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념 前 경제부총리 | “준조세금지 쌍벌죄 시행해 정경유착 끊고 경제시스템 바로 세워 도약 발판 마련해야”
윤재오 기자
입력 : 2017.01.10 14:06:52
수정 : 2017.01.10 14:07:20
“2017년은 나라 안팎으로 악재가 많습니다. 국민들에게 엄청난 시련의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팀을 중심으로 환경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 돌파해 나간다면 오히려 도약을 위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것입니다”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온 나라가 혼란스러웠던 2016년이 저물고 있는 가운데 서울 서초구 남경빌딩에서 대표적 경제원로인 진념 전 경제부총리(77)를 만났다.
진 부총리는 “지금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느 때보다 어려운 상황”이라며 “이런 때일수록 경제팀은 특정 정권이 아니라 국민과 나라를 위해 소신과 결기를 갖고 일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으로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는 등 세계 경제환경이 불투명해 경제팀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진념 전 부총리는 외환위기 발생 직후 기획예산처 장관과 재정경제부 장관 겸 경제부총리를 맡아 우리나라가 IMF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국경제가 내우외환으로 IMF 위기 때만큼 어렵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2017년은 우리 경제에 엄청난 시련의 해가 될 것입니다. 이런 때 일수록 휘둘리지 말고 상황 인식을 올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환경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 정면 돌파해야 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위기를 극복해서 새로운 전기를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외환위기 당시하고 지금은 양상이 많이 다릅니다. 외환위기 때는 우리가 변화해야 할 시기에 혁신하지 못 했기 때문에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세계 경제 여건은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세계 경제 환경이 불확실하고 국내의 정치적인 불안정성도 높습니다. 외환위기 때는 국민과 정부가 합심해서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국민들은 금 모으기로 힘을 보탰고 노사정 대타협도 이끌어 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대통령 탄핵으로 갈등의 골이 깊게 패여 있는 상황입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서 함께 힘을 합치느냐가 관건입니다.
▶유일호 경제팀 책임지고 경제 불확실성 걷어내야
▷외환위기 때 경제부총리를 지내셨는데 당시 경제팀과 지금을 비교해 주시죠.
당시 경제팀은 아주 잘 짜여졌습니다. DJ정부였지만 이회창 캠프에서 일했던 사람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모였습니다. 경제관료들은 선후배 관계여서 서로 통하는 게 있어 팀워크도 좋았습니다. 대통령과도 끊임없이 토론했고 아니면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소통과 토론을 통해 가야할 방향을 정하고 일사불란하게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국가적으로 경제위기 상황이었지만 경제 컨트롤타워가 작동했고 경제팀이 제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은 정치적으로 어려운 데다 경제컨트롤 타워가 있느냐, 리더십은 있느냐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를 갖지 못 하는 게 큰 문제입니다. 이걸 극복하는 게 유일호 경제팀의 과제입니다. 지금 경제팀은 사실상 한시적인 관리팀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급속하게 사람 바꾸고 한다고 경제상황이 달라질 게 아닙니다. 경제가 가장 싫어하는 게 불확실성입니다. 이걸 걷어내고 해왔던 정책을 계속하면서 조율하는 것이 유일호 경제팀의 역할입니다. 당분간 관리내각 체제인데 선거와 맞물려 경제가 정치에 예속화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유일호 부총리는 유임됐으니 몇 개월이든 ‘경제문제 내가 책임진다’는 결연한 각오로 일해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경제팀은 특정 정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5000만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소신과 결기를 갖고 일해주기를 바랍니다.
▶경제와 민생엔 여야 따로 없어
▷외환위기 당시의 경험 중 현 경제팀에 도움이 될 만한 말씀을 해주시죠.
재정경제부 장관 시절에도 여소야대였습니다. 한나라당이 다수당이어서 동의가 없으면 정책을 펼 수가 없었습니다. 이회창 총재를 찾아가서 세계경제와 우리경제 상황을 설명드리고 “경제 민생 문제는 여야가 따로 없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래서 여야 정책위의장단이 천안 모 연수원에서 1박2일 합숙을 하면서 토론했습니다. 밤 11시반쯤 소주폭탄주를 먹으면서 오프더레코드를 지켜주면 현대그룹 구조조정과 공적자금 문제를 모두 상세하게 얘기하겠다고 했더니 처음에는 오프더레코드를 안 받겠다고 하다가 나중엔 얘기를 들어보자고 해서 죽 설명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합의서 7개항을 작성해 발표했습니다. 상시 구조조정법을 만들고 공적자금관련법, 부동산대책 등을 만들어 발표했는데 언론에서 반응이 좋았습니다. 국회가 맨날 싸우는 줄 알았는데 민생문제는 같이 머리를 맞댈 줄 아는구나 하는 반응이었죠. 현 경제팀도 야당에 호소하고 돌파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합니다.
