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의 대화] (4) 100억원 대작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원작 <오목눈이의 사랑> 작가 이순원| “업둥이 자식 뻐꾸기 찾는 뱁새 엄마의 1만4천㎞ 여정”
안재형 기자
입력 : 2019.04.01 10:46:26
수정 : 2019.04.01 10:48:37
본지에 <이순원의 마음산책>을 연재 중인 이순원 작가가 <정본 소설 사임당> 이후 2년 만에 새로운 장편소설 <오목눈이의 사랑>으로 돌아왔다. 붉은머리오목눈이(뱁새) ‘육분의’가 자신이 키워 떠나보낸 뻐꾸기 새끼 ‘앵두’를 찾아 머나먼 아프리카까지 다녀오는 이야기다. 눈물겨운 모정과 모험을 작가 특유의 감성적인 문장으로 담아냈다. 뻐꾸기는 다른 둥지에 몰래 알을 낳아 그 새가 대신 새끼를 기르게 하는 습성이 있다. 그런 이유로 종종 나쁜 새라 불리기도 한다. 작가는 “대관령 아래 고향집에서 뻐꾸기 소리를 듣고 구상을 시작했다”며 “흔히 나쁘게 평하는 ‘탁란(托卵)’을 다른 시각에서 그려보려 했다”고 말했다.
소설은 게임제작사 드림 리퍼블릭이 전 세계를 겨냥한 애니메이션 제작을 추진 중이다. 제작비 규모만 약 100억원으로 알려졌다.
인터뷰는 작가의 일산 집에서 진행했다. 집필실은 아늑했다. 벽 한 면을 꽉 채운 무거운 책장엔 마땅히 꽂혀있어야 할 책이 가지런했고, 책상 위 노트북 앞엔 다음 작품에 대한 자료를 적은 메모가 빽빽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으려는데 대뜸 나이를 물어 답하니, 17살에 담배를 배워 30년간 흡연하다 디스크 수술을 하며 끊은 나이가 바로 그 나이라며 나름의 연결고리를 찾아냈다.
정말 하고 싶으면 그냥 하는 거예요
▶강원도 대관령이 고향이신데, 공기 좋은 곳에서 이른 나이에 담배를 시작하셨네요.
▷제 작품 중에 <19세>라는 소설이 제 청소년기 얘긴데, 17살 때 학교를 안다니고 대관령에서 농사를 지었어요. 어린 농군이니까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했었죠.(웃음) 그 작품이 나중에 중학교 국정교과서에 실렸는데, 그 때가 큰 아들이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어요. 우리 애 국어선생님이 이순원이 아빠란 걸 알고는 너의 아빠 혹시 돌아가셨니? 아니면 할아버지시니? 하고 물었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지금도 그렇지만 교과서에 실린 작가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거나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잖아요. 아들하고 가끔 웃으며 얘기합니다.
오목눈이의 사랑
이순원 지음 | 해냄
2019년 3월 5일 출간
작가는 상고를 1, 2등으로 졸업하면 한국은행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에 1972년 강릉상고에 입학했다. 하지만 왼손잡이라 또래 아이들만큼 주판을 잘 놓을 수가 없어 은행원대신 고랭지 농사로 돈을 벌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학교를 그만두고 대관령으로 올라가 농군이 됐다. 그게 17살 시절이었다. 농사일은 생각보다 고됐다. 결국 2년 뒤에 학교로 돌아왔다. 은행원이 되겠다는 꿈은 대학을 졸업(그는 경영학을 전공했다.)하고 등단한 후 신용보증기금에 입사하며 대신하게 됐다. 그는 그곳에서 <신용사회>라는 잡지 기자로 일했다.
▶<오목눈이의 사랑>이 출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책을 낼 때나 안낼 때나 집에 있어요. 일 있으면 외출하긴 하는데, 가끔 젊었을 때 다녔던 직장 동료들을 만나기도 해요. 신용보증기금에 다닐 때 같이 일하던 동료들을 지금도 만나요. 뭐, 거의 퇴직하긴 했지만 승진을 거듭하던 친구들은 아직 현업에 있지요. 한종관 서울신용보증재단 이사장이 친구예요. 옛 전우죠.
▶지금까지 만나는 걸 보면 서로 공유할 추억이 많았나 봅니다.
▷사이가 좋아요. 그곳에서 <신용사회>라는 경영전문지를 만들었는데, 지금도 나오고 있어요. 그걸 10년 동안 만들었어요. 그때 같이 만들던 후배 기자들과 지금도 술을 마시는 거죠. 선후배 사이가 좋은 건 두 가지 이유 중 하나인데, 정말 일을 잘 가르쳐줬거나 녹록했던 거예요. 저는 거의 일을 안했거든요.(웃음) 편집장이었는데 1년간 편집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어요.
전업 작가가 되고 싶어 사직서를 냈지만 회사에선 당신처럼 일하는 사람을 키워놓고 나가라며 반려했다고 한다. 일하지 않는 편집장이 된 건 어쩌면 후배들에게 편집장 훈련을 시키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었다.
