.
“시나리오 안에서 감정들이 쌓여가는 게 느껴졌고, 시나리오상 감정 변화가 비교적 명확하게 표현돼 있어서 배우 입장에서 애매해진 않았어요. 오히려 중점을 뒀던 부분은 도청 신이었어요. 아무래도 한정된 공간에서 반복적으로 보이는 모습이 지루하거나 평면적으로 보일 수 있으니, 그런 장면을 표현하는 데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어떨 땐 표현을 과격하게 하기도 하고, 눈빛이나 시선 처리로 감정 표현을 대신하기도 했죠.”
하지만 대권을 연기하며 정우 본인이 느낀 감정도 작지 않았다. 그는 “저는 항상 작품을 할 때 내가 이 캐릭터에 연민을 느끼는가에 대해 생각하는데, 대권이는 감정의 진폭이 큰 캐릭터다 보니 더 많이 와 닿았던 것 같다”며 “겉으로는 무뚝뚝하고 거칠고 가족에게도 가부장적인 캐릭터가, 자신의 아이에게조차 어떻게 사랑을 표현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인물이 바뀌어가는 과정이 확 드러나니 대본과 캐릭터가 더 뜨겁게 느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업계에서 ‘인간미’로 소문난 ‘천만감독’ 이환경 감독(그는 영화 <7번방의 선물> 연출자다)이 선장으로 있던 만큼, <이웃사촌> 촬영장은 시종 화기애애하고 즐거웠지만, 촬영 자체는 만만치 않았다. 추운 날씨에 옷과 신발을 벗어 던지고 아스팔트 도로를 미친 듯이 전력질주하거나 차 위에 올라서는 장면은 말 그대로 ‘육탄전’이었다. 그는 “연기할 땐 몰랐지만 끝나고 나면 상처투성이였다. 체력적으로 굉장히 힘든 장면이 많았다”며 혀를 내둘렀다.
극중 민주화운동을 하다 김 실장에게 잡혀온 동생과 마주한 장면을 비롯해, 감정적으로 절정으로 치닫는 장면 역시 쉽지 않았다고. 정우는 특히 “감정적으로 몰입도 높은 장면(남산 신)을 촬영해야 하는데, 겨울이라 해가 짧아 3일 동안 나눠서 해야만 했다. 3일 가까이 감정을 유지하는 게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감정을 유지하는 게 굉장히 어려웠어요. 너무 그 감정에 치우쳐서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그 감정이 터져 버리는데, 그걸 다시 채우기가 어렵거든요. 현장에서 결국 감정이 먼저 터진 적이 있었어요. 제 입장에선 (촬영에 써야 할) 감정이 닳아 없어져버린 거죠. 그런데 배우로서 참 신기하면서도 귀한 경험을 한 게, 함께하는 동료들 그리고 감독님으로 인해 새로운 감정이 채워진 것을 느꼈어요. 그 힘으로 촬영을 했습니다.”
극한의 몰입과 여타 상황으로 배우가 지쳐 있을 때면 감독이 이끌어 다시 일으켜 세워주며 함께 가는, <이웃사촌>은 줄탁동시의 여정이었다. 무엇보다 정우와 이환경 감독이 인간 대 인간으로 통한 환경이었기 때문일 터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천만감독님의 기운을 받아보고 싶다’고 말했었어요. (이환경 감독의) 현장에서의 태도나 노하우가 궁금했고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제가 기대하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만족스러운 현장이었어요. 감독님도 제가 알던 것보다 더 섬세해지고 더 집요해지셨더라고요. 배우의 감정을 120% 이해하고 공감해주셨죠. 촬영하면서 육체적으론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부담을 가진 상태였지만, 감독님과 소통이 원활하게 잘 되다 보니 신명나게 했던 것 같습니다.”
정우는 특히 “어려운 감정 표현을 해야 할 때, 감독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시 시동을 걸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며 “지금도 뇌리에 깊게 박혀 있다. 배우 생활을 하면서 내가 과연 이런 경험을 몇 번이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 귀한 현장이었다”고 덧붙였다.
뜨겁게 몰두했던 <이웃사촌>을 통해, 인간 정우가 변화한 지점은 무엇일까.
▶“이환경 감독과 인간 대 인간으로 통해”
“개인적으로 영화라는 건 굉장히 예민한 작업이에요. 그리고 영화는 예민한 사람들끼리 만나 예민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었어요. 그런데 <이웃사촌>으로 시작해 <더러운 돈에 손대지 마라>, <뜨거운 피>까지 촬영을 하면서, 연기라는 게 비우고 해야 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에는 채운 상태에서 뭔가 뿜어내려고 했다면, 이제는 비운 상태에서 채워가면서 해야 하는구나 (느꼈죠). 그 변화의 시발점이 <이웃사촌> 그리고 이환경 감독이에요. 물론 그런 걸 느꼈어도, 실행에 옮기는 건 쉽지 않죠. 작품을 대하는 자세나 인물을 분석하는 태도, 모든 것들이 다 맞아떨어졌을 때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이런 경험들이 조금씩 쌓이는데, 그렇다 보니 작품을 보고 분석하거나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아요.”