▷트럼프 시대 개막으로 세계경제 환경이 급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대처할까요.
트럼프가 선거과정에서 많은 것을 공약했지만 그런 방향으로 다 가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관심 갖고 봐야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입니다. 경제뿐 아니라 외교·정치 모두 아우르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기존과 달라진 행보입니다. 푸틴과 친분이 있는 사람을 국무장관에 지명하는가 하면 하나의 중국에 도전장을 낸 것은 향후 글로벌 역학관계에 큰 변수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국의 일자리 보호정책입니다. 자유무역협정을 폐기하거나 대폭 수정하겠다라거나, TPP를 안하겠다고 하는 것 모두 이런 맥락입니다. 이런 움직임을 파악해 슬기롭게 대처해야 합니다.
트럼프의 미국이 보호주의로 가는 건 필연적으로 보입니다. 반덤핑이나 특허전쟁으로 자국 이익을 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미 FTA도 한국과 미국 양측이 모두 이득을 보는 측면이 있습니다. 두 나라의 무역수지뿐만 아니라 일자리 등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냉철하게 파악하고 대처해야 합니다. 트럼프 내각도 중요하지만 트럼프 정책에 여러 가지로 영향을 줄 수 있는 통로도 뚫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헤리티지 재단 같은 곳과 우리 민간 기관들의 접촉을 활성화해서 우리입장이 전달되도록 해야 합니다. 방위비 분담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예민한 문제일수록 국익을 먼저 생각하고 말을 아껴야 합니다. 이런 때일수록 시스템이 붕괴되거나 규율이 없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서별관회의 같은 정책조율기능 꼭 필요
▷정치권에서 서별관회의 폐지를 주장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서별관회의는 국가경제에 중요한 현안을 비공식적으로 협의하고 조율하는 자리입니다. 야당에도 자주 하는 얘기이지만 IMF 위기 때 서별관회의를 많이 활용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게 협력입니다. 만나서 얘기하고 이걸 어떻게 할지 논쟁도 세게 붙습니다. 거기서 합의가 이뤄지면 그걸 정책으로 집행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꼭 필요한 회의입니다. 비공개회의라는 점을 문제 삼는데 국내외 증권시장에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이라서 비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별관회의에서 잘못된 결정이 있었다면 그걸 비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서별관회의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안 됩니다. IMF 때 공적자금을 얼마나 어떻게 조성하고, 현대건설과 대우그룹은 어떻게 정리할지 그런 것들이 서별관회의에서 논의됐습니다. 국가경제를 위해 꼭 필요한 회의입니다. 다만 집행을 투명하게 해야 합니다. 정치권에서 서별관회의 자체가 잘못됐다고 하니 그런 모임을 안 갖는 것 자체가 오히려 문제입니다.
최근 조선산업·해운산업 구조조정에서 나온 문제점도 서별관회의와 같은 정책조정 없이 진행되다 보니 제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관련부처 장관들과 관계자들이 모두 모여서 난상토론을 해야 오차가 생기지 않습니다. 조선 해운과 같은 국가 기간산업을 채권은행단 중심으로 문제를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산업정책적 측면에서 같이 아울러서 보고 정책 조율을 해야 합니다.
▷기아차 회장으로 기업경영을 하신 경험도 들려주시죠.
그때 기아자동차하고 지금 우리 기업들 상황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그때 기아의 문제는 재무관리가 잘못된 데다 노조가 워낙 강성이어서 생긴 문제입니다.
기업의 덩치가 커지면 거기에 상응해서 자금관리와 재무관리가 이뤄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재벌처럼 문어발식 확장을 한 게 문제였습니다. 당시 수도권에서는 기아차 노조가 제일 강했습니다. 노동부장관일 때 기아차 회장을 만나 도대체 일은 언제하냐고 물어보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단체 협약이 종업원회사다 국민기업이다 해서 복잡했습니다. 근로자 징계위원회가 노사동수로 구성되어 있어 해고가 어려웠습니다. 예를 들어 2주 동안 아무 연락 없이 사무실에 안 나와야 해고대상이 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조 간부들에게 “그렇게 하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피해를 본다. 기업이 다시 살아나라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설득하며 단체협상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비상경영위원회를 만들어 노조위원장이 참여해 토론하고 협의하도록 했습니다.
