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기억하는 유이(30·본명 김유진)는 어떤 모습일까. 2010년 초반을 풍미한 걸그룹 애프터스쿨의 ‘센터’이자 ‘꿀벅지’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시절일까, 혹은 가수 활동과 연기를 병행하는 ‘연기돌’로 주목받던 시기일까. 아니면 뜨거웠던 스포트라이트를 뒤로 하고 ‘배우’로 전업, 자리매김에 나선 바로 지금일까. 여러 갈래의 반응이 나오겠으나 중요한 건, 화려했던 영광을 아름답게 간직한 채 유이가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 ‘현재(present)’를 아주 소중하게 가꿔 가고 있다는 점이겠다.
최근 호평 속 종영한 MBC 주말드라마 <데릴남편 오작두>는 유이에게 무수한 필모그래피 중 하나의 작품 그 이상, 흡사 선물(present)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데릴남편 오작두>(이하 ‘오작두’)는 극한의 현실을 사는 30대 중반 직장여성이 오로지 ’유부녀’라는 소셜 포지션을 쟁취하려 데릴남편을 구하면서 시작되는 역주행 로맨스 드라마다. 우연히 만난 산골 청년 오작두(김강우 분)에게 작정하고 달려들어 쌓아간 알콩달콩 러브라인은 인스턴트 사랑이 만연한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진짜’ 사랑으로 많은 시청자의 마음을 정화시켰다.
드라마 종영 후 매일경제 스타투데이와 만난 유이는 “많은 분들이 ‘오작두’를 통해 힐링을 얻었다 하시는데, 나 역시 ‘오작두’로 힐링됐다”며 고해성사에 가까운 솔직한 감정을 토해 냈다. 인터뷰 초반부터 그는 ‘데릴남편 오작두’에 대해 “스스로를 미워하던 시기에 만난 드라마”라고 했다.
“‘맨홀’(드라마)이 끝나고, 휴식이 필요하긴 했어요. 올해 서른한 살이 됐는데, 사실 많은 나이도 적은 나이도 아니지만 뭐랄까요. 20대에 쉬지 않고 일하며 열심히 달려왔는데 개인적으로 김유진의 삶에는 이뤄놓은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개인적으로는 점점 무너지고 있는 시기였죠. 일도 포기하고 아무 것도 안 해야 하나 할 때쯤 ‘오작두’가 들어왔어요.”
주어진 일에 매진하며 앞만 보고 달리다 문득 레이스를 멈추고 뒤를 돌아봤을 때 느끼는 허무함에 무너져 내렸다는 그는 <데릴남편 오작두> 속 한승주가 내뱉은 첫 문장부터 “확 와닿았다”고 털어놨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나는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내가 뭘 잘못했는데?’라는 문장이었어요. 승주와 제가 나이도, 상황도 다르긴 하지만 승주에게서 제 모습이 너무 겹쳐 보여 대본 읽는 게 힘들 정도였어요.”
마치 운명처럼 만난 한승주라는 옷(캐릭터)을 입은 유이는 <데릴남편 오작두>를 통해 실제 산에 오르고, 작두를 만나는 과정을 통해 꽉 막혀 있던 마음 속 응어리를 서서히 풀어냈다. 극중 승주에게 공황장애가 오는 장면에선 승주의 마음에 공감이 가 실제로도 울었다고. “원래 그렇게 본인의 감정을 대입해서 작품을 찾으면 안 되는 걸 뻔히 알지만, 그랬기 때문에 시청자들에게 조금은 더 승주의 감정이 전달되지 않았을까 싶었다”고 뒤늦은 고백을 한 유이의 눈가는 어느새 촉촉해져 있었다.
밝고 씩씩한 모습 뒤 감춰진 유이의 민낯은 누구보다 여린, 순백이었다. 대체 무엇이 그를 그리도 힘들게 했던 걸까. 유이는 붉어진 눈시울에 연신 손부채질을 하며 말을 이었다.
