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이 일제강점기의 서울로 향했다. 그곳에서 한참을 머물더니 이번엔 바로 아래 자리한 2000년대 서울로 이동한다. 그는 그저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작가 한수산을 만났다. 최근 일제강점기의 징용과 원폭을 다룬 소설 <군함도>를 출간한 그는 필연인 듯 서울역사박물관 2층에 전시된 두 사진을 바라보며 조용히 숨을 토해냈다.
“일본이나 일본인, 친일파가 아니라 그들 뒤에 도사린 제도와 환경, 집단, 그 거대한 죄악을 그려내려고 했어요. 27년이나 걸려서 이렇게 2권으로 완성했습니다.”
26세에 단편으로, 이듬해 장편으로 문단에 데뷔한 한수산은 실로 한 세대에 이르는 세월을 ‘군함도’에 매달렸다. 그 시작은 ‘한수산 필화사건’. 그 일련의 사건을 겪은 후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곳의 한 서점에서 오카 마사하루 목사의 <원폭과 조선인>이란 책을 접하곤 군함도에 있던 하시마 탄광의 조선인 강제징용과 나가사키 원폭 피해를 소설화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2003년 5권 분량의 대하소설 <까마귀>가 세상에 나오게 된다. 그러니까 이번에 출간한 <군함도>는 전작인 <까마귀>를 거의 다시 쓰다시피 해 2권으로 압축한 결정판이다.
과연 어떠한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 하나의 주제를 이토록 오래도록 간직하게 했을까? 그는 “인간은 살기 위해 태어나지만 자신이 책임져야 할 몫이 아닌 국가 혹은 역사가 뒤엉킨 거대한 불행, 끊임없는 불평등과 압제를 감내하며 살아선 안 된다”며 말문을 열었다.
* 한수산 필화사건
1981년 5월, 한 일간지에 1년간 연재 중이던 한수산의 장편소설 <욕망의 거리>로 인해 관련자들이 국군보안사령부(사령관 노태우)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사건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군인,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에 대한 묘사가 당시 군부정권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이후 한수산은 글쓰기를 중단하고 일본으로 떠나 여러 해 동안 머물렀다.
▶나이 칠십, 전혀 두렵진 않습니다
▷오랜만에 새 책이 나왔습니다.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지난해 3월부터 이 작업에 들어갔는데, 15개월이나 걸렸네요. 5권짜리 <까마귀>를 다시 고친다고 했더니 주위에서 다 말리더군요. 오랫동안 사귄 주치의가 있는데 1년간 볼일 없을 거라고 했더니 아주 신신당부를 하면서 망가뜨리지나 말라고.(웃음) 어떤 친구는 그럽디다. 나이 칠십에 뭐가 되겠냐고. 다들 왜 그런 헛된 일을 하냐고 했어요. 새로 쓰는 것도 아니고 써놓은 걸 다시 쓰겠다니, 잘된다는 보장이 어디 있냐고. 덕분에 정말 칩거했습니다. 만난 사람이 10명도 안돼요. 다 끊고 군함도에 다녀오고 피폭자 2세들 만나러 합천에 간 걸 빼면 서울을 벗어난 일이 거의 없었어요.
▷그러고 보니 올해 고희가 되셨습니다.
지난해가 광복 70주년이었는데, 해방된 다음해에 태어났어요. 나이 칠십이란 게 그렇게 두렵진 않더라고. 못해본 거 아쉬운 거, 뭐 그런 것도 없고.(웃음) 아주 묘한데, 그간 그래도 잘 살지 않았나 싶은 게, 겁나는 건 없었어요. 주변에선 괜히 1년간 헛일 하는 거 아니냐고 걱정했는데, 뭐 안 되면 망하기밖에 더하겠어요. 어떤 의미에선 불가능한 일에 대들었는데, 그럼 또 어떠랴 싶었고. 일하는 시간을 따로 정해 논 게 아니라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몸이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정신이 맑으면 새벽에라도 집 앞에 얻어 논 오피스텔로 갔어요. 먹고 쓰고 자고만 반복했지요. 8월쯤 되니 길이 보이더군요. 가을이 되니까 되겠다 싶더라고. 그래서 밀고 나갔어요. 칠십에도 두려울 게 없구나 싶었지.
