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메이크업아티스트라는 말이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됐을까. 이경민 ‘이경민포레’ 대표(53)가 등장하면서부터가 아닐까 싶다. 그 이전까지는 분장사라는 말이 더 흔하게 사용됐다. 지난해 메이크업아티스트 외길 30년을 맞았던 그는 ‘다시 30년(Forward Thirty)’을 외치며 새로운 변신에 나섰다.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이경민 포레’는 여느 메이크업숍과는 외관부터가 사뭇 다르다. 흔한 화장품 도구나 헤어관련 장비를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눈길을 끄는 독특한 아트상품과 장식품들 그리고 선글라스와 각종 트렌디한 패션아이템이 진열돼 있다. 그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꽃을 파는 미니 플라워숍, 향긋한 수제 커피향이 코끝을 자극하는 미니 카페 그리고 보기만 해도 신선한 에너지가 전해지는 젊은 아티스트들의 작품들이 진열된 미니 갤러리까지 갖추고 있다. 이른바 국내에서 처음 선보이는 형태의 ‘뷰티 라이프 스타일 갤러리’다.
이경민 대표는 “파리에 가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려보는 명소가 된 라이프 스타일 편집매장 ‘꼴레트’처럼 고객들이 헤어와 메이크업 서비스를 받으면서 꽃과 선물을 고르고 커피를 마시며 미술작품까지 구경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 것”이라고 설명한다. 갤러리는 그가 특히 심혈을 기울인 공간이다. 재능은 있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는 재능 있는 신인 작가들을 발굴해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작품 판매까지 연계해 도움을 줄 수 있어서다. 작년 30주년을 기념해 이경민 대표가 메이크업 작업을 하고 작가 3명이 함께 콜라보레이션 작품을 선보여 세간에 큰 관심을 끌었다.
▶미대 알바생에서 메이크업 전문가로
“1985년 미대 3학년 때 우연히 아는 분 소개로 CF광고 모델의 메이크업을 해주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습니다. 용돈이나 벌 생각으로 갔는데 제가 꽤나 잘했나 봅니다. 나중에는 저한테만 화장을 받겠다는 모델들이 계속 늘면서 학교 수업을 못 들을 정도로 바빠져 겨우 졸업을 할 정도였습니다.”
이경민 대표가 ‘메이크업 잘하는 여대생’이라는 입소문이 돌면서 영화사와 CF촬영 스튜디오 등이 모여 있는 충무로에서 러브콜이 잇따랐다. 당시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나 헤어드레서, 스타일리스트 등 각각의 전문가 없이 한사람이 주먹구구식으로 할 때였다. 나중에는 제일기획 엘지애드 대홍기획 등 대형 광고기획사들이 그를 찾았고 유명 연예인, 모델들과 함께 CF촬영에서 메이크업 작업을 도맡아 하게 됐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소질이 있고 대학 전공까지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온 그가 얼굴을 화폭삼아 작업한 메이크업은 누가 보기에도 남달랐다. 석고 데생을 많이 해온 터라 얼굴의 대칭이나 명암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짝짝이 눈이나 지나치게 큰 광대뼈, 튀어나오거나 작은 입술 등 모델들 저마다 갖고 있는 단점들을 정확히 찾아낼 수 있었고 입체적인 화장으로 보완해준 것. 그는 “저한테 메이크업을 받은 모델들이 좋아하고, 사람들이 잘한다고 칭찬하고, 게다가 돈까지 벌게 되니 자연스럽게 이 길을 가게 됐고 천직이 된 거죠”라고 말한다.
▶신애라 결혼식 화장으로 유명세 치뤄
이경민 대표는 화장품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가 자랄 때는 일하는 여성들이 드물었지만 병원사업을 하시던 어머니와 옆에서 일을 돕던 막내이모, 그리고 9살 차이 나는 언니까지 아침이면 늘 화장을 하느라 바쁜 세 여자들 틈에서 잠을 깨곤 했다. 그들이 나가면 바로 화장대에 앉아 이것저것 찍고 바르고 거울 속으로 빠져들었다. 화장품을 워낙 좋아해 물감 살 돈으로 화장품을 사고 친구들한테 화장을 해주는 대신 물감을 얻어 쓰기도 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돌아볼 정도로 눈에 띄는 화장을 하고 다녔던 그가 메이크업아티스트의 길을 가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경민 대표는 대학졸업과 함께 결혼을 했고 동시에 ‘엘(ELLE)’이라는 개인 메이크업스튜디오를 오픈했다. 의상 일을 하던 친구와 동업해서 오픈한 3평짜리 작은 공간이었다. 협소한 공간에서 시작했지만 일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었고 연예인들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찾아왔다. 그는 “그때는 정말 화장실 갈 시간조차 부족했어요. 아침 드라마부터 저녁 늦은 영화촬영까지 연예인들 스케줄에 맞춰서 일을 해주다보니 제 개인시간이란 건 없었죠. 그래도 좋은 드라마와 영화. CF를 만든다는 사명감과 성취감에 정신없이 바쁘지만 즐겁게 일했던 시절입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1994년 본인 이름이 들어간 ‘이경민 메이크업스튜디오’를 오픈하고 얼마 안돼서 탤런트 신애라가 찾아왔다.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그가 ‘사랑을 그대 품안에’라는 드라마에 같이 출연했던 남자 주인공 차인표와의 결혼 소식을 알려왔다. 그때 당시 신애라와 차인표의 인기는 최절정이었다. 신부 신애라의 결혼식 화장을 맡은 이 대표는 소위 미스코리아 화장이라 불리던 강하고 과한 메이크업 대신 얼굴 본연의 특징과 개성을 살린 자연스러운 화장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의 이름을 대중들에게 확실하게 알리는 계기가 됐다.