대권을 연기하며 ‘아빠’ 정우로서 느낀 감정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전했다.
“대권이 도의적으로 어떤 행동을 할 때 내 가족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데서 애처로웠는데, 본인이 얼마나 힘든 상황을 겪고 있는지를 가족들은 모르죠. 그리고 대권은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아요. 그게 모든 아버지의 마음이지 않을까 싶어요. 그게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더라도 가족에게는 알리지 않고 알리고 싶지 않은 처절한 모습이 있는데, 그 모습이 애처롭고 안쓰럽죠. 응원하고 싶었어요. 그런 한 장면 한 장면이 쌓이다 보면 관객들도 어느 순간부턴 대권을 응원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의식의 가족이 화목한 모습을 보면서 자기 가족도 되돌아보고, 본인도 애정을 표현하고 싶어 하잖아요. 그런 걸 보면서, 내가 (대권만큼) 그런 건 아니지만, 언제나 나는 부족한 아빠구나 싶기도 했어요. 아직은 아버지라기엔 아빠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단순히 가정이 있고 아이가 있다고 해서 아버지라는 단어가 어울리진 않는 것 같아요. 아버지라는 말이 주는 무게감이 굉장히 크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001년 영화 <7인의 새벽>으로 데뷔한 뒤 영화 <라이터를 켜라>(2002), <품행 제로>(2002), <동갑내기 과외하기>(2003), <바람난 가족>(2003), <그 놈은 멋있었다>(2004), <사생결단>(2006), <숙명>(2008) 등 수많은 작품에서 조·단역으로 활약한 정우. 그는 자신의 고교시절 경험담을 바탕으로 제작된 독립영화 <바람>(2009)으로 주목 받은 뒤 tvN <응답하라 1994>(2013)를 통해 대중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이후에도 그는 영화 <쎄시봉>(2015), <히말라야>(2015), <재심>(2017), <흥부: 글로 세상을 바꾼 자>(2018) 등 다양한 작품에서 울림 있는 연기로 폭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줬다.
▶선 굵은 서사에도 그만의 스타일 오롯이 살아
구수한 사투리가 살아있는 생활 연기에도, 정의 혹은 투철한 의식이 돋보이는 선 굵은 서사에도 그만의 스타일이 오롯이 살아있고, 눈빛은 해를 더할수록 깊어진다는 평을 받고 있는 정우. 하지만 이 같은 세간의 평가에 대해서는 “나는 그냥 정직하게 준비하고, 열심히 하려고 할 뿐”이라며 쑥스러워했다.
“사실 좋게 표현해서 열심히인 거지, 저는 뒤에선 일단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발악을 해요. 저는 그래요. 탁월한 사람도 아니고, 재능이 특출 나게 있는 것 같지도 않아요. 다만 ‘저 친구가 진심을 가지고 작품에 임하는구나’ 하는 소리를 들으면, 조금은 제 자신이 숨을 쉴 수 있지 않을까. 부끄럽진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20년째 연기 외길을 걸어온 정우에게 ‘열심’은, 의식적인 행위는 아니다. 이미 긴 시간 몸에 밴, 정성을 다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사실 연기적인 부분에서 ‘열심히 해야지’라고 마음먹고 접근하진 않는 것 같아요. 저는 그냥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열심히 하고 있구나’라고 봐주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힘들기도 하지만, 굉장히 흠뻑 취할 때가 자주 있는 것 같아요.”
연기 외에 ‘운동’에 에너지를 쏟는다는 정우. 그는 운동이 ‘목표’에서 ‘즐거움’이 된 변화를 언급하며 연기 역시 그렇게 하고픈 바람을 드러냈다.
“배우라는 직업 자체는 보이지 않는 터널을 계속 걸어가는 것 같아요. 내 미래에 대해 알 수 없잖아요. 그럴 때 뭔가 해야 하는데, 그때 내 몸을 힘들게 만들거나 피곤하게 만드는 습관을 들였어요. 단순히 근육 자랑을 위해서가 아니라, 뭔가 계속 하고 있다는 걸 느끼기 위해 운동을 해왔죠. 습관이 되다 보니 지금도 계속 하고 있는데, 예전엔 어떤 목표를 갖고 운동을 했다면, 지금은 운동 자체를 즐기게 됐어요. 걸으면서 생각도 정리하고 들떠있는 마음도 다잡게 됐죠. 연기도 그렇게, 걷듯이 즐기면서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