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연기’ 펼친 손예진 | “헤어지자는 얘기를 진짜 헤어지자는 말로 고지 곧대로 받아들이는 남자는 별로”
진현철 기자
입력 : 2016.09.02 17:34:03
“모니터에 비친 낯선 얼굴, 오히려 좋았어요.”
손예진은 “나조차 촬영 현장에서 모니터를 보면서 내 얼굴이 낯설었다”며 “낯설면 낯설수록 성공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좋아했다. <비밀은 없다>를 촬영하며 든 생각이다.
<덕혜옹주>에서는 노인으로도 나온다. 그는 “일제에 의해 짓밟힌 덕혜옹주는 결국 고국을 그리워하다 절망 속에서 미쳐가는 비련의 여인”이라며 “극한의 노인 분장까지 감행해 주변에서 ‘괜찮겠느냐?’고 했지만, 어떤 얼굴로 나오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역할에만 충실하고 싶었다”고 했다. 물론 고민은 했다.
“관객들이 제게 기대하는 모습이 있을 텐데 피폐하고 과격해 보일 수 있는 지점이 있으니 낯설어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혹시 실망하지 않을까?’ 하는 지점도 있었죠. 하지만 연기자로서 성취감이 분명히 있었어요. 특히 <덕혜옹주>에서는 그녀의 일생 중 후반부로 갈수록 감정선이 더 깊어져요. 노인 분장을 할 땐 어떻게든 그녀의 기구한 삶, 힘들었던 세월을 표현하는 게 관건이었기 때문에 안 예쁘게 나온다는 것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었죠. 카메라 앞에서 제 얼굴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 역할이 얼마나 잘 표현되나, 연기에 얼마나 몰입이 잘 되느냐가 중요하죠. 오히려 더 늙고, 못생기게 나올수록 고통의 세월이 잘 표현된 것 같아 좋았어요.”
<덕혜옹주>는 호평을 받고 관객도 많이 찾았으나, <비밀은 없다>는 누적관객 25만명에 그쳤다. 이에 앞서 개봉한 한중합작영화 <나쁜놈은 반드시 죽는다>는 채 5만명도 관람하지 않았다. ‘참패’다. 개봉관 숫자도 적었지만 중국 관객을 노린 프로젝트였기에 한국에서 통하는 코드는 아니었다. 한국에서 개봉은 예정되지 않았는데 영화 관계자들의 욕심이 화를 자초했다. 이유가 어찌 됐든 손예진이 출연한 영화는 대부분 손익분기점을 넘었는데 오점이라면 오점이다. ‘타율왕’ 손예진은 실망하지 않았을까?
손예진은 “빨리 또 다른 도전을 하고 싶은 걸요?”라고 웃으며 아무렇지 않아 했다. “<나쁜놈은 반드시 죽는다>를 통해 한국과 중국 관객이 바라보는 웃음 포인트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내가 중국에 인사해도 되는 것일까’ 하는 고민을 더 많이 했지 그 이후에는 괜찮았어요. 저는 시야가 넓어진 것 같아 좋아요. 연기를 할 때 두려움은 <작업의 정석> 이후로 없어졌어요.
▶이미지 변신과 새로운 도전
“따라리라리라~” 한 이온음료 CF를 통해 순수한 이미지의 전설이 된 손예진. 오랫동안 청순한 이미지의 대명사였다. <연애소설>과 <클래식> 등에서는 첫사랑 이미지로도 오래 인식됐다. 나이를 먹었어도 그다지 변한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꾸준히 변신을 시도하고 있었다. 손예진은 영화 <작업의 정석>(2005)으로 대단한 변신을 했다. 코믹으로 방향을 확 틀었다. 청순한 이미지는 이미 깨졌어야 했는데 관객의 환상은 오래 지속됐다. 여전히 청순 대명사라는 말에 그는 “한참 전 일”이라며 미소 지었다.
손예진은 “<작업의 정석> 때 이미지 변화가 더 강렬했다고 생각해요. 그때부터 하나씩 깨뜨려줬죠”라고 미소 지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이야기를 담은 영화 <덕혜옹주>는 그가 10억원을 투자한 사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알려지지 않았을 뿐 다른 배우도 비슷한 상황에 부닥친다면 이런 결단을 내렸을 걸요?”
