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수 년 넘게 사랑받는 장수그룹도 존재하지만, ‘마(魔)의 7년’이라는 표현이 관용어가 됐을 정도로 현 가요계의 아이돌 평균 수명은 냉정하게 말해 길어야 4~5년이다. 그 이상 팀을 유지하더라도 어느 시점이 지나면 팀 활동보다 개인 활동에 주력하며 결국은 ‘나’로 살아남아야 하는 이른바 ‘개인 콘텐츠’ 시대. 홀로서기 5년째인 제시카(본명 정수연, 30)는 비교적 빠르게 시작한 자기만의 길을 탄탄하게 일궈나가고 있다.
‘제시카 선글라스’로 유명한 패션 브랜드 블랑앤에클레어(BLANC & ECLARE)를 론칭한 지도 벌써 4년. 브랜드를 성장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보니 해외 각국을 다니는 건 어느덧 자연스러운 제시카의 일상이다. 그렇게 바쁜 삶의 보상은 세계 각국에서 블랑앤에클레어가 어엿한‘잇(it)’ 브랜드로서 각광받고 있다는 점이다.
“해외 스케줄이 많아 여기저기 많이 다니다 보니 비행기 안이 편하게 느껴질 정도예요. 최근에도 패션위크가 있어 뉴욕에 다녀왔는데, 많은 걸 보고 배운 시간이었어요.”
이렇다 할 강추위 없이 유독 따뜻했던 겨울이었지만, 제시카의 지난 겨울은 뜨거웠다. 브랜드 관련 업무는 물론, 올해 계획하고 있는 음악 작업을 위해 작업실에서 누구보다 가열차게 보냈다. 가수 활동보단 패션 디자이너 겸 사업가로서의 활동이 워낙 왕성하다 보니 국내 대중에겐 크게 알려지는 근황이 없지만 제시카는 건강하게 ‘워라밸’을 유지하며 2019년의 큰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저러다 말겠지’ 부정적 시선 견딘 5년
패션 분야는 제시카가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정확히 말해 ‘선망했던’ 일이다. 한 때는 삶의 전부와도 같았던 소녀시대 활동에 마침표를 찍고 당차게 제2의 커리어에 뛰어들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저는 원래 좀, 잘 받아들이는 편이긴 해요. 무슨 일이든 어떤 상황이든 잘 받아들이고 거기에 익숙해져요. 힘들어도 하고 싶었던 일이고,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에너지가 다른 것 같아요.”
좋아하는 분야의 업무가 진짜 업(業)이 됐을 때 발생하는 심리적 괴리가 생길 법도 한데, 제시카는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 반색하며 “요즘엔 바빠도 웃으면서 잠들 수 있다”고 웃었다. 2014년 선글라스 하나로 시작한 그의 브랜드 블랑앤에클레어는 지금은 휴대폰케이스, 뷰티, 패션을 넘나들며 다양한 콘텐츠를 담아내고 있는, 연매출 200억 원이 넘는 규모 있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치열한 패션업계에 후발주자로 뛰어든다는 건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었지만 도전 정신과 남다른 감각, 그리고 막강한 팀워크가 지금을 있게 한 비결이다.
“처음에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던 건 맞는 것 같아요. 경험이 없잖아요. 좋아하는 것이라는 것만 믿고 시작했는데 ‘쟤가 잘 할 수 있겠어?’ ‘저러다 말겠지, 몇 년 가겠어?’ 하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책임감이 더 생긴 것도 있어요. 솔직히 원래는 부담감이 그리 크지 않았거든요.”
실패 없는 성공은 없다 했다. 첫 걸음마에 나선 아기들이 수도 없이 넘어지듯, 제시카의 블랑앤에클레어도 마찬가지였다. 치명적인 실수로 케이스 디자인이 잘못 나와 제품을 모두 회수했던 아찔한 순간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경험이 시행착오가 됐다.