“사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데뷔 후 쉬지 않고 열심히 달려왔으니 이것도 잘될 것 같고, 저것도 잘될 것 같았는데, 8~9년 있던 회사를 떠나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하는 시기에 저도 모르게 자만에 빠진 거죠. 그 자만이 저를 확 무너뜨린 것 같아요. 누구의 탓도 아니고 저 때문이었죠. 스스로 중심을 잡아줄 기둥 없이, 제가 스스로를 깎아 내린 거였어요. 누군가에게는 손을 내밀었어야 했는데, 심지어 가족한테도 손 내밀지 않고 자책했던 것 같아요. 굉장히 밝게 지내오다, 작년에 그런 시기를 보낸 거죠.”
그런 유이에게 손을 내밀어준 대상이 바로 <데릴남편 오작두>였던 것. 유이에게 이 작품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에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졌다.
“작품을 선택하고 본격적인 촬영이 들어가고 나서는 정말 할 말 다했어요. 극 중 승주처럼 말도 거침없이 하고, 액션 팀이 있는데도 제가 직접 맞으면서 액션신도 소화했고요. 한 번은 제가 ‘아 씨’ 이런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음향감독님이 저를 말리기도 하셨죠.(웃음) 그런 시간을 거치다 보니 저도 굉장히 밝아졌어요. 개인적으로 밝아진 것을 넘어서 ‘내가 나를 사랑해야지, 겉으로만 밝아지면 안 되겠다’는 걸 배웠어요. 승주의 자신감이 저에게도 전해져서 하고 싶은 이야기도 다 하고, 예쁨도 많이 받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갑작스럽게 찾아왔던 작품이라 준비를 많이 하지 못하고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던 작품이었는데 오히려 제가 희망을 얻었죠.”
드라마는 ‘계약결혼’이라는 소재를 통해 여성에게 결혼을 강요하는 이 시대 사회상을 꼬집었다는 평을 받았다. 사회적으로 승승장구하지만 결혼 앞에 작아지는 승주를 연기한 유이 역시 이 사회가 설정한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상태인 만큼, 느낀 바가 적지 않았다.
“사실 ‘결혼을 꼭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극 중 승주는 남자 없이도 잘 살고, 사회적으로 결혼을 요구하는 시선에도 당당한 인물이죠. 하지만 혼자 사는 여성을 타깃으로 한 범죄의 희생양이 될 뻔한 사건을 겪게 되고, 그 상황에서도 ‘그러니까 결혼했어야 한다’고 말하는 주위의 성화에 발끈해 ‘남자를 사겠다’고 나서는 인물이에요. 그렇게 찾은 남자가 산골짜기에 있는 사람이고, 그 남자의 순수함과 자신을 향한 직진 사랑에 힐링을 얻는 건데, 진짜 작두 같은 사람이 있으면 결혼하고 싶죠.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웃음)”
특히 유이는 “주위 사람들이 ‘왜 그 나이에 결혼 안 해? 뭐 하자 있어? 하고 묻는 장면이 있었는데, 정말 화나더라”면서 “결혼을 강요하지 않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고 말했다. 꾸준한 작품 활동으로 이제는 가수보다는 연기자로 더 익숙한 얼굴이 된 유이. 드라마 <미남이시네요>(2009)에서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고 얄미운 캐릭터로 주인공을 괴롭혔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런 그가 연기의 ‘맛’을 본 지도 벌써 9년째다.
<미남이시네요> 이후 <오작교 형제들> <전우치> <황금무지개> <호구의 사랑> <상류사회> <결혼계약>. <불야성> <맨홀-이상한나라의 필> 등 다수의 작품에서 주연으로 활약한 유이. ‘연기돌’이라는 꼬리표가 무색하게 어느덧 작품을 책임지는 위치에 오른 지도 오래. 그럼에도 유이는 자신의 연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냉정하게 자평했다.
