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1~13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대혁신의 길(Aiming for Great Instauration)’을 주제로 사흘간 일정으로 열린 제17회 세계지식포럼 개막식을 빛낸 연사는 단연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였다. 정세균 국회의장,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 한국을 대표하는 정치인들 바로 앞에서 ‘진짜 리더의 자세’를 역설했기 때문이다.
그는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개혁을 추진하더라도 그 혜택을 거두기 위해선 2~3년의 ‘타임 갭(Time gap·시간차)’을 버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표를 좇는 정치인들은 이런 타임 갭을 싫어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또 “리더십은 반대하는 사람들을 온 힘을 다해 설득하고 타협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줄 아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혁 반대파 목소리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는 타임 갭 동안 상당수 정치인은 인기를 잃고 낙마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가짜 리더’는 타임 갭 동안 추락할 게 두려워 국익 대신 선거 승리를 위해 개혁을 포기하고 만다.
▶리더는 결단을 내린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소통해야
슈뢰더 전 총리는 지도자가 정치적 결단을 내린 이후에는 끊임없이 소통해야 함도 강조했다. 그는 “결단을 내린 시점과 실제 (그 결단을 통해) 결실을 맺기까지 리더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이 그런 결단을 내린 이유를 늘 설명하고 소통하는 것”이라며 “다만 정치인은 직접 국민에게 설명하지 못하고 언론을 통해 소통하기 때문에 쉽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이는 슈뢰더 전 총리 스스로의 경험담이다(타임 갭도 슈뢰더가 만든 용어다). 실제 그는 자신이 이끈 여당 사회민주당(SPD) 내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2년부터 ‘하르츠 개혁’과 ‘어젠다 2010’으로 전방위적으로 개혁을 단행했다. 통일 이후 불어닥친 극심한 실업 문제를 타파하기 위한 하르츠 개혁은 2002년 2월 구성된 하르츠 위원회가 제시한 4단계 노동시장 개혁방안을 말한다. 당시 ‘유럽의 병자’로 불릴 만큼 심각한 실업률을 줄이기 위해 임시직 고용을 증진하기 위한 규제완화, 저임금 일자리(미니잡) 창출 등을 추진했다. 어젠다 2010은 슈뢰더 정부가 2003년 제시한 중장기 국가개혁안으로 하르츠 개혁 연장선상에서의 노동 시장 정책을 비롯해 산업·조세·환경·이민·교육 등 광범위한 분야의 개혁 정책을 담고 있다.
하르츠·어젠다 2010 개혁의 핵심은 실업 급여 축소와 노동시장 유연화였다. 열아홉 살 때부터 노조가 지지기반인 중도 좌파 사민당에서 활동해 ‘스타 정치인’의 길을 걸은 슈뢰더 전 총리는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노조뿐만 아니라 사민당 내에서도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진정한 리더’의 길을 택했다. 그는 ‘시간을 되돌려도 같은 결정을 할 것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언제 어느 순간이라도 똑같은 결정을 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유럽의 병자’로 불렸던 독일은 두 개혁에 힘입어 유럽연합(EU)의 리더 국가로 우뚝 서는 계기를 마련했다. 하지만 개혁을 추진할 당시 사민당은 점점 인기를 잃었고 2005년 앙겔라 메르켈 현 총리가 이끄는 우파 기독민주당에 권좌를 내줘야 했다.
슈뢰더 전 총리는 자신의 사례를 들어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에 빠진 국내 정치인들에게 교훈을 던진 셈이다.