론칭 후 기뻤던 순간은 역시 브랜드로서 인정받은 순간이다. “저는 주위 사람들에게 기프팅은 안 하거든요. 그런데 누군가 입어서 이슈가 됐을 때 너무 신기하고 뿌듯하더라고요. 한번은 헤일리 볼드윈이 우리 뉴욕 매장에 와서 선글라스를 직접 사갖고 갔는데, 파파라치에게도 사진이 엄청 많이 찍혀 화제가 된 적이 있었어요. 우리도 몰랐던 일이었죠. 매장 직원이 ‘저 사람 헤일리 볼드윈 같은데?’ 라고 했는데 진짜 그녀였더라고요. 그런 데서 오는 기쁨이랄까요? 뿌듯하고, 신나는 경험이었어요. 어쨌든 그들이 (브랜드로서) 인정해주는 거니까. 너무 기뻤죠.”
▶“블랑앤에클레어는 또 하나의 나”
제시카가 어린 시절 엄마와 즐겨 찾던 미국의 백화점에 입점하게 된 날도 잊지 못할 순간이다. “미국에 제가 어려서부터 갔던 백화점이 있어요. 어릴 때부터 놀이터보다 더 좋아했던 곳이에요. 아동 신발보다 어른 신발이 좋았던 어린 시절 저의 놀이터이자, 제가 꿈을 키웠던 곳인데 거기에 우리 물건이 입점하게 됐죠. 그 때도 정말, 소리를 질렀어요. 너무 신기해서요.(웃음)”
제시카의 지금이 오랜 꿈의 실현이지만 어떤 의미에서 입지전적인 이유는, 원톱 걸그룹 소녀시대 멤버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내려놓고 진짜 자신을, 자신이 좋아하는 또 다른 무언가를 찾아 도전하고, 수없는 시행착오 끝에 현재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그는 “뭐든 시작하는 게 어렵지, 하면 하게 되는 것 같다”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도전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에요. 늘 그랬던 것 같아요. 뭘 해도 먼저 시도하고, 많이 혼나고 욕먹고 꽈당하고 다치고. 그렇게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내가 생각했을 때 틀린 것이 아니기에, 그러면서 배우는 거죠. 배우고 크고 성장하고 그런 게 있었어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브랜드는 어느 정도 자리 잡았지만 “결코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는 게 지금 제시카의 솔직한 심경이기도 하다.
“처음엔 취미가 되기도 전에, 오래오래 내가 좋아하면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시작한 거였는데, 시작할 때 이슈가 너무 많이 됐던 거죠. 걸그룹 멤버가 사업 하는 것도 사실 처음이었고, 새로 시작하던 단계를 거친 많은 일들이 사실, 다 처음이었죠. 그렇다 보니 곱지 않은 시선도 많았고, 응원보다는 ‘얼마나 잘 되나 보자’는 시선이 더 많았기 때문에 지금이 결코 더 쉽고 편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얼마나 잘 하나 보자’는 시선에 응답할 수 있는 건, 정말 잘 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그는 “오히려 더 잘 하고 싶었다. 벌써 5년이 지났고, 이렇게 잘 하고 있다는 걸 말로 하지 않아도 결과물로, 브랜드가 성장하는 것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불구, 가수가 된 것 부터 패션 사업까지 ‘하고싶은 건 다 하며 사는 사람 같다’고 하자 제시카는 쿨하게도 결코 부정하진 않았다.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자’주의자거든요. 그런 면에서는 맞아요. 어릴 때부터 인생의 목표가, 유치할 수 있지만, 늘 ‘팔로우 유어 드림즈(follow your dreams)’였어요. 꿈을 찾아가라. 그리고 저는, 저질러놓고 후회하는 스타일도 아니에요. 무언가 꿈을 꾸고 있거나 혹은 목표가 있으면, 사람은 그렇게 흘러가게 되어 있어요. 직진으로 가든 돌아가든 어쨌든 그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믿어요. 저는 항상 저 스스로에게 그렇게 얘기해왔죠. 제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어요. 뭘 하고 싶고, 뭘 하는 가장 기쁠까. 그걸 생각하고, 지금까지 하나하나 이루어 왔다고 할 수 있죠. 언젠가 더 높은 위치에 가게 된다면, 후배들을 도와주고 같이 이끌어주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걸그룹으로 활동하다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선배 가수로서, 지금은 누군가 자신과 같은 루트를 선망하는 이가 있다면 길라잡이가 되고 싶은 꿈도 꾸고 있다. 제시카는 “점점 더 신중하게 되는 건, 누군가 나의 이런 행보를 보며 배울 테니까”라며 “절대 떳떳하지 않은 일은 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고 덧붙였다.