▶국내 1호 디자이너 메이크업 브랜드 론칭
이경민 대표가 좋아하는 문구가 있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로마의 장군 율리시스 카이사르가 승리를 기뻐하며 원로원에 보내는 승전보에 쓴 말이다. 라틴어 말로 옮기면 ‘Veni, vidi, vici(베니, 비디, 비치)’가 된다. 이대표는 지난 2005년 국내 최초의 디자이너 메이크업 브랜드를 론칭하면서 브랜드명으로 평소 그가 좋아하던 문구인 ‘베니, 비디, 비치’를 줄인 ‘비디 비치’를 사용했다. 현재 ‘비디 비치’는 신세계인터내셔널에서 인수했지만 그에게는 본인의 메이크업 철학과 정신이 담긴 자식 같은 브랜드이다.
그는 “수년간 메이크업 일을 해오면서 항상 컬러에 대한 갈증이 있었어요. 뷰티 선진 국가들이 80가지, 100가지 색상을 사용한다면 저희는 30가지밖에는 없는 거죠. 컬러를 보는 눈과 감각이 너무 부족했던 겁니다. 그래서 직접 만든 화장품이 ‘비디 비치’예요. 프랑스와 독일 일본 미국 등 전 세계 각지를 돌며 마스카라나 펜슬, 파운데이션 등 최고품질의 제품을 만드는 공장 10곳을 찾아 현지 생산을 맡겼습니다”라고 한다. 이경민 메이크업아티스트가 만든 ‘비디 비치’ 화장품은 론칭 첫해 현대백화점 압구정점과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등 최고급 백화점에 입점하면서 공전의 히트를 쳤다. 단기간에 백화점 매장을 24개까지 내면서 외형은 커졌지만 수익을 내는 데 고전을 면치 못했다. 고민 끝에 큰 회사에서 제대로 된 마케팅을 해야겠다고 판단해서 신세계인터내셔널에 브랜드를 넘기고 3년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았다. 그는 “외국에는 바비 브라운처럼 아티스트가 만드는 메이크업 전문 브랜드가 있듯이, ‘비디 비치’를 통해 전문가가 만든 화장품을 국내 소개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적으로 이 분야가 발전하고 관련 브랜드들이 나오길 바랍니다”고 전했다.
▶올 메이크업 유행은 보헤미안 스타일
최고의 메이크업 전문가에게 올해 유행에 대해 물었다. 그는 “계속해서 과거에 대한 재해석이 트렌드가 되고 있습니다. 올해는 1970년대 히피와 짚시를 연상시키는 보헤미안룩이 유행하고 있죠. 메이크업도 이러한 트렌드에 맞춰 보헤미안 스타일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색상에 입술이나 눈 한군데에 포인트를 주는 식이죠. 예를 들어 눈가를 라이너 대신 마스카라로 강조하는 겁니다”고 조언한다. ‘이경민’만의 메이크업 철학이 있느냐의 질문에 대해 “요즘 성형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메이크업 손놀림 하나만 가지고도 사람의 얼굴을 천 가지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게 화장의 힘이죠. 그런 매력적인 도구를 이용해 사람들 저마다 갖고 있는 내면과 외면을 아름다움을 끄집어내자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고 말한다. 최근의 K-뷰티 열풍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예전부터 한국이 세계 뷰티 시장의 테스트마켓이 될 것을 직감하고 있었어요. 저희만큼 디테일에 강하고 크리에이티브한 민족이 없거든요. 기회가 온 만큼 전 세계적으로 한국의 뷰티 문화가 확산되길 바랍니다. 그러려면 화장품 전문가나 기업들이 가진 노화우를 서로 모방하기 보다는 공유해서 새로운 것을 계속 탄생시켜야 미래의 발전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