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종영한 tvN 수목드라마 <싸이코패스 다이어리>는 어쩌다 목격한 살인사건 현장에서 도망치던 중 사고로 기억을 잃은 육동식(윤시윤 분)이 우연히 얻게 된 살인 과정이 기록된 다이어리를 보고 자신이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라고 착각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였다. 스릴러 소재 드라마였지만 B급 ‘병맛’ 코믹 요소가 적절하게 어우러지며 호평 속에서 종영했다.
드라마 종영 며칠 뒤 만난 윤시윤은 “매번 감회가 새롭다”면서 “종영이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달려왔다”고 미소를 보였다. “쉽지 않은 도전이었어요. 버라이어티한 신이 많았죠. 다치지 않고 무사히 잘 끝나서 다행이고, 아직은 실감이 안 나요. 조만간 배우들과 만나기로 했는데, 역할에서 빠져나와 있는 배우들을 봐야 실감 날 것 같아요.”
<싸이코패스 다이어리>는 윤시윤을 비롯해 정인선, 박성훈, 허성태 등 다수 배우들이 유기적으로 엮인 상태로 하나의 큰 사건을 파고들었지만 그 안에서 윤시윤이 맡은 ‘육동식’의 비중은 상당했다. 드라마 출연진 중 육동식과 붙지 않은 인물이 없을 정도로 윤시윤의 하드캐리가 돋보였다. 이에 대해 “비중이 거의 펭수급이었다”고 너스레를 떤 윤시윤은 “동식이로 인해 벌어지는, 동식이라는 미꾸라지가 이걸(극중 서인우의 설계) 흐리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거의 다 나왔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잘 소화한다는 전제 하에, 배우로선 많은 분량을 주시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라며 웃었다. 그의 말마따나, <싸이코패스 다이어리>는 데뷔 10년을 넘긴 윤시윤에게도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장르물인데 코믹도 많았고, 매 회마다 힘줘야 하는 신이 많았어요. 첫 회부터 7층 공사장 골조만 올라가 있는 데서 안전모를 쓰고 촬영해야 했고. 차에 치이는 장면, 비 오는 장면…, 지게차 액션신도 있었고 많았던 것 같아요. 촬영 당시에는 부담이 컸는데 그래도 본방송 날이 되면, 수고했던 신이 나오니까 ‘조금이나마 시청자가 봐주시겠지’ 하는 데서 안심이 됐어요.”
극의 텐션을 유지하면서도 때때로, 그 팽팽한 긴장을 풀어주는 코믹 요소가 들어있었다는 장르적 특이점은 <싸이코패스 다이어리>의 시그니처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어설픈’ 육동식이 있었다. “말 그대로,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육동식이 포인트였던 것 같아요. 스릴러도 안 되고 코믹도 안 되는, 코믹을 하기엔 세상 진지한 녀석, 하지만 스릴러를 하기엔 너무 순한 녀석. 그 중간을 연기하려 했죠. 그래서 더 무섭게 할 필요도 없고, 코믹한 신에서 더 재미있게 하려 할 필요도 없었어요. 스릴러 장면에선 박성훈 씨나 각 회차의 피해자로 열연해준 명품배우들이 긴장감을 증폭시켜주셨고, 코믹 부분은 최성원 씨를 비롯한 배우들이 다 해주셨죠.”
무엇보다 윤시윤에게 <싸이코패스 다이어리>는 예능 아닌 드라마였음에도 그 자신의 모습을 많이 보여줄 수 있어 더 특별한 작품이었다. “이번 드라마는 특히나 더, 원래의 제 성향을 많이 보여줬던 작품이에요. 칭찬 아닌 칭찬을 많이 받았는데, ‘ㅋㅋㅋ 너 같다’라는 게, 칭찬이겠죠?(웃음) 그런 모습들로 접근하고, 최대한 윤시윤스럽게 하려고 했어요.”