“지금도 ‘안녕하세요 연기자 유이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소개하고 싶은데, 아직도 입이 안 떨어져요. 사실 이건 핑계지만, 연기를 제대로 배우지 않고 뛰어들었는데 제가 하는 감정 표현을 좋아해주신 분들이 감사하게도 계속 캐스팅해 주셔서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거였거든요. 예쁘게 우는 법을 몰라 그냥 엉엉 울곤 했는데 그렇다 보니 들어오는 대본들은 대부분 털털하고 씩씩한 장녀 혹은 흙수저, 넘어지고 부딪치는 인물들이었어요.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어떻게 보면 제가 할 수 있는 연기가 아직은 그런 부분에 머물러 있는 것도 사실이죠.”
감정 연기는 어느 정도 자신 있지만 발음이나 발성 등 대사가 전달되는 부분에 있어서 스스로 부족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기에, 작품마다 개선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두렵다”는 유이. 그는 “음향 감독님이나 스태프들에게 내 대사가 발음이 잘 들리는지 묻고 체크하곤 하는데 그 부분에 집중하다 보면 감정이 잘 안 잡히기도 해 여러모로 죄송한 마음”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고무적인 건 ‘데릴남편 오작두’를 통해 이 같은 부분에 대한 지적은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것. 대신 감정 연기의 폭이 한층 넓어졌다는 칭찬이 늘어났다. 특히 그동안 유이가 좀처럼 즐기지 못했던 남녀 주인공간 커플 케미가 ‘역대급’ 지지를 받은 기분 좋은 성과도 남겼다.
“지난해 ’맨홀’을 통해 처음으로 로맨틱코미디에 도전했는데 반응이 그리 좋지 않았어요. 그간 사랑 받았던 작품을 생각하다 보니 ‘나는 감정 연기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인가’, ’남자 배우와의 케미보다는 여(女)-여(女) 케미나 씩씩한 캐릭터, 걸크러시 캐릭터를 할 수밖에 없는 건가 고민도 있었죠. 그런데 이번에는 승주가 걸크러시하면서도 작두랑 잘 어울린다는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남녀 케미에 있어서 희망을 얻었어요.(웃음)”
눈 깜짝할 새 급성장하기보다는 계단을 오르듯 한걸음씩 성장해가고 있는 ‘연기자’ 유이지만 가수로서 꽤 오랜 기간 대중 앞에 서왔던 만큼 때로는 무대가 그리울 법도 한데, 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사래를 쳤다.
“무대는 하하하하… 괜찮아요. 왜냐하면 (팀 내 포지션이 확실했던) 애프터스쿨이라 가능한 일이었거든요(웃음). 사실 혼자 노래방도 가고 하는데, 살도 빠지고 평소에 춤을 많이 안 추다 보니 웨이브가 안 돼요. 가끔 생각나서 옛날 영상 찾아보면서 스태프들에게 ‘이거 나야’ 하고 보여줘도 ‘네’ 대답만 하지, 관심이 없더라고요. 영상을 보면 이 춤을 내가 췄나 싶을 정도로 잘 추는데, 너무 슬프게도 지금은 안무가 기억이 잘 안 나요.”
하지만 어느새 애프터스쿨로 활동하던 당시를 떠올리는 듯, 아련해진 그의 눈과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과거 활동도, <데릴남편 오작두>도 어느새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겨두게 된 현 시점, 유이는 어떤 목표를 갖고 있을까. 서른 살, 치열했던 질풍노도를 극복한 유이의 목표는 ‘행복’이다.
“옛날에는 10년 후, 20년 후의 목표가 있었어요. 휴대전화에 ‘올해 상 받기’ 등 그 해의 목표를 적어놓곤 했었죠. 굉장히 큰 목표였죠. 지금은 목표가 작아졌어요. 나를 좀 사랑하기,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 주지 말기 등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고 목표라고 얘기하긴 좀 그렇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잘 다져가고, 일이 목적이 아닌 행복이 목적인 삶을 살고 싶어요. 사실 이렇게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거든요. 하루하루 행복하게 사는 게 저, 인간 김유진의 목표고 연기적으로는 더 나아지는 유이가 되고 싶어요. 제가 출연한 작품을 보고 행복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