▷집필하실 때면 원래 칩거하시는지요.
연재할 땐 그렇진 않은데, 이렇게 들어앉아서 쓴 작품이 종종 있긴 해요. <부초>도 대학노트 16권에 연필로 썼으니까. 그땐 석 달 열흘이 걸렸지요. 연재를 할 때도 필사하고선 다시 타이핑하면서 재구성하는 스타일이에요. 사서 고생하는 것이죠. 이 작품은… 좀 특별했어요. 나이 들어 이런 작업을 한다는 게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고.(웃음)
▷전작과는 어떤 점이 달라진 겁니까.
글쎄요. 개작이라기보단 전작의 틀만 남기고 새롭게 구성하고 집필한 작품이랄까. 원고지로 5300매인 <까마귀>에서 2000매 정도만 남기고 1500매 분량을 새롭게 썼어요. 군함도에서의 고난이 확대됐고 원폭 제조과정이나 당시 일본사회의 세부적인 서술이 축소되거나 배제됐습니다. 두 주인공의 출신지와 성장지가 소양강을 낀 춘천으로 새롭게 설정된 것도 달라진 점이에요. 작품 배경을 강원도 춘천으로 삼고 주인공들의 성장과정에 지역적 영향을 배치했습니다.
▷출간한 지 한 달쯤 됐는데,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올랐습니다.
사실… 누가 읽겠나 싶었어요. 즐겁고 행복한 일을 쓴 것도 아니고 1943년 일제강점기에 어둡고… 이게 정말 개고생한 얘기잖아요. 지난해에 모 방송국에서 드라마로 검토한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책임PD가 그러더군요. 자체 결론이 났는데, 첫째 로맨스가 없고 둘째 희망이 없다고. 아니 징용 끌려간 게 관광 간 것도 아니고.(웃음) 그럼에도 독자 분들이 이런 소설을 써줘서 고맙다고 메시지를 주세요. 지금까지 받아보지 못했던 반응입니다. 아주 특이한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27년을 한 사건에 주목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겁니까.
어쩌면 아주 우연한 계기가 손을 놓지 못하게 했어요. 필화사건 이후에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는 걸 보고 저 자가 대통령이 된 기간만큼은 이 나라를 떠나 있자, 그래서 일본에 가게 됐어요. 거기서 군함도의 존재를 알게 됐는데, 그땐 국내에 전혀 알려진 게 없었어요. 자료를 수집하다 보니 제대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에요. 그렇게 27년을 매달리게 됐습니다.
▷책 속엔 피폭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습니다.
고통스러웠지만 쓸 수밖에 없었어요. 그 고통 속에서 원폭을 맞은 조선인들이 참혹하게 죽어갔으니까요. 당시 일본인들은 부상자들 가운데 “어머니”, “물 좀 주세요”라고 우리말로 신음하는 사람들은 버렸습니다. 한국 사람은 사고를 당하면 “도와주세요”가 아니라 “사람 살려”라고 소리칩니다. 자신을 제3자로 객관화시키지요. 피폭지에 구조대로 들어간 일본인들은 “사람 살려!”라고 소리치면 들것에 싣고 가다가도 전부 버렸어요. 그래서 더 많은 조선인들이 죽어갔습니다. 쓸 수밖에요.
▶전혀 성격이 다른 민족이 여전히 엇갈리고 있습니다
▷필화사건의 분노가 이 소설에도 영향을 미친 걸까요.
<군함도>는 2003년에 출간한 장편<까마귀>를 개작한 작품이다. <까마귀>는 2009년 12월 2권으로 재구성돼 일본에서 번역판이 출간되기도 했다.
별 연관성은 없는 것 같아요. 그 사건은 내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정리가 되지 않으면 스스로 불모지가 되겠더라고. 분노, 증오, 제도와 권력 때문에…. 허망함에 삶의 가치나 현실을 보는 눈이 자꾸 왜곡되고, 그럴수록 나만 괴로워지는 거잖아요. 어떻게든 극복해야지 싶었어요. 정공법은 아니지만 <용서를 위하여>란 소설을 쓰면서 그 얘기도 했었고. <군함도>를 쓸 수 있었던 건 ‘도대체 광복 70주년이 됐는데도 이렇게 해결을 못할 수 있나’란 분노였죠. 과거사란 덩어리를 땅에 묻거나 불태웠어야 하는데, 양국 정부가 그러질 못하고 있잖아요. 오히려 물을 채웠지요. 물이 차면 안 보이고 가물면 눈에 보이니 싸우게 되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과거사 청산의 실마리가 풀리겠습니까.
