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캅스>로 변신한 이성경(29)이 제대로 날았다. 관객에겐 화끈한 걸크러시로 새로운 매력을, 그 스스로에게도 힐링의 시간을 선물했다.
최근 개봉한 영화 <걸캅스>(감독 정다원)는 민원실 퇴출 0순위 전직 전설의 형사 미영과 민원실로 밀려난 지혜가 디지털 성범죄 사건의 피해자를 돕기 위해 비공식 수사에 나서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작품. 지난 여름 tvN 드라마 <멈추고 싶은 시간: 어바웃타임>으로 사랑스러운 매력을 보여준 이성경은 드라마 종영 후 곧바로 <걸캅스> 촬영에 합류,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이성경에게 <걸캅스>는 남다른 작품이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레슬러>에서도 큰 몫을 했지만 <걸캅스>가 사실상 이성경의 첫 상업영화 주연작이기 때문. 한 작품의 투톱으로 이름을 올리고 작품을 이끌어간다는 것은 그에게 부담이자, 도전이었다.
▶“디지털 성범죄 경각심 갖게 된 작품, 통쾌하실걸요?”
“3~4일 전부터 잠을 못 자고 있어요.”
영화 개봉 당일, 서울 팔판동 카페에서 만난 이성경은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스코어나 평점도 예상이 전혀 안 되고, 어떻게 봐주실 지 긴장이 많이 된다”고 말했다.
“지난 작품들도 굉장히 큰 무게감을 느꼈는데, 이번 작품은 극을 끌고 가는 역할이고, 몇 년 전부터 많은 분들이 준비하느라 고생하신 작품이기 때문에 개봉이 더 뭉클하고 떨려요.”
<걸캅스>는 걸크러시 콤비의 유쾌-상쾌-통쾌한 활약이 돋보이는 영화다. 액션 트레이닝을 거쳐 탄생한 라미란의 통쾌한 ‘백드롭’과 이성경의 날렵한 ‘가위차기’, 여기에 쫄깃한 긴장감을 선사하는 박진감 넘치는 ‘카체이싱’까지, 나쁜 놈들을 때려잡는 이들의 거침없는 액션에 통통 튀는 웃음 코드도 일품이다.
모델 출신에서 배우로 거듭난 지 벌써 5년. 주목할 만한 배우로 거듭나면서 다양한 작품의 러브콜을 받는 이성경이 <걸캅스>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시나리오 속 웃음 코드가 저와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유쾌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면서도, 우리가 인식해야 될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되고,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점에서 끌렸죠.”
공교롭게도 <걸캅스>는 최근 사회를 들썩이게 만든 ‘버닝썬 사태’를 떠올리게 하는 디지털 성범죄 문제를 다뤄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됐다. 이에 대해 이성경은 “시기가 우연히 맞물린 것”이라고 조심스러운 입장을 전하면서도 “영화를 찍으면서 저 스스로도 깊게 경각심을 갖고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촬영을 작년에 했는데, 이런 일들은 비단 최근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전부터 있어왔던 일이잖아요. 허상이 아닌 진짜 일어나는 일이라 안타까운 마음이 크죠. 그래서 모두가 더욱 경각심을 갖고 진심을 담아 작업했습니다. 영화를 보시는 분들께도 그런 마음이 잘 전달됐으면 해요.”
이성경은 러닝타임 내내 긴 팔다리를 자랑하며 스크린 곳곳을 뛰고 날았다. 관객 입장에서는 이성경의 호쾌한 액션이 큰 볼거리였다. 특히 날아차기로 변태를 때려잡는 장면은 압권. ‘실제로도 변태가 나타나면 잡을 것 같다’는 질문에 이성경은 “실제로는 마음과 달리 무서울 것 같다”며 손을 가로저었다.
“실제로 지하철에서 (변태를) 만나봤어요. 만나면 얼어붙게 되죠. 아무 것도 못 하겠더라고요. 그 무서움을 알아서, 영화에선 더더욱 거침없이 나는 지혜를 통해 대리만족 한 것 같아요. 현실에선 겁도 많지만 지혜를 통해 통쾌함을 대신 맛볼 수 있었죠.”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 입장에서 기억에 많이 남는 장면은 병실에 누워있는 피해자를 찾아가는 장면라고 했다.
“저도 여동생이 있는데, 극 중 캐릭터가 여동생 나이였어요. ‘이게 내 동생이었다면’ 무의식 중에 상상했는데 눈을 질끈 감게 되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이입이 됐죠. 초반에 그 장면을 찍었는데 감독님이 ‘진심이 느껴진다’고 하셨어요. 그 장면을 초반에 찍은 게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 마음으로 이 영화를 촬영했죠. 좀 더 사회적 뉴스에 관심을 갖게 됐고, 뉴스에서 보고 지나치는 많은 사건도 조금 더 공감하게 된 계기가 됐어요.”
▶“‘츤데레’ 라미란 따뜻한 위로, 큰 힘 됐죠”
<걸캅스>는 스토리가 주는 유의미성도 크지만 라미란과 이성경, 최수영 등이 전면에 나선 ‘여성 중심 형사물’이라는 점에서도 각광 받았다. 특히 데뷔 첫 단독 주연으로 나선 라미란은 영화에서 안팎으로 무게중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런 라미란은 이성경에게 존재 자체로 ‘선망’이었다.
“라미란 선배님은 늘 분위기를 좋게 해주세요. 아무래도 선배님 컨디션을 따라가게 되는데, 너무 즐겁게 해주셔서 저는 장단만 맞췄죠. 선배님이 저보다 훨씬 젊은 감성이었어요. 트렌드며 요즘 유행하는 노래, 안무도 다 알고 계셨죠. 이미 많은 것을 보여주셨는데도 아직도 보여줄 것을 많이 갖고 계신 분이었어요.”