그는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 작품의 제작비가 결코 적은 비용은 아니었지만 좀 더 완성도를 높이고, 스태프들이 집중해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위해서는 분명 필요한 결정이었어요. 소속사와 제작사, 관계자들과의 협의를 통해 적정 수준의 가격이 책정됐고 당연히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직접 투자가 화제가 되긴 했으나 뭐니 뭐니 해도 손예진을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와 허진호 감독의 중심 잡힌 연출이 영화의 몰입도를 높여 작품이 관객에게 다가가는 데 성공하게 했다. 안타까운 과거 역사에 폭 빠져 2시간을 헤어나올 수 없게 했다. “손예진의 인생 연기”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손예진도 “내 작품을 보고 운 건 처음”이라며 여전히 아픈 마음을 드러냈다. “그냥 마음이 아팠고, 자연스럽게 눈물이 났어요” 무책임한 것 같지만 솔직하고 가장 적확한 표현이 아닐까? “<덕혜옹주>는 감정신이 워낙 많아서 정말 힘들었어요. 첫 촬영부터 매우 중요한 신이어서 어렵게 찍었죠. 역사적 인물은 처음 연기하는 것이니 고민이 많았죠.”
과거보다 조금은 여유로워지고 다양한 연기를 할 수 있는 듯하다. 최근 다양한 장르와 이색적인 이야기에 도전하고 있다. <덕혜옹주>는 그가 온전히 끌어가야 하는 작품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요즘 손예진은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운 건 여자들이 이끌고 가는 영화를 하고 싶은데 아직 그런 작품을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델마와 루이스> 같은 작품, 손예진이 몇 년 동안 참여하길 꿈꾸는 소재다. 손예진은 “언젠간 꼭 그런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요?”라며 기대하는 눈치다.
▶‘델마와 루이스’ 같은 작품 하고싶어요
나이 먹지 않고 여전히 예쁜 모습으로 남아 있길 바라는 이가 많을 것 같다고 하자 손예진은 세월에 순응한 듯 답했다. 그는 “이 일은 하면 할수록 재미있는 것 같다”며 “결혼해도 아마 이 일을 계속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팬들이 제 나이 먹은 모습을 상상하지 못할 것 같다고요? 왜요? 제 팬들도 저와 같이 나이를 먹을 텐데요. 10년 후를 생각해 본 적 있느냐고요? 아뇨, 전 현재만 충실해요.”
흥행과 관련한 스트레스가 없을 순 없지만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노력한다. 인형 수집과 먹는 것, 여행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편이다. 어렸을 때부터 모은 인형이 방 안을 차지하고 있다. 친구가 집에 놀러 와도 인형들과 노는 경우가 더 많았단다. 먹는 즐거움을 외면할 수도 없다. 강도 높은 운동의 고통이 따르지만 먹는 즐거움은 또 다른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알아주는 여행 마니아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동성이나 이성 친구들과의 여행이 어떤 면에서는 더 재미있을 테니. 이상형을 묻자 손예진은 “나이가 드니 성격이 제일 중요하더라”며 “여자의 마음을 잘 이해해주면 좋겠다. 나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남편도 질문할 수 있는 상대였으면 한다. 헤어지자고 했는데 진짜 헤어지자는 것으로 바로 받아들이는 남자는 별로”라고 웃었다.
올해 선보인 손예진의 마지막 작품 <덕혜옹주>는 광복절 연휴 특수도 누렸다. 광복절에 손익분기점(약 350만 명)을 넘어 400만 명 가까운 관객이 관람했다. ‘천만 배우’ 타이틀을 노려볼 만도 한데 욕심은 없다. “천만 관객은 하늘이 점지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욕심을 내지 않아요. 욕심낸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요.”
손예진은 다음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드라마 대본은 항상 보고 있다”는 손예진은 “3년 전만 해도 항상 밤샘 촬영이 기본이었는데 사전 제작이 활성화돼 이제 배우들이 두려움을 갖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며 “알콩달콩한 작품을 보고 있기는 한데 아직 확정하지는 않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