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와 마크 저커버그의 공통점은 역사에 기록될 세계 IT업계의 거물이면서 한가지 옷 스타일을 고집하는 패션 테러리스트(?)라는 점이다. 잘 알려졌듯이, 스티브 잡스는 검정 터틀넥에 청바지 차림을 고수했었고, 마크 저커버그는 회색 티셔츠와 후드달린 스웨터를 늘상 입고 다닌다. 그들에게 옷은 패션이 아닌 유니폼이다.
임선옥 패션디자이너는 밀레니엄이 시작된 지난 2000년 ‘한국을 빛낼 차세대 리더 100인’에 선정될 정도로 촉망받으며, 한국 아방가르드(전위주의) 패션의 계보를 이어온 실력파 아티스트다. 20년 넘게 패션계 대표주자로 활동해온 그가 “이제 패션은 진부해졌습니다. 언제까지 계절마다 새로운 옷을 만들고 버리길 반복해야 할까요. 언제까지 19세기 유물인 재봉틀로 옷을 만들어야 하죠? 더 이상 옷은 패션이 아닌 유니폼입니다”라고 발언한다. 베테랑 디자이너가 앞서 언급한 IT거물들의 패션 아닌 패션을 지지하는 듯한 말의 배경이 궁금하다.
임 디자이너는 “다른 분야는 신기술을 받아들여 발전해 나가는데 왜 패션만 여전히 19세기 방식을 고수하는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깊은 고민 끝에 끝없이 생산하고 버리는 관행을 멈추기로 결심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한가지 원단으로 재고와 낭비 없는 옷 만들어
‘파츠파츠(PartspARTs)’는 임선옥 디자이너가 자신의 이름을 딴 ‘임선옥’을 버리고 진부하지 않고 낭비 없는 옷, 즉 유니폼 같은 옷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아 지난 2011년 선보인 여성복이다. 한가지 소재만을 사용해 만드는 게 차별점이다. 사계절 내내 구김과 낡음 없이 멋지게 입을 수 있는 소재를 찾다가 ‘네오프렌’이란 소재를 개발했다. 잠수복을 만드는 데 쓰이던 폴리우레탄을 이용해 만든 원단이다. 그는 “한가지 소재만을 사용하면 자투리로 남는 웨이스트(쓰레기)가 없고 재고도 줄어듭니다. ‘웨이스트 제로’를 하면 자연스럽게 의류 쓰레기로 인한 환경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지요”라고 설명한다.
‘파츠파츠’는 옷이 만들어지는 불필요한 과정들도 없앴다. 디자인을 장식성이 배제된 단순한 형태로 규격화시켜 앞판, 뒤판, 소매, 칼라를 조립하면 된다. 마치 자동차 부품을 조립해 완성차를 만드는 식이다. 옷은 꼭 재봉틀로 만들어야 한다는 고정관념도 깼다. 힘이 많이 가는 부분으로 봉제를 최소화하고 대부분은 160도에서 녹는 테이프에 열을 가해 원단끼리 붙이는 열 접착방식을 사용했다. 바느질 선이 없고 오버로크, 시접 처리가 없어 옷을 착용했을 때 실루엣이 깔끔할 수밖에 없다. 색상 역시 최소화했다. 블랙과 화이트에 레드를 더한 게 전부다. 소재와 디자인, 색상을 최소화하니 ‘파츠파츠’에 강렬하고 확고한 아이덴티티가 생겼다. ‘파츠파츠’ 옷이 기능적이고 미니멀하게 변했지만 패션의 가장 큰 특징인 트렌드(유행)가 빠진 것에 대해 소비자가 과연 동조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임 디자이너는 “저도 ‘파츠파츠’의 시도가 소비자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습니다. 하지만 디자이너를 비롯해 패션계 종사자들만 몰랐던 거지, 이미 소비자들은 너무 빠르게 바뀌고 변하는 패션에 지쳐 있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라고 한다. 실제 ‘파츠파츠’는 임선옥 디자이너의 혁신적인 패션 철학에 동조하는 마니아 층을 확산하며 인지도를 높여나가고 있다.
▶디자인계 오스카상을 수상하다
임선옥 디자이너는 그의 패션 철학을 담은 ‘패션디자인 바이 파츠파츠 임선옥’전을 지난달 소다미술관에서 개최했다. 파츠파츠의 생산공정을 6개 부문으로 나눠 선보였다. 공장 이미지의 6개 구조물 안에 기본 개념부터 원단, 패턴, 봉제 등을 차례로 소개한 것. 패션을 결과물이 아닌 공정으로 바라본 새로운 개념의 디자인 전시였다. 이 전시는 세계 디자인계의 오스카라 불리는 ‘2016 레드닷 어워드’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부문 본상을 수상했다. ‘네오프렌’이라는 단 하나의 소재를 사용하여 소재의 낭비와 생산과정을 최소화하는 ‘Zero Waste’ 디자인 철학이 세계 디자인계의 공감과 찬사를 얻은 것이다.
임 디자이너는 “패션은 화려한 겉모습이 아닌 산업의 한 부분으로 그 치열한 연구과정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라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2016 레드닷 어워드’ 수상한 임선옥 전시
▶지독한 노력파…다양한 협업 활동할 것
임선옥은 원래 그래픽 디자이너로 시작했다. 일본 출장길에 우연히 동경의 유명 패션학교인 문화복장학원을 방문하게 되면서 패션디자인에 열망이 생겨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 문화복장학원은 이세이 미야케와 다케다 겐조 등 세계적 디자이너를 배출한 곳이다. 옷 디자인 10장을 그려 오라고 하면 100장을 그려가는 지독한 노력 끝에 수석으로 졸업하게 된 그는 졸업생 1등 1명에게만 주어지는 이세이 미야케 패션회사에 들어갈 기회를 얻었다. 1990년대 당시 이세이 미야케는 일본을 넘어 전 세계가 인정하는 최고의 패션브랜드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국의 패션을 세계에 알리는 디자이너가 되자’는 원대한 꿈을 품고 고국행을 택했다. ‘임선옥’ 여성복을 론칭한 그는 타고난 재능에 지독한 노력까지 더해져 패션계에 떠오르는 무서운 신예로 각광받았다. 서울 패션메카 압구정에 단독 매장을 냈고 여기저기 인터뷰 불려다니기에 바빴다. 날로 유명해졌지만 정작 옷은 팔리지 않았다. 독창적이고 예술적인 그의 의상은 평론가와 기자들에겐 인기를 끌었지만, 고객이 사서 입기에는 난해하고 불편한 옷이었다. 그는 “쫄딱 망했지요. 그때 ‘리얼 클로스(Real Cloth·입을 수 있는 옷)’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제가 낭비 없는 옷, 재고 없는 옷을 만드는 것도 그때의 경험이 바탕이 된 거죠”라고 말한다.
임 디자이너는 ‘파츠파츠’가 지향하는 패션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분야에서 협동을 통한 활동을 이어갈 계획이다. 아이템도 옷에 국한시키기 않고 라이프 스타일 영역으로 한계를 두지 않을 방침이다. 그는 “앞으로 패션은 테크놀로지와 결합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평상복은 점차 유니폼화 되고 시간과 장소, 상황에 맞는 기능적인 옷들로 더욱 세분화될 것입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