▶제시카의 인생 챕터5는 환하게 빛나고 있다
어느 하나 “특출난 게 없어” 스트레스도 컸지만 “덕분에 많은 경험을 해볼 수 있었다”며 싱긋 웃는 제시카는 현재의 자신에 대해 “만족한다”고 했다.
“하고자 하는 일에 신중한 편이라 후회하는 편은 아니에요. 나이 얘기를 굳이 하고 싶진 않지만 이제 서른이 됐잖아요. 서른이 되니 어떤지 많이들 물어보시는데, 저는 지금이 가장 자신감 있고, 자신에게 떳떳하고, 제일 행복하고 편안한 시기인 것 같아요. 그게 얼굴에도 보인다고 하긴 하더라고요. 좀 편해진 것 같다고요. 그래서 저는, 예전의 일은 그냥 그 때 좋았던 걸로 남겨두고 싶지, 리와인드하고 싶진 않아요. 항상 앞날을 기대하는 편이죠.”
지난 2016년, 홀로서기 후 첫 번째 인터뷰 당시 제시카는 자신의 인생을 책에 비유했었다. 당시 그는 총 10개의 챕터(CHAPTER) 중 “현재 챕터4 정도 되는 것 같다”고 설명한 바. 학창시절(챕터1)과 연습생 시절(챕터2), 소녀시대 활동(챕터3)을 지나 팀을 떠난 뒤 챕터4를 유의미하게 보낸 그는 지금쯤 책의 어느 부분을 지나고 있을까. 그는 “지금은 챕터5의 끝자락인 것 같다”며 눈을 반짝였다.
“챕터4가 <플라이>(솔로 데뷔앨범명)였고, 챕터5는 그 이후의 3년 정도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걸 가지고 열심히 달렸던 거죠. 나름대로 혼자, 처음 하는 거였잖아요. 저에게도 처음이 너무 많았던 때잖아요. 그래서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다양하게 많이 해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칸 영화제에 왜 갔을까?’ ‘내가 왜 이 브랜드랑 일할 수 있게 됐지?’’이런 것들요. 진짜 상상도 못했던 것들이 현실로 이뤄지면서, 알차게 보낸 몇 년이었던 것 같아요. 그게 제 챕터5죠.”
지난해 5월 미국 유명 에이전시 UTA(United Talent Agency)와 파트너십 계약을 체결한 것도 그의 챕터5에 남다른 의미를 주는 지점이다. 그는 “챕터5에서 배운 것들을 갖고 챕터6을 한 번 넘겨볼까? 하고 있는 시점인 것 같다”며 “챕터6가 좀 재미있어지겠다”고 밝게 웃었다.
꿈을 꾸는, 열정이 가득한 사람의 눈에게선 빛이 나는 법. 데뷔 13년차인 제시카의 눈에서도 여전히 밝은 빛이 엿보였다.
“빛이 난다고 해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좀, 환해져 있는 것 같아요. 물론 빛은 계속 내고 싶지만, 지금은 포커스를 저에게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너무 일에만 집중하지 말자. 물론 꿈도 좋지만, 그래도 하나하나씩 잘 이뤄내고 있으니 스스로에게 집중해보자는, 그런 시기죠. 그래서 제 관심사도 건강이나 운동으로 바뀐 거고요. 예전에는 관심사가 뭐냐고 물어보시면 패션, 트렌드 등을 꼽았는데 이젠 그게 약간 스위치 된 것 같아요. 결국에는 나 자신에게 집중하게 된달까요. 그래서 지금은, 그 빛나고 열정적으로 했던 게 퍼져 환해진 느낌이 아닐까 싶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답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