<걸캅스>는 관객은 물론, 이성경 스스로에게도 대리만족과 통쾌함을 안겼다. 하지만 영화는 무엇보다 ‘배우’ 이성경에게 깨진 균형을 잡아준 소중한 작품이다.
“<걸캅스> 전까지, 이성과 감성의 균형이 힘든 부분이 있었어요. 저는 주로 감성적으로 일하는 편이었는데,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어느 순간부터 균형이 깨진 거였죠. 원래 내 모습대로 잘 안 되고, 그러다보니 스스로 더 작아지고 힘들었는데 그걸 잡아준 게 이 영화가 아닌가 싶어요. 라미란 선배님도 언니같이 친구같이 때로는 선생님같이 조언해주시고, 감독님도 확실하게 잡아주시니까 뭔가 결박돼 있는 것처럼 답답하던 데서 빠져나올 수 있었죠.”
특히 힘이 됐던 건 라미란의 ‘츤데레’였다. “잘 하고 싶은데 마음처럼 안 돼서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힘든 적이 있었어요. 그 때 라미란 선배님이 툭툭 치시는데, 내가 작아져 있는 걸 느끼셨나? 싶더라고요. 나에겐 한없이 대선배님이신데 후배 마음까지 신경써주신다는 것에서 많이 놀랐어요. 그렇게 신경써주시는 따뜻함이 감사하고, 위로가 됐어요.”
본인도 ‘걸크러시’에 가깝지 않느냐 묻자 이성경은 손을 거듭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사람이 다양한 면을 갖고 있을텐데, 저는 걸크러시라기보다는 아무래도 언니다 보니 ‘큰딸병’, ‘언니병’ 같은 게 있어요. 집에선 큰아들처럼, 대장처럼 하는 큰딸이고 동생에게는 큰언니 같은 존재죠. 지금은 비슷한 세대라고 느껴지지만 어렸을 땐 네 살 터울이 크게 느껴지잖아요. 동생에겐 제가 엄청 큰 존재였던 거죠. 평소에도 귀엽고 아기자기한 장난보다는 위험할 때 보호해주는, 그런 장난을 치는 스타일이었어요. 걸크러시라기엔 거리가 좀 있죠.”
주위 배우들에 대해선 입이 마르도록 극찬했지만 스스로에 대한 평가는 유독 짠 그에게, 스스로 돌아본 자신은 어떤지 묻자 그저 “최선을 다 해 진심으로 하려고 노력했을 뿐”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평소 ‘잘 하지도 못하면서 기준만 높다’는 얘기를 많이 듣긴 해요. 하지만 언제라도 돌이켜봤을 때, 내가 (궁극에) 70밖에 못했더라도 그 때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면, 그걸로 후회 없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자는 거, 평상시 제 모토이기도 해요.“
▶“모델서 배우 전향 5년, 다시 처음 자리서 시작하는 느낌”
까칠하거나 도도하거나, 때로는 무심하고 털털해보이지만 이 모든 이미지는 이성경이 아닌 ‘캐릭터’의 모습에 더 가까운 지점이다. 실제로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며 모든 순간, 모든 현장에서의 고충을 털어놓을 정도로 여린 면모를 보이기도. 그러면서도 이성경은 “스스로에게 점수를 잘 안 줘 힘들기도 하지만 걱정, 근심이 좋은 실행의 원동력이 되는 것 같기도 해서 중요한 것들 위주로 생각의 방향을 잘 잡아가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모델 활동을 하다 배우로 전향한 지 어언 5년. 지난 시간은 이성경에게 아쉬움과 동기부여를 모두 줬다.
“근 5년 동안 열심히 하면서,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간 것 같아요. <걸캅스> 개봉을 앞두고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아쉬운 것도 많이 보이죠. 물론 그 땐 무지했기 때문에 아쉬운 줄도 모르고 그저 열심히 했는데, 이젠 조금 더 보이는 게 많아진 만큼, 여운을 주는 배우, 사람이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언어라든지 여러가지를 배우며 기본기를 다지는 훈련도 하고 있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기분이에요. 새로운 챕터의 시작을 위해 재정비하고, 리셋하는 기분이랄까요?”
이성경이 언급한 ‘여운’이 특별히 대단한 건 아니다. “누군가에게 공감이나 위로가 여운으로 남을 수 있고, 생각 없이 웃고 나와 힐링되는 여운이 있을 수도 있죠. 작품마다, 캐릭터마다 보는 이들에게 줄 수 있는 여운은 다양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메시지가 아니라, 그저 제가 출연한 작품을 보고 남는 ‘온도’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요.”
배우에서 나아가 ‘인간’ 이성경으로서 놓치고 싶지 않은 한 가지는 ‘건강’이다. “하나를 꼽자면 몸과 마음의 건강이에요. 몸 건강은 당연하고, 마음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요. 내 마음에 어떤 위로가 필요한지 스스로 점검하며 좋은 방향을 잡아가려 노력하고 있어요.”
<걸캅스>를 통해 듣고 싶은 평가에 대해 묻자 소박한 답변이 돌아왔다. “작품을 보는 동안은 늘 캐릭터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는 게 제가 갖고 있는 작은 꿈이에요. 드라마는 진행되는 기간이 길다 보니 작품 속 캐릭터로 봐주시는 게 큰데, 영화도 보는 순간만큼은 지혜로 봐주신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박세연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기자 사진제공 CJ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