▶보직도 그런 보직이 없는데요.
▷출근해서 편집차장에게 일 맡기고 먼저 나간다, 하는 거죠. 편집차장이 1년간 편집장 역할을 하더니 아주 훌쩍 늘더군요. 1994년에 그만뒀는데, 그때 같이 근무하던 기자들이 지금도 그대로 있어요. 좋은 회사죠.
▶그런 좋은 회사를 왜 그만둔 겁니까.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만둬도 먹고 살고 글만 써도 먹고 살고, 그랬었죠. 그저 이번 생에는 글 쓰는 데 한 평생 바치자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막 마흔이 될 때였어요. 이미 작가였고 일간지 칼럼들을 많이 쓰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아마 이후에 인터넷 세상이 올 거란 걸 알았다면 그만두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휴대폰 때문에 책이 덜 읽히는 시대가 올 거란 걸 알았다면.(웃음)
▶반대가 심했을 것 같은데요. 가족들도 그렇고.
반대야 엄청 했지. 집사람은 회사를 그만 둔 걸 몰랐어요. 3월에 그만 뒀는데, 1월에 내 책을 내고 좀 쉬어야겠다고 했더니 휴가인 줄 알았나 봐요. 일주일 쉬고도 안 나가니까 회사 안가냐고 하더군요. 쉰다고 했더니 아주 난리가 났죠. 다들 그런 건 얘기해야하는 거 아니냐고 하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얘기하면 그렇게 하시오, 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나는 그만두고 글만 쓰고 싶은데, 집사람이 말려서 애들이 어째서 하는 핑곗거리만 만들어지는 거예요. 정말 그만 둘 마음이면 얘기하면 안 되죠. 제가 살아오면서 단독결정을 내린 게 두 가지인데, 그 때 회사를 그만둔 게 하나, 좀 더 조용한 곳에 글 쓰고 싶어서 일산으로 온 게 하나예요. 그땐 이렇게 번잡스럽지 않은 곳이었어요. 담배를 태울 때였는데, 담배 한 갑 사려고 능곡까지 나갔다 와야 했어요. 지금은 어~휴.
▶요즘은 귀향이 하나의 트렌드가 됐는데요.
▷저는 강원도 대관령 아래 정말 깡촌(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위촌리) 출신이에요. 대학 입학할 때 까지도 전기가 안 들어온 마을이었어요. 지금도 430년 된 대동계가 있어요. 향약이죠. 고향은 그리워할 뿐이에요. 우리나라 작가들 중에서 고향과 가장 밀접한 이가 저인데, 돌아가신 문학평론가 김윤식 선생이 ‘강릉하면 이순원이고 이순원하면 강릉 아니겠는가’라고 평론에서 밝히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곳은 내가 나와서 그리워하는 곳이지 다시 살러 가는 곳이 아니에요. 가면 문학이 닫혀요. 고향에 가면 우선 무장해제가 될 부분이 많잖아요.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지고 글의 담금질이 약해지고. 그래서인지 고향이 아닌 다른 시골에서 글 쓰는 작가들은 많은데, 막상 고향에서 쓰는 이는 거의 없어요.
▶등단한 지 30년이 넘었습니다. 처음과 지금은 많은 부분이 달라졌을 텐데요.
▷1985년에 등단했어요. 우선 글 쓰는 환경이 많이 바뀌었어요. 처음엔 펜으로 썼어요. 응모작을 원고지에 써서 보냈어요. 그러다 힘들어서 타자를 쳤죠. 타자 중에서도 전동타자가 나와서 써봤는데 부드럽고 수정이 되는 거예요. 엄청 새로웠어요. 그러다 워드프로세서를 썼어요. 컴퓨터 전 단계죠. 그러고 286, 노트북으로 넘어왔어요. 작업방식도 많이 변하고 작품을 발표하는 방식도 많이 달라졌어요. 요즘엔 인터넷으로 발표하는 시대잖아요.
▶전성기가 따로 없을 만큼 활동이 활발합니다. 등단할 때는 어떠셨습니까.
▷등단할 때까지 10년이 걸렸어요. 그때는 신춘문예가 인기가 높아서 10년간 내내 응모했지요. 작가가 된 다음에는 꽃길을 걸어온 것 같아요. 쓰는 작업은 누구나 고통스럽지만 결과에 대한 성과나 독자들의 반응이 양지쪽만 걸어 온 느낌이에요. 그런데 신인작가 때보다 지금이 전체적인 문학의 여건은 안 좋은 것 같아요. 제가 작가가 됐을 때도 문학이 힘들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 말을 하거든요. 그때는 전업 작가가 거의 없었어요. 어디선가 다른 일을 갖고 있었죠. 지금은 대부분의 젊은 작가들이 전업 작가예요. 작가가 되기 위한 수련을 거치면 다른 직업 훈련이란 게 거의 안 돼요. 젊은 나이에 학교 다닐 때부터 문학 수련을 하게 되면 학점관리가 안 되는 거예요. 학점관리 잘하고 등단한 작가는 거의 없어요. 그런데 예전보다 책이 덜 나가니 안타깝지요. 안쓰럽고.
