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높은 금리와 경기 둔화에도 금융권을 중심으로 ESG 채권을 발행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ESG 채권은 환경, 사회, 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발행하는 채권을 뜻하며 발행 목적에 따라 녹색채권, 사회적채권, 지속가능채권 등으로 분류된다. ESG 채권 발행자는 환경 및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금리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혜택은 채권 발행기관에 비용 절감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으며, 투자자에게는 더 높은 수익률을 제공한다.
우리금융은 지난 9월 2000억원 규모의 신종자본증권을 ESG 채권 방식으로 발행했다. 해당 채권은 발행 5년 후 중도상환이 가능한 유형의 채권으로 투자자들의 수요가 7000억원을 기록했다. 채권 발행 금액이 2000억원이라는 걸 놓고 봤을 때 공급량보다 수요량이 약 3.5배에 달할 정도로 반응도 좋았다.
업계 한 관계자는 “ESG 채권 발행 시 통상 여신전문금융채보다 발행금리가 낮아 고금리 환경에서 자금 조달에 유리한 측면이 있다”라며 “투자기관이나 대중들도 ESG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 기업이 환경, 공공을 챙긴다는 이미지를 얻고 낮은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해 재무적으로도 유리한 측면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2021년 20조원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한 ESG 채권은 최근 기준금리 급등, 레고랜드 사태 등으로 발행 규모가 이전보다 위축된 것이 사실이다. 기업데이터연구소 CEO스코어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국내 금융사 53곳이 발행한 ESG 채권 규모는 약 4조8200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20.1%(1조2120억원)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향후 ESG 채권 발행은 다시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는 목소리가 늘고 있다. 김은기 삼성증권 연구원은 “회사채 발행 여건의 악화로 ESG 회사채 발행은 감소했지만, 투자자나 발행자 모두에게 ESG 채권의 필요성이 감소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ESG에 대한 공시 및 규제 강화 등 제도적인 변화를 통해 ESG 채권 투자자뿐만 아니라 강화된 규정에 맞춰 발행에 대한 수요가 확대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올 하반기 들어 ESG 채권의 상장은 지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한국거래소 ESG포털에 따르면 지난 1월 1조6452억원에 불과했던 채권 신규 상장 금액은 7월 6조5473억원, 8월 7조6419억원으로 올라섰고, 9월(7조9710억원)엔 5배 가까이 불어났다.
유럽연합(EU) 주도로 전 세계적으로 녹색금융 트렌드가 확산하고 있고, 국내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지원 등을 받아 채권 발행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기업 입장에서 발행 과정만 보면 일반 신용채 대비 까다롭지만, 정책 수혜를 누릴 수 있는 동시에 기후변화 저지 등을 지원한다는 평판을 취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기 때문이다. 제도적으로는 상장 수수료 면제 연장도 시장 활성화에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한국거래소는 ESG 채권 상장 수수료와 연 부과금 면제 기간을 오는 2025년 6월14일까지 2년 연장하기로 했다.
ESG 채권의 한 종류로 녹색채권이 있다. 친환경 프로젝트에 사용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된 채권으로 용도가 제한된 것이 특징이다. 일례로 지난 9월 20일 BNK부산은행은 지방은행 최초로 ESG 채권의 한 종류인 녹색채권을 발행했다. 부산은행이 발행한 녹색채권의 만기는 1년 2개월, 발행 규모는 600억원으로 환경부와 금융위원회가 공동으로 마련한 ‘한국형 녹색분류체계 가이드라인’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한국형 녹색분류체계는 ‘특정 기술이나 산업활동이 탄소중립을 위한 친환경에 포함되는지’에 대한 기준이다. 부산은행이 발행한 이 채권은 친환경 프로젝트에 사용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된 채권으로 ▲친환경 사업 ▲신재생에너지 사업 등 녹색 산업과 관련된 용도로만 사용이 한정된다.
김청호 부산은행 자금시장본부장은 “녹색채권 발행으로 온실가스 감축, 순환경제 활성화 등 실질적인 환경 개선 효과가 창출되길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카드사 및 캐피털사들의 녹색채권 발행도 활발하다. 현대캐피탈은 지난 2016년 3월 국내 민간기업 최초로 5억달러 규모의 녹색채권을 발행했다. 지난 6월 현대카드는 2500억원, 롯데카드는 7월과 8월에 각 400억원, 100억원의 녹색채권을 발행했다. 이외에 현대캐피탈은 지난 3월 6000억원의 녹색채권을 발행했고, 우리금융캐피탈은 지난 8월 800억원의 한국형 녹색채권을 발행한 바 있다.
여신업계 한 관계자는 “카드사나 할부금융사의 경우 녹색채권 발행을 통해 조달한 자금을 추후 자동차 산업에서 늘어날 친환경차에 대한 금융 파이를 확대하며 수익성 다각화를 꾀할 수 있다”라며 “이러한 이유로 향후 2금융권의 자동차 금융 시장 확대를 위해 채권 발행이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녹색채권 발행을 통해 긍정적인 시너지를 내는 분야가 있는 반면에 용도 외로 사용하는 이른바 그린워싱(위장 친환경)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국내 발전 5사(남동발전·동서발전·서부발전·남부발전·중부발전)가 최근 5년간 녹색채권 발행액 중 약 30%를 액화천연가스(LNG) 발전 사업에 집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녹색채권은 석탄 발전을 빠르게 줄이기 위해 LNG의 과도기적 역할을 인정하고 있으나, LNG는 탄소 배출 발전이라 ‘녹색’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있다.