극중 육동식은 주변인들 사이에 호구로 평가되는 평범한 인물이지만 기억상실증에 걸린 상태에서 서인우(박성훈 분)의 다이어리를 손에 넣으며 스스로를 사이코패스라 인식하고 행동한다. “저는 제 모습을 연기했는데 사람들이 호구라고 봐주더라고요. 어리바리하다고. 다행인 건지 어쩐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너무너무 즐길 수 있었어요. 현실에서의 저는 늘 도전하고 고쳐나가야 하고, 오늘보다는 내일 더 나아지기를 채찍질하는 사람인데, 드라마 속 육동식은 내 모습으로 살아도, 매 신 매 컷 해도 ‘오케이’ 하며 인정을 받으니까. 그런 면에서 행복했던 것 같아요.”
윤시윤이 육동식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그가 ‘호구’ 육동식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정확히 분석한 뒤 접근했기 때문일 터다. 착해서 무시 받는 게 아닌, 다소 느린 것뿐인 육동식 그 자체를 말이다.
엄연히 동식은 리얼 사이코패스와는 거리가 멀지만 나름의 ‘각성’을 하며 전에 없던 모습을 보여준 인물이다. 그렇게 탄생한 ‘싸패동식(사이코패스 동식)’은 왼쪽 입꼬리를 씩 올린다거나, 특유의 서늘한 눈빛을 보여주는데, 이 역시 윤시윤의 철저한 ‘캐릭터 분석’에 기반한 결과물이다. “나름의 상징적인 사이코패스를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매우 지리멸렬하고 너무나 뻔한 사이코패스를 만들어야 했어요. 동식이가 생각하는 사이코패스는 그거니까. 영화에서만 본 거니까. 그래서 그렇게 했죠.”
윤시윤은 또 “인간은 가장 기쁜 순간에 눈물이 나고, 가장 슬픈 순간에는 웃음이 나온다고 하더라. 극도의 감정 안에는 두 가지가 혼재한다는 건데, 사실 내 생각이 뭐가 중요하겠나. 진짜 사이코패스를 연기하려면 사이코패스에 대해 공부하는 게 낫겠지만 육동식은, 내가 생각한 엉터리 생각을 주입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한 게 육동식에게 투영되고, 그러면서 스스로 만족하기를 바랐다. 말하자면 같잖음이랄까. ‘같잖음’이 동식의 미학인 것 같았다”고 부연했다. 이 같은 설정을 연기하며 든 생각은 “더 성장한 뒤 사이코패스 역할에 도전하고 싶다”는 것. 그는 “배우가 장르물에 도전하는 데는, 자신의 색채를 보여주면서도 임팩트 있고 무거운 혹은 특이한 주제를 전달할 수 있도록 훈련이 돼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면서 “일단 지금 도전할 수 있는 장르물에서는, 나 자신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이코패스 연기는 쉽지 않더라. 연기는 멜로건 우정이건 상대의 연기를 바라볼 때 나오는 케미라는 게 있는데, 사이코패스 연기는 반대인 것 같다. 그 어떤 게 오더라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자기 것을 지켜가는 게 필요한 연기라 쉽지 않았다”며 “지금은 내 자신의 내추럴함을 가지고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배우로서 더 성장한다면 언젠가는(사이코패스 역할에도) 도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싸이코패스 다이어리>는 열혈 시청자로부터 여느 국민드라마 못지않은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대중성을 담보하진 못했다. 1%대로 시작한 드라마 시청률은 최종회차 3%대까지 올라섰지만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라고.
“음식으로 치자면, 우리 드라마는 분명 특이한 소재였어요. 별미였죠. 맛이 있다 없다를 표현하기에 앞서서, 별미는 거부감 없도록 해야 하는 거였거든요. ‘이 음식 못 먹겠어’가 될 수도 있고, ‘뭔진 모르겠지만 먹어보고 싶어’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어야 하는데, 그건 배우의 역량인 것 같아요. 이걸 얼마나 거부감 없이 먹게 하느냐에 대해서는, 조금은 아쉬움이 남아요.”
그럼에도 윤시윤은 “말 그대로 코믹과 장르물이 섞여 있는, 특이해서 사람들도 상상 못 했던 건데 어찌 됐건 결과는 나왔고, 스스로 엉망으로 만들진 않아서 다행이다 하는 안심이 반, 그리고 나 같은 배우를 끌고 해주신 데 대한 감사함 반으로 남는다”며 빙긋 미소를 보였다.
