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건축이 자연을 훼손하고 이기는 ‘강한 건축’이었다면, 앞으로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약한 건축’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현대건축이 초고층 빌딩과 화려한 건물을 앞세워 도시 개발에 매진하던 1990년대부터 일찍이 작고, 느린 자연주의 건축을 몸소 실천해온 건축가가 있다. 일본의 세계적인 건축가 쿠마 켄고(70)다. 못이나 철근을 쓰지 않고 나무를 짜 맞춰 10m 높이 건물을 짓는가 하면, 건물 외벽에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을 둬 자연과 건축을 하나로 잇는다. 건축이 자연에 스며들게 하는 방식이다. 쿠마가 지켜온 오랜 건축 철학은 최근 들어 더욱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기후변화 위기로 환경 보존과 지속가능성이 전 세계적인 화두로 떠오르면서다.
이런 가운데 쿠마가 이끄는 설계 사무소인 쿠마켄고앤드어소시에이츠(KKAA)는 올해 5월 서울 성동구 성수동 주택가에 한국 사무소를 열었다. 럭스멘은 최근 한국을 찾은 쿠마를 한국 사무소에서 만났다. 그는 “오래 전부터 한국 문화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한국에 거점을 두고 싶다고 생각했다”며 “한국의 컨템퍼러리 문화는 지금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고, 우리도 그런 문화적 자극을 받아서 건축에 살리고 싶다”고 밝혔다.
특히 쿠마는 세계적인 아트페어 ‘프리즈(Frieze)’가 2년 전 서울에 상륙하는 등 아시아의 새로운 문화예술 도시로 떠오른 서울의 잠재력에 주목했다. 그는 “이제 도시 개발은 예술과 자연이라는 두 요소를 모두 잘 받아들이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 시대가 됐다”며 “서울에서 예술의 존재감은 점점 커지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자연은 아직 덜 주목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과 자연, 건축이 잘 어우러진다면 아시아에서 서울의 존재감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서 태어난 쿠마는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위해 건설된 일본 국립 요요기 경기장에서 받았던 영감을 계기로 건축가의 꿈을 키웠다. 그의 모교인 일본 도쿄대 건축학과를 비롯한 당대 일본의 주류 건축계는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을 지향하며 서구권의 건축 양식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하지만 1990년 자신의 설계 사무소인 KKAA를 설립한 쿠마는 오히려 일본의 전통 목조건축에 더 관심을 가졌다.
특히 버블경제 붕괴, 고베 대지진 등을 겪으면서 쿠마는 철근 콘크리트 등으로 점철된 현대 건축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됐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의 목조건축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한편, 제한적인 공간에서 주변의 자연 환경과 장소가 가진 문화적 맥락을 살린 건축으로 계적인 명성을 쌓았다. 일본 도쿄 국립경기장과 네즈미술관, 중국 베이징 그레이트 뱀부 월, 스코틀랜드 던디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V&A) 뮤지엄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현재까지 쿠마가 설계한 건축 작품은 세계 20여 개국, 400여 개에 이른다.
쿠마는 “큰 부지에 큰 건축을 만들기보다는 작지만 그 장소의 개성을 살린 건축물을 설계하는 것을 중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바다·물·집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킨 도쿄의 ‘워터 글래스 하우스’, 제주도 현무암을 소재로 오름의 부드러운 곡면 형태를 지붕에 반영한 롯데제주리조트 ‘제주 볼(아트빌라스)’ 등이 대표적이다. 쿠마의 작고, 낮고, 느린 자연주의 건축물은 언제나 자연과 어우러지고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과 함께 생동한다.
쿠마의 자연주의 건축은 작은 스케일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쿠마는 “대부분 건축가들은 작은 주택으로 데뷔하지만 이후 큰 건물을 설계하기 시작하면 전혀 다른 것을 만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큰 건축물이라고 해도 우리는 같은 연장선상에 놓고 본다”고 강조했다. 약한 건축을 통해 추구했던, 공간과 인간의 대화가 있는 공간의 느낌은 큰 프로젝트에서도 맥락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특히 쿠마는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국립 카스미 가오카 육상 경기장을 재건축한 도쿄 국립경기장(2019) 설계에 참여해 세계인의 이목을 끌었다. 현대 대형 경기장에선 볼 수 없었던 ‘숲의 경기장’ 콘셉트로, 내외부에 목재를 많이 사용했고 층마다 식목을 심어 주변 경관과 어우러지게 설계했다. 특히 쿠마는 도쿄도, 후쿠시마현을 비롯한 일본 47개 전체 도도부현의 목재를 구조물에 사용해 그 의미를 더했다. 이에 힘입어 2021년에는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에도 이름을 올렸다.