아마도 점점 더 어려워질 겁니다. 양국은 시작부터 서로 엇나갔어요. 일본은 특유의 성향이 있습니다. 다 말하지 않지요. 그저 알아들을 만큼만 얘기하고 그걸 교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린 톡 까놓고 얘기하잖아요. 민족성이 전혀 달라서 더 힘들어요. 한·일 과거사는 이렇게 지리멸렬하게 고착화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나마 일본의 양심적인 분들도 세월이 흐르다보니 지쳤어요. 이젠 문화가 그 몫을 담당해야 합니다. 과거사를 단순히 과거로 만들지 말고 살아있는 오늘, 우리들의 문제로 가져가야 해요. 끊임없이 관련 소설, 영화, 노래가 나와서 되풀이하도록 만들어야지요.
▶전략은 둘째 치고 전문가조차 없더군요
▷최근 군함도에서 광산을 개발한 미쯔비시가 강제징용과 관련해 미국과 중국에 잇따라 사죄와 배상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요.
그 시점에 마침 일본의 마이니치신문이 <군함도>를 쓴 작가 입장에서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서면 질의서를 보내왔더군요. 화가 나서 이렇게 썼습니다. ‘당신들은 사안에 따라서 입맛에 맞는 말만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할린에서 일본이 철수할 때 4만3000명의 조선인은 배에 태우질 않았다. 그때 일본은 너희는 조선인이니 배에 태울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미쯔비시는 합병된 시기에 조선인은 없었다고 한다. 다 같은 일본인이라 보상할 필요가 없다니. 일관성도 없고, 사안에 따라 제각각이다’. 어떤 해결의 실마리가 있을까 싶어요. 우리가 전략적으로 파고들어가 싸워야 합니다. 국력이 좀 더 컸더라면 이렇게까지 나오진 않았겠지요.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군함도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한동안 시끄러운 이슈였습니다.
우리 정부가 전략적이지 못했습니다. 강제노동이 있었으니 유산등재가 안 된다니, 아우슈비츠 수용소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지 않았습니까. 유네스코는 잘못된 역사도 후손에게 교훈이 된다 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고 있거든요. 몰라도 이렇게 모를 수가 없어요. 등재하면 안 된다고 외칠게 아니라 강제된 사실이 명확하게 명시돼야 한다고 전략적으로 접근했어야 합니다. 명시 한다, 안 한다 정확한 표현도 없이 어물어물하다가 지금은 아예 무시당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최근엔 아예 나가사키 시에서 군함도가 낙원이었다고 홍보한다지요. 전략도 없지만 전문가도 보이지 않습니다.
▷전문가라면.
일본에는 평생을 바쳐 과거사를 연구한 이들이 여럿이에요. 우린 거의 없습니다. 우리 세대가 가고 나면 후배들에게 물려줄 것도 없고, 이렇게 흘러가다 미해결로… 안타깝지요. 독일작가 귄터그라스가 그러더군요. 독일이 훌륭한 게 아니라 유태인이 훌륭한 거라고. 끊임없이 자료를 발굴하고 독일의 만행에 대해 영화를 만들고 책을 쓴다고. 그러니 어찌 사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마찬가지예요. 해방 이후에 위안부와 관련된 영화가 최근에야 나왔습니다. 어찌 보면 할 말 없는 민족이지요. 다시 강조하지만 책도 나오고, 영화도 나오고, 노래도 부르면서 전 세계로 확산시켜야 합니다. 그래도 우리 젊은이들 중에 과거사에 관심 있는 이들이 있다고 믿어요. 그들을 믿고 가야지요.
▷이미 새로운 작품을 구상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기억의 3부작’이라고 붙였는데 사할린 문제, BC전범 문제, 피폭 2·3세 문제 같은 과거사를 취재한 게 벌써 오래 전이에요. 다음 작품은 이미 시작했는데, 어떤 약속을 할 수 있는 나인 아니잖아요. 일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살 수도 죽을 수도 있고. 지금은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