윤시윤은 2009년 MBC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으로 데뷔한 이후 KBS2 <제빵왕 김탁구>(2010)의 주인공으로 전격 발탁돼 단숨에 주연배우 반열에 올랐다. 이후 MBC <나도, 꽃!>(2012), tvN <이웃집 꽃미남>(2013), JTBC <마녀보감>(2016), KBS2 <최고의 한방>(2018), TV조선 <대군-사랑을 그리다>(2018), SBS <친애하는 판사님께>(2018), SBS <녹두꽃>(2019) 등 다수의 작품에서 주연으로 활약하며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데뷔 10년, 목표는 여전히 ‘연기’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연기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주연 배우로서의 책임감도 함께 말이다. “저에 대한 자평을 하자면. 분명 주인공을 하고 있고, 10년간 주인공을 했으면 뭔가 인정받는 게 있을 거예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본질은, 저라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때 긍정적 요소도 있겠지만 불안요소 또한 적지 않은, 부족함이 많은 주인공감임은 확실하다고 봐요. 그걸 자학할 것도 아니라, 그런 불안요소를 없애나가는 게 제 목표죠.”
윤시윤은 “그게 이 시장에서의 내 현실이다. 감사하게도 기회를 주시는 분들도 있지만 내가 캐스팅 물망에 올랐을 때 ‘괜찮겠어?’ 하는 분들도 분명 많을 것”이라면서 “그 불안요소를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10년 됐으니 애송이가 아니라고, 아는 척할 위치는 아니라고 본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10년간 연기해온 윤시윤의 목표는 여전히 ‘연기’다. “배우로서의 목표는 불안요소를 없애는 것. 연기적으로 쌓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건, 마치 근육을 만들 듯이 한 번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연기적 신뢰를 쌓은 사람들이 정말 부럽죠. 그들은 한 방에 얻은 게 아니니까.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데뷔 초부터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온 윤시윤의 시간은,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매년 1~2개씩 작품을 했고, 매 순간 그 나름의 의미를 남겼다. 하지만 2014년 해병대 입대 후 불가피했던 2년의 공백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유의미한 쉼표가 됐다.
“입대 전에도 쉬지 않고 일하려 했어요. 그 때는 불안요소 같은 게 있으면, 돌다리도 두드려보자는 심정으로, 신중하게 쉬면서 기다렸죠. 하지만 군대 다녀오고 나서 바뀐 건, ‘내가 이 작품을 통해 하나라도 성장하고 배울 수 있다면 어떤 불안요소가 있다 해도 도전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게 된 점이죠. 주위를 돌아보니 어느 순간 동료들이 그런 신뢰받는 배우라는 타이틀을 갖고 가더군요. 내가 왜, 갖고 있는 타이틀을 잃을까봐, 이 작품은 이래서 안 될 것 같고 저 작품은 저래서 안 될 것 같고, 그렇게 해왔을까 싶었어요. 사실 신중하게 고르고 골라도 큰 차이는 없거든요. 그 부분이 바뀌었죠. 누군가 나를 불러준다면, 하나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쉬지 않고 가는 게 맞다고. 우리는 선택 받는 직업이기 때문에, 선택 받았을 때 비로소 존재의 의미가 있고, 열심히 하는 게 내가 할 일이구나 싶었어요. 물론 구설이 있을 수도 있고 하락세도 있을 수도 있지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죠.”
<싸이코패스 다이어리> 속 동식이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다이어리를 얻은 뒤 각성된 것처럼, 윤시윤의 인생에도 각성의 경험이 있었을까. 그는 망설임 없이 “<1박2일>에서 벌거벗겨졌을 때”라고 말했다.