올해 6월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개관한 세계 최대 규모의 소리 박물관 ‘오디움’도 그의 자연주의 건축 계보를 잇는다. 쿠마는 “가장 어려웠던 요구 사항은 정형화된 박스 형태의 파사드였다. 어떻게든 이를 깨고 자연과 소통하도록 만들기 위해 작은 파이프들의 연속으로 큰 덩어리(박스)를 구성하는 방식을 취했다”며 “외부에서 부는 바람이나 비, 태풍 등이 파이프 사이 빈 틈을 통과할 수 있게 하면서 건물이 이를 잘 견딜 수 있도록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KKAA 코리아는 프랑스 파리와 중국 베이징, 상하이에 이은 KKAA의 네 번째 해외 사무소다. 쿠마는 “우리는 지금 도쿄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 작은 사무실을 만들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여러 곳에 분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고 다원적인 네트워크를 확대하고 싶었다”며 “서울사무소는 그 움직임 중 하나다. 서울에서 사무실을 열 장소를 찾다가 가장 활기차고 재미있을 것 같다고 느낀 성수동을 낙점하게 됐다”고 말했다. KKAA 코리아는 건축가, 사무직, 인턴 등 현지 채용도 진행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 잇달아 건축 설계 프로젝트를 맡게 된 것이 한국 사무소 설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지난해 9월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 문을 연 화이트스톤갤러리 서울과 오디움에 이어 현재는 서울시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KT에스테이트·스틱얼터너티브자산운용이 추진 중인 성수동 오피스 개발사업의 종합 설계를 맡아 진행하고 있다. 2025년 완공을 목표로 부산 롯데타워도 설계 중이다.
쿠마는 “최근 도시로서 일본 도쿄는 점점 보수화되고 한국의 서울이 오히려 선구적, 실험적인 방향에 있는 것 같다”며 “오피스 공간을 예로 들면, 도쿄에서는 여전히 20세기의 오피스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것일 뿐, 오피스의 형태를 새롭게 바꾸거나 오피스 공간을 더 재미있는 공간으로 바꾸려고 하는 시도는 드물다. 그에 반해 한국에서 진행 중인 성수동 오피스 개발사업은 오피스공간에 테라스를 끌어들인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더 진보적인 형태를 띤다”고 말했다. 쿠마가 맡은 성수동 오피스 개발사업은 성수동 2가 255-3, 269-207에 위치한 노후 연립주택인 창수연립과 신안맨션을 인수해 오피스로 개발하는 사업이다. 총 대지면적은 약 700평으로 KT에스테이트는 이 자리에 지하 7층~지상 11층, 연면적 약 7200평 규모의 오피스 시설을 개발할 계획이다. 성수동 일대에서 여러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이 프로젝트는 사업 기획 단계에서부터 쿠마 켄고가 설계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
쿠마는 특히 한국의 전통 문화와 현대 문화의 관계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을 여러 번 방문했는데 20년 전 민속촌을 찾았을 때 안쪽에 빳빳한 한지를 바르고 바깥쪽에 목재 살을 덧댄 한국의 전통 창호기법을 인상 깊게 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쿠마는 “최근 서울을 둘러봤는데, 오래된 것을 잘 증축하거나 개축한 예를 많이 봤다”며 “한국은 국토가 좁지만 그래서 오히려 사무실이나 공동 주택을 더 독특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건축가로서 이 점을 살려 한국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이나 일할 곳을 제안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번에 문을 연 한국 사무소 역시 성수동 골목에 있던 3층 짜리 주택을 사무 공간으로 개조해 만든 것이다. 사무실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주변의 다른 연립 주택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이 오래도록 갖고 있던 헤리티지를 잇는다. 쿠마는 “도쿄에서 거리도 가깝고, 저도 자주 서울에 가서 함께 일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활기찬 에너지를 가진 한국에서 여러 가지 재미있는 건축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쿠마는 화이트스톤갤러리 서울과 오디움, 제주 아트빌라스, 부산 롯데타워 외에도 강원도 춘천의 ‘네이버커넥트원’ 등 한국의 여러 건축물을 설계했다. 현재 논의 단계에 있는 프로젝트도 상당하다. 쿠마는 “앞으로도 많은 프로젝트를 맡으면서 한국에서 진행되는 현상 설계 공모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다. 특히 공공 건축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며 “작게나마 다양한 프로젝트를 다양하게 하고 싶고, 도시 지역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프로젝트를 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KKAA가 한국 사무소 다음으로 고려하고 있는 거점은 미국이다. 쿠마는 “지금까지 미국은 초고층 빌딩과 아파트를 만드는 국가라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최근 들어 미국에서도 숲속 미술관 같은 자연 속 건축을 의뢰하는 프로젝트가 늘고 있다”며 “기회가 된다면 미국에 사무소를 열어 적극적으로 프로젝트를 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송경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