▶정경유착 차단할 제도적 장치 만들어야
▷대기업 회장들이 국회 청문회에 불려나가 곤욕을 치렀습니다.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해결책이 있을까요.
정치자금 문제는 2000년대 들어와서 많이 깨끗해졌습니다. 과거엔 선거 때만 되면 회장들이 해외에 나갈 정도였습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기업경영이 투명해졌습니다. 글로벌 스탠다드에 따라 감사위원회와 사외이사제 도입됐고 투명한 회계제도도 도입됐습니다. 그런데 제도만 도입됐지 작동이 제대로 안 되는 게 문제입니다. 사외이사에 대기업 회장이 아는 사람을 넣거나 정부가 밀어 넣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양은 투명하고 공정한 경영룰인데 실제로는 그게 안 되어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부금을 낸다면 미국처럼 90% 이상 자기 돈으로 내야 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페이스북 창업주들이 모두 자기 돈으로 기부금을 냈지 회사 돈을 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회사 돈으로 기부금을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업경영과 회계를 투명하게 하고 기업을 정치권력의 족쇄로부터 풀어줘야 합니다. 예를 들어 준조세 징수 금지 특별법을 만들어 엄중한 쌍벌제를 시행하면 정경유착이 사라질 것입니다. 지금은 세무조사, 검찰조사를 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권력의 요구를 거부하겠습니까. 이번 상황을 반성하면서 바로 그런 제도적 장치를 확실하게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시스템을 바꾸고 문화를 바꿔야 합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대기업 회장들이 피고처럼 청문회장에 줄줄이 나가는 것은 나라가 창피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전경련 해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경련은 과거의 역할에서 탈바꿈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사실 몇 년 전부터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헤리티지 재단처럼 연구조사와 정책건의를 하는 기관으로 변신해야 합니다. 기업경영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곳은 경총과 상공회의소도 있습니다.
▷‘직업이 장관’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장관직을 오래 하셨습니다. 공직자로서 원칙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
요즘 후배 공직자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참 힘든 상황입니다. 제가 사무관, 과장할 때는 장차관이 뭐라고 해도 아니면 아니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사무관 시절에는 과장한테 혼도 나고 칭찬도 듣고, 소주와 막걸리를 먹으면서 선배한테 부대끼면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공직자로서 소명을 갖고 일하기보다는 찍히지 않으려고 걱정해야 하는 형편입니다. 누가 지켜주는 사람이 없으니 공직자다운 결기를 찾아보기 어려워 안타깝습니다. 정국이 혼란스러울수록 공직자들이 중심을 잡고 바로 서야 합니다.
▷한국경제가 활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어떤 정책이 필요한가요.
우선 경제운용 시스템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정경유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중장기적으로 산업 구조조정이 필요합니다. 기존 주력산업을 구조조정하면서 IT나 AI를 연결시켜 강한 제조업을 만들어야 합니다. 새로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응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육·의료·복지·문화·관광 등 서비스 산업이 활력을 찾도록 구조적인 기틀을 만들어야 합니다.
2017년은 경제·사회 각 분야에서 지난해 노출됐던 적폐를 하나씩 풀어가며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한 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나라가 새로운 틀 속에 한 단계 도약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치권입니다. 금년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는 등 정치시즌이 본격화되는데 표를 쫓는 정치꾼이 아니라 미래를 생각하는 정치가를 찾기 어렵습니다. 눈앞의 표가 아니라 다음세대를 위한 정책을 펼 수 있는 정치가를 찾아야 합니다. 다행히 우리 청년들은 역동적이고 훌륭합니다. 문화·예술·스포츠 등에서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저력을 잘 관리하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합니다. 올해를 잘못 보내면 우리나라는 더 어려운 처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난해 나타난 문제를 바로 잡고 새로운 도약의 기틀을 마련한다면 한국경제가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진념 전 경제부총리 △1940년 전북 부안 출생 △전주고·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1963년 경제기획원 사무관 △1983년 경제기획원 기획차관보 △1988년 해운항만청장 △1990년 재무부 차관 △1991년 동력자원부 장관 △1994년 미국 스탠퍼드대 초빙교수 △1995년 노동부장관 △1997년 기아그룹 회장 △1999년 기획예산처 장관 △ 2000년 재정경제부 장관 △2001년 8월~2002년 4월 재정경제부 장관 겸 경제부총리
[윤재오 기자 사진 류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