“저는 제 자신을 내비치는 게 두려운 사람이었어요. 저는 튀는 사람도 아니었고,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그냥 연예인이 되고 싶었고 배우가 되고 싶었죠. 그런데 어쩌다가 데뷔를 하게 됐고, 두려움이 커졌어요. 나는 남자답지도, 세련되지도 못하고 리더십도 없고 빙구 같은데, 사람들이 원래 내 모습을 알면 실망할 텐데. 그런 생각을 했죠. 그래서 초반엔 진짜 조심했어요. 예능도 안 나갔고, 나가도 말조심하고 그랬죠. <1박2일>도 사실 경험해보고 싶었지만 너무 두려웠어요. 그런데 <1박2일> 첫 촬영 일주일 전, 제작진이 그 모든 걸 말도 안 되게 한 방에 무너뜨려주셨어요.”
윤시윤은 “처음엔 너무 괴로웠고 한 달은 무서웠다. 사람들이 ‘깬다’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오히려 사람들이 나를 그리 멋있게 안 봤었고(웃음), 있는 그대로를 보여줘도 받아들이더라”라고 말했다.
“‘너 원래 안 멋졌으니까, 그냥 다 보여줘도 돼. 여기서 다 보여주고 거기서 쌓아 가면 돼’. 그런 것 같았어요. <1박2일>은 자존감 낮은 제가 조금이라도 진짜의 나를 대중에게 보일 수 있게 된 계기였고, 앞으로도 더더욱 저의 모습을 보여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저의 리얼리티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걸 두려워하지 말자는 교훈을 얻었고, 그게 연기에도 많은 도움을 줬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2016년부터 2년 반 넘게 <1박2일>과 호흡했지만 프로그램은 뜻밖의 사건(정준영 게이트)을 맞아 잠정 중단됐고, 현재 새 멤버들로 시즌4가 꾸려져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 상태다. <1박2일> 시청자들과 예고 없던 작별을 고하게 된 점은 윤시윤에게도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아쉬워요. 아쉽죠. 많이 아쉽고, 그립죠. 아직도 (김준호, 데프콘, 이용진 등 <1박2일> 당시 함께 호흡을 맞춘) 형들이 예능 출연하는 걸 보면 마냥 웃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보고 있으면 그리워서, 같이 있고 싶어서. 형들은 여전히 불꽃 예능감을 보여주고 있는데, 사람들은 다 웃고 있는데, 저만 짠한 것 같아요. 형들 옆에 있고 싶고. 저의 이 그리움을 잠식시키려면, 형들이 더 웃겨줬으면 좋겠어요.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좋겠어요.(웃음)”
<1박2일> 외에 타 예능 프로그램에는 자주 등장하지 않는 윤시윤이지만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고,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출연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책 읽는 예능이나, 역사 예능, 강연 예능 등을 좋아한다. 그런 프로그램에서 내 힘이 조금이라도 필요하다고 인정해주신다면 즐겁게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연기가 우선이고 예능은 후순위라는 건 절대 아니다”라고 강조하기도. 윤시윤은 “나는 연기를 너무 사랑하지만 연예인이다. 연예인은 대중이 불러주는 게 곧 정체성이지 내가 함부로 ‘나는 배우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 “내 작품을 안 봐주고 예능만 봐준다면 나는 예능인인 것이다. 대중이 보고 싶어 하는 모습에 맞춰 드리는 게 연예인”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로빈 윌리엄스가 목표”
무릎을 치게 할 정도의 현실감을 소유한 윤시윤이 밝힌 종국의 목표는 ‘한국의 로빈 윌리엄스가 되는 것’. 그는 “제일 하고 싶은 건, 나의 오리지널리티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고, 그건 바로 동식이 같은 어른아이다. 어른 같지만 아직도 철 들지 않은 아이의 모습, 이성보다는 감성이 통제 안 될 만큼 발달했고, 때로는 현실보다는 이상을 추구하고, 현실에 공감하면서도 이상을 자꾸 찾으려 하는 어른아이. 그런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지난 10년에 걸친 ‘배우 윤시윤’의 담금질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동식이 윤시윤에게 남긴 잔상이 남다른 만큼, <싸이코패스 다이어리>의 마지막 회에서 인우와의 마지막 매치를 앞두고 한 동식의 말처럼, 그의 “메인 이벤트는 이제 시작”이다.
[박세연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기자 사진제공 모아(MOA)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