그의 하르츠·어젠다 2010 개혁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 평가도 있다. 대표적인 비판이 두 개혁으로 인해 독일 내 양극화가 심화됐다는 주장이다. 슈뢰더 전 총리는 “어젠다 2010 개혁은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이 첨예화되고 있는 과정에서 두드러진 ‘독일을 더 경쟁력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과제에 대한 일종의 대답이었다”며 “글로벌라이제이션이 전 세계를 변화시켰고, 그 결과가 바로 양극화”라고 말했다. 양극화 주범은 글로벌라이제이션이지, 하르츠·어젠다 2010 개혁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슈뢰더 전 총리는 글로벌라이제이션에 따른 양극화로 인해 전 세계 각국에서 보호무역주의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현 상황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클린턴이나 트럼프 모두 보호주의 기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세계 경제에 위험 요인”이라며 “개방된 시장을 발전시키기 위한 국가의 정치인들, 특히 독일과 한국이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협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슈뢰더 전 총리는 전 세계적으로 극단주의 정당이 점점 지지세력을 넓히는 이유에 대해서도 “글로벌라이제이션의 결과로 일자리를 위협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정치인들은 연구개발(R&D) 같은 부가가치가 높은 일자리가 자국에 머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학교에서도 ‘타협을 할 수 있는 사회만이 장기적으로 안정될 수 있다’고 끊임없이 가르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럽이 뭉친다면 결국 진보할 것”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이후 유럽의 미래에 대한 그의 진단은 무척 낙관적이었다. 슈뢰더 전 총리는 “유럽이 뭉친다면 결국은 진보할 것”이라고 단정했다. 다만 “유로존(유로화 사용 지역) 안에서는 적극적인 통합이 필요하다”는 전제를 뒀다. 유럽중앙은행(ECB)이 화폐 정책을 통해 유로화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장기적으로는 유로존 안에서 사회복지와 금융정책도 통합돼야 한다는 것이다. 과도한 복지 정책과 무분별한 채권 발행으로 위기에 빠졌던 그리스의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반면 브렉시트 결정으로 한때 EU를 혼란에 빠뜨린 영국에 대해서는 ‘오프 사이드’ 반칙을 저지른 국가로 지칭할 정도로 단호했다. 그는 영국이 브렉시트 결정을 되돌리는 일은 없을 것이고 EU 국가들이 그렇게 두지도 않을 것이란 의견을 피력했다. 결국 영국이 내년 3월에 탈퇴신청서를 낸 후 2~3년간의 탈퇴 협상 끝에 영국이 EU를 떠날 것이란 예상이다. 그는 “파운드화 가치 하락으로 단기적으로 수출이 늘어날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EU 시장 진출이 제한받으면서 영국 경제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로존 국가들은 영국 경제와 파운드화 몰락 과정을 지켜보면서 더욱 협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한편 브렉시트가 한국에 미칠 영향에 대해 슈뢰더 전 총리는 “브렉시트로 인한 한-EU 관계 변화는 미미할 것”이라며 “다만 한국과 영국 양자관계에서는 영향이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 기업이 유럽 시장 공략을 위해서는 지사나 현지법인을 영국 대신 다른 나라, 예를 들자면 독일 등으로 옮겨가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러 차례 방한했던 슈뢰더 전 총리는 한국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혁신적인 중소기업이 더 강해지는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며 “대기업에 종속되고 하청만 받는 중소기업이 아니라 연구개발(R&D)을 독자적으로 하는 혁신 중소기업이 많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과거사는 세대 공동의 책임…일본도 사죄해야”
세계 2차대전 막바지인 1944년에 태어난 그는 총리 재임시절 폴란드에 찾아가 과거사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를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슈뢰더 총리는 “죄를 직접 짓지 않았더라도 우리와 우리 자식 세대는 모두 (선조가 저지른) 역사에 대한 공동의 책임의식이 있다”며 “일본도 그런 책임의식이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슈뢰더 전 총리는 중동 지역에서 분쟁이 점점 극단화되고, IS 같은 테러가 일상화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려했다. 하지만 수백 년의 전쟁을 계속했던 유럽이 EU를 만들면서 70여 년의 사상 유래 없는 긴 평화기를 갖게 된 교훈에서 보듯 다자간 협력을 지속하면 해결할 수 있다는 비교적 긍정적 입장을 표했다. 그는 전임 헬무트 콜 총리가 동독과 오랜 대화를 통해 결국 1990년 독일 통일을 이뤄냈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신뢰는 국제정치에서 ‘화폐’와 같다”며 “다시 신뢰를 키우기 위해서는 대화와 협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중동 문제 해법과 관련해 “시리아의 안정화가 중요하다”며 “군사적 개입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고 각국의 적절한 외교 전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러시아,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 모든 주체들이 협상 테이블에 나와 시리아 문제 해결을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는 것이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처음 만나는 사람도 격식 없이 유쾌하게 대화하는 능력을 가졌다. 세계지식포럼 기간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전 비대위 대표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연설에 대한 칭찬이 이어지자 “딕 체니는 내 연설에 감명을 안 받은 것 같다”고 말해 좌중의 폭소가 터졌다. 딕 체니가 미국 부통령 시절에 조지 부시 전 대통령과 함께 이라크 전쟁을 결정할 당시 슈뢰더는 서방 국가 지도자 가운데 가장 극심하게 전쟁에 반대한 바 있다. 그때 이후로 서먹서먹한 관계를 유지한 사실을 유머로 승화시킨 것이다. 이처럼 탁월한 언변은 만 19세 때인 1963년 중도 좌파 성향인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한 이후 계속 정치인의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자연스레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유쾌해 보이는 그이지만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이던 1944년 4월 독일에서 태어난 후 6개월 뒤 군인이던 아버지가 루마니아 전쟁터에서 사망한 슬픈 가족사가 있다.
직업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 1971년 괴팅겐대 법학과를 졸업했고 1976년 변호사가 되었다. 1978년부터 1980년까지는 역대 총리를 배출한 전국청년사민당 의장직을 지내며 ‘스타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동·서독이 통일한 1990년 이후에는 8년간 독일 니더작센주 주총리를 지냈다. 통독을 이끈 헬무트 콜에 이어 1998년부터 2005년까지 독일 총리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