양향자 의원실에 따르면 5개 발전사는 지난 2019년부터 올해까지 5년간 총 5조9415억원의 녹색채권을 발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5개 사는 이 중 1조9828억원을 LNG 발전 사업에 집행했다. 총액 대비 약 30%다. 남동발전은 녹색채권 발행액 1조4163억원 중 3100억원을, 동서발전은 1조3609억원 중 3500억원을, 서부발전은 1조1100억원 중 8200억원을, 남부발전은 1조2664억원 중 4900억원을 LNG 발전 사업에 집행했다. 중부발전은 녹색채권 7879억원 모두 신재생 발전 사업에 썼다.
한국형 녹색채권 기준에 따르면 LNG의 과도기적 역할을 인정하고 있으나, LNG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력은 탄소 배출 발전이라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녹색채권 자금은 환경 개선 효과를 가져오는 녹색 프로젝트에 쓰여야 하는데, 30% 가까이 LNG 발전 사업에 사용되는 것은 눈속임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앞서 지난 2021년 환경부가 ‘한국형 녹색분류체계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며 ‘녹색경제활동’에 LNG를 이용한 발전을 포함해 그린워싱을 조장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양향자 의원은 “RE100 달성 여부에 국내 글로벌 기업의 생사가 달려 있다”라면서 “국내 재생에너지 부족에 우리 기업들은 재생에너지 공급이 원활한 해외로 공장을 옮겨야 할 판”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한국 발전사들은 녹색채권의 맹점을 이용해 RE100에 포함되지도 않은 LNG발전소 짓기에 열을 올리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7월 현대캐피탈은 국내 첫 지속가능연계채권(Sustainability-Linked Bonds, 이하 SLB)을 성공적으로 발행했다. 2022년 10월 SLB가 한국거래소 사회책임투자 세그먼트에 도입된 이후 처음이다. SLB는 녹색채권 발행이 어려운 기업을 위해 고안된 것으로 자금 조달 사용의 제한을 풀어주고, 비친환경적 기업의 발행도 가능하도록 개발됐다. 그간 비친환경적 산업에 속하거나, 적격 프로젝트가 부재한 기업의 경우 녹색채권 시장의 접근성이 제한됐다.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가진 국내에서 민간 기업의 녹색채권 발행이 부족한 상황도 이러한 이유에 기인한다. SLB는 발행 기업의 친환경 여부나 자금 사용의 제한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보다 많은 기업의 시장 참여를 가능하게 해준다.
무엇보다 SLB 발행 기업은 특정한 환경·사회적 목표의 달성을 약속해야 하며, 이에 대한 세부 조건을 SLB에 포함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SLB는 발행 기업이 ‘무엇을’ ‘얼마나’ ‘언제까지’ 달성할 것으로 약속하고 달성·미달성 시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SLB 발행사는 ‘핵심성과지표(Key Performance Index, KPI)’를 정하고, 이에 기반하여 적정 수준의 ‘지속가능성과목표(Sustainable Performance Target, SPT)’를 약속한다. 또한, 이러한 SPT를 언제까지 달성할지에 대한 ‘목표일(target date)’과 SPT 달성 여부에 따른 재무적 ‘유인책(incentive)’을 SLB 발행설명서에 명시해야 한다. 2019년에서 2022년 사이 글로벌 시장에서 발행된 SLB를 살펴볼 경우 95% 이상이 환경 개선에 목표를 두고 있다.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KPI는 탄소배출량이며, SPT는 발행 기업의 탄소배출량을 특정 연도 대비 채권 만기 이전 얼마나 감축하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떠한 기업이 2020년 대비 2025년까지 탄소배출량을 20% 감축하는 것이다. 목표 미달성 시 목표일에서 만기일까지 이자율이 정해진 수준 증가하는 이자율 할증(Coupon step-up)이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쉽게 말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경우 채무자에게 추가 이자를 지급하는 등 페널티가 부여된다.
지난 7월 SLB를 발행한 현대캐피탈은 이번 채권 발행을 통해 현대자동차그룹과 적극 협력해 친환경차 할부 상품 판매 확대, 전기차 조직 신설, 배터리 리스 상품 개발, 배터리 제조업체 및 전기차 충전소 관련 금융상품 개발 등 다양한 방안을 활용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최순영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원은 “현대캐피탈의 사례는 SLB가 가지는 장점을 보여준다”라며 “이러한 다양한 활동들은 하나의 적격 프로젝트로 통합하거나, 개별적 활동에 투입된 자금별 영향 평가를 하기 어렵기 때문에 녹색채권 발행이 용이하지 않지만 SLB를 통해서는 자금 활용의 용도와 상관없이 최종적으로 SPT의 달성 여부만을 보기 때문에, 다양한 ESG 전략을 추진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녹색채권 발행이 어려운 제조업 기업에 ESG 채권 발행의 기회를 제공하는 SLB지만 평가방법에 있어서는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통적 ESG 채권의 경우 자금 조달사용의 불편함은 있으나, 녹색분류체계(green taxonomy) 등 적격 프로젝트에 대한 기준과 이미 상당한 발행 사례가 축적돼 시장의 벤치마크가 형성되어 있다. 이에 반해 SLB의 설계를 위해서는 목표 수립 및 달성에 있어 데이터, 벤치마크, 평가방법론 등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최 연구원은 “이러한 문제는 향후 많은 기업들이 SLB 시장에 참여하여 데이터가 축적되고 벤치마크가 형성되면서 점차 해소될 것으로 기대된다”라며 “국내 SLB 시장의 발전을 위한 선순환구조가 이뤄지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박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