▶젊은 작가들 입장에선 꽤 힘든 상황인데, 선배 작가 입장은 어떠십니까.
▷간혹 후배 작가들이 선생님은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요. 글 쓰는 것부터 생활까지 여러 가지가 함축된 질문이죠. 나 또한 힘들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건데, 전 힘들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은비령>을 써서 그 은비령이 실제 강원도의 지명이 되기도 했고,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은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어요.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왔잖아요. 이런 작가가 힘들다고 하면 일적으로도 그렇고 저를 보고 저 정도만 돼도 좋겠다고 생각하는 후배 작가들에게도 죄스러운 일이죠. 새로운 책이 나올 때 후배들에게 보내면서 이름과 주소를 적다보면 잘 됐으면 좋겠다는 기도의 마음이 저절로 생깁니다. 그건 제 마음이 따뜻해서가 아니라 여건이 안타까워서 그런 거예요. 우울한 얘기죠.
작가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후배 작가들의 안쓰러움을 여러 번 반복해 말했다. 책을 읽지 않는,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가 된 현 상황도 안타깝다며 때론 신통하고 때론 밉기도 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분위기를 바꿔야겠다 싶어 저작권료를 물었는데, 얘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교과서에 작품이 실리면 저작권료도 많이 받으시겠습니다.
▷받긴 받지요. 교육부에서 받는 건 아주 미미해요. 수많은 참고서와 시험지에서 나오는 저작권료가 좀 더 많아요. 아이러니하지만 사교육 때문에 겪게 되는 슬픈 현실이죠.
전 세계를 겨냥한 애니메이션, 책은 먼저 번역되지 않을까 싶어요
▶최근 발표한 <오목눈이의 사랑>은 애니메이션 제작까지 이어지며 규모가 굉장히 커졌습니다.
▷애니메이션은 사실 원작이 공개되고 난 후 진행되는 거예요. 제가 작품을 쓰고 있다는 걸 제작사에서 어떻게 알겠어요. 다만 전 이 작품뿐만 아니라 오래 전부터 새로운 작품을 쓰면 출판사에 넘기기 전에, 허심탄회하게 물어요. 그러니까 제가 두 개의 교실을 운영하고 있는데, 하나는 고양시 아람누리 아카데미에서 매주 금요일 10시부터 2시간 동안 소설을 공부하러 오신 분들과 함께하고 있어요. 공짜는 아닌데 전 지역사회 봉사라고 생각하고 참여하고 있어요. 벌써 10년이 넘었어요. 서울에서도 오고 충청도에서도 와요. 허투루 할 수가 없어요. 또 하나는 낮에 시간이 없는 사람들, 직장인이나 아주 먼 곳에 사는 분들을 위해 인터넷 교실을 열었어요. 이 두 교실에 제가 쓴 작품을 올리고 돌아오는 말을 듣지요. 오랫동안 같이 공부하다보니 서로 신뢰가 쌓여서인지 어느 부분은 과하고 이런 경우엔 이런 상황이 들어가면 좋지 않을까라고 기탄없이 말해줍니다. 예를 들어 ‘붉은머리오목눈이 새가 뻐꾸기를 만나기 위해 1만4000㎞를 날아가는데 죽을 뻔한 고비도 있지 않을까요?’ ‘먼 여정에 동행하는 새가 있으면 좋지 않겠어요?’ 이런 의견을 받아서 반영했어요. 많은 분들이 작품을 모니터링해주고 에디터 역할을 해주는 것이죠. 그 분들 중에 SBS 드라마국 PD가 있어요. 그 분이 이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면 좋겠다고 먼저 뛰어다녔어요. 세계 시장을 겨냥하자는 기획을 세워서 제작사와 연결하고 그렇게 미국, 캐나다 제작사들과 공동제작을 하게 됐어요.
▶그럼 원작이 번역돼 해외에 진출하게 되는 건가요.
▷우선 애니메이션 극본은 영어로 제작을 맡겼고, 음악도 외국 작곡가를 섭외한 걸로 알고 있어요. 애니메이션이 완성되기 전에 책은 먼저 번역되지 않을까 싶어요.
▶요즘은 러닝개런티가 유행이던데요. 계약은 혹시.
▷액수를 말하긴 뭣하지만 국내 애니메이션 업계에선 놀랄 만한 액수라고 들었어요. 어휴 사실은 걱정이 많이 앞서지요. 집사람은 책이 나오는 데 애쓴 분들이 많은데, 잘 안 팔리면 어쩌냐고 저보다 더 걱정이 많아요.(웃음)
집필실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근처 코다리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순원 작가는 이른바 ‘이순원 폭탄주’가 회자될 만큼 문학계에서 술이 세기로 이름 난 주당 중 한 명이다. 취미로 담금주를 만든다며 들고 온 약주는 달디 달았다. 오는 길에 손에 들려준 블루베리주는 은은한 향부터 남달랐다. 아까워 못 마실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