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리스크, 고물가, 고금리 등 매크로(거시경제) 불확실성 속 주요국 증시가 주춤하고 있는 가운데 자산규모 100억원 이상의 국내 슈퍼리치(고액 자산가)들은 연말 및 내년에도 여전히 주식 비중을 늘릴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 침체 우려가 지속되며 기업들의 이익 추정치가 하향돼 주식 종목들의 멀티플(기업가치)에 부담으로 작용되고 있지만, 슈퍼리치들은 오히려 주가가 내리면 저가 매수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슈퍼리치들은 고금리 환경 속 현금 흐름 창출은 채권을 통해 챙기면서, 시장 평균을 웃도는 초과 수익을 거두기 위해선 주식 투자가 필수적이라고 보고 있다. 가치주, 배당주보다는 주가 상승 여력이 큰 기술 및 성장주 투자를 선호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반도체, 2차전지(배터리), 바이오, 신재생에너지 등을 유망한 주식 투자 업종으로 전망했다. 매일경제가 국내 자산관리(WM) 서비스 1위 증권사인 삼성증권과 함께 자산규모 100억원 이상 슈퍼리치 10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고액 자산가들의 63.9%가 연말 및 내년에 국내외 주식 비중을 늘리겠다고 밝혔다. 또 주식 투자 비중을 늘리겠다고 답한 슈퍼리치 중에선 기술 및 성장주 투자를 선호한다는 의견이 50.7%로 과반수를 넘었다.
가치주, 배당주 선호 의견은 각각 26.1%, 15.9%에 그쳤다. 일반 개인투자자 대비 상대적으로 보유 자산 규모가 큰 슈퍼리치들의 경우 배당주 투자만으로도 매년 안정적인 배당 수익을 창출할 수 있지만, 오히려 차익 실현을 위한 기술 및 성장주 투자를 최우선 옵션으로 꼽은 셈이다. 그 밖에 테마주 투자가 효율적이란 소수 의견(7.2%)도 있었다.
김성봉 삼성증권 SNI·법인전략담당 이사는 “부자들은 불안했던 거시적 상황들이 진정되는 분위기 속에서 신성장 산업을 중심으로 수익 기회를 확대하고 있다”며 “주요국 지수가 대세 상승하는 장세는 아니어도 성장 가능성이 보이는 업종에 선별 투자하는 모습”이라고 밝혔다.
자산 규모가 수백억원인 고액 자산가 A씨는 “인플레이션으로 돈의 가치가 하락하는 시기엔 당연히 시장 대비 초과 수익률을 노려야 한다”며 “전통적인 배당, 가치주 투자보다는 상대적으로 주가 상승 여력이 큰, 이익 추정치가 상향되는 기술 및 성장주 투자 기회를 노리는 이들이 많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올해 초 슈퍼리치들은 지난해 주요국 증시가 하락하자, 우량주 저가 매수에 나선 바 있다. 상반기 시장이 반등하고, 추가 상승을 위한 동력이 부족해지자, 주가 상승 동력이 발생한 개별 성장주 투자에 집중하는 것을 효과적인 투자 전략으로 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슈퍼리치 10명 중 6명이 주식, 펀드 등 금융상품 투자를 통해 “자산 증식에 성공했다”고 답했다.
현재 코스피는 연중 최대 19%까지 상승했다가 하반기 지지부진한 흐름을 보이며 상승분을 대거 반납한 상태다. 당분간 박스권 장세가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데, 슈퍼리치들은 올 한 해 세후 실질 기대수익률로 10~15%를 전망한 경우가 29.6%로 가장 많았다. 5~10% 및 3~5% 수익률을 기대한 경우는 각각 16.7%였다. 한편 공격적인 투자로 인해 50% 이상 수익률을 바라보는 슈퍼리치들도 13% 있었다. 초과 수익을 위한 공격적 투자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향후 가장 유망할 것으로 전망되는 주식 투자 업종으로 전기차, 2차전지를 꼽은 슈퍼리치들이 43.5%로 가장 많았다. 2차전지 투자가 소위 ‘거품’이 아니라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삼성증권 관계자는 “올해 포스코홀딩스, 에코프로, 에코프로비엠 등 2차전지 밸류체인(가치사슬) 관련주들의 주가가 급등하며 기업가치 부담이 발생했지만, 성장성에 알맞게 주가가 올랐다는 의견이 36.1%로 나왔다”고 말했다.
부자들의 투자 상담사 역할을 하는 일선 증권사 프라이빗뱅커(PB)에 따르면 슈퍼리치들은 2차전지 종목 중에선 포스코홀딩스, 에코프로에 대한 선호도가 높고, 매수 문의가 많이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포스코홀딩스, 에코프로는 2차전지 종목 중에서도 시가총액이 높아 우량하면서 그룹 차원에서의 역량 집중으로 수직계열화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슈퍼리치들의 뭉칫돈이 2차전지 종목으로 지속 유입되면서, 올해 급격한 주가 상승을 견인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전기차, 2차전지 외엔 반도체 투자 매력이 높다고 답한 슈퍼리치들이 26.1%로 많았다. 올해까진 메모리 반도체 업황이 부진하지만, 내년부턴 전방 정보기술(IT) 수요가 살아나며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실적도 재차 반등할 것이란 기대감에서다. 반도체 업황은 국제 경기의 선행 지표로 손꼽히는데, 향후 경기 침체보다는 경착륙으로 인해 반도체 경기 회복을 기대하는 시선이 많다는 뜻이다. 특히 인공지능(AI) 반도체 및 고대역폭메모리(HBM) 수혜주에 대한 관심이 높다.
김종민 삼성증권 연구원은 “국내 지수는 밸류에이션 바닥권에 근접해 9~10월 증시 조정은 과도했다고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며 재평가 대형주 및 차기 주도주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이수페타시스, 한미반도체, 두산테스나, 현대오토에버, 하나금융지주, 기아 등을 추천했다.
한 PB는 “2차전지를 제외하고 슈퍼리치 순매수 상위 종목을 보면 반도체주인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이수페타시스가 포착된다”며 “슈퍼리치들은 미국 증시 종목 중에선 테슬라,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 밖에 바이오(10.1%), 신재생에너지(7.2%) 업종을 유망하게 보는 시선도 있다. 바이오주의 경우 향후 기대수명이 늘어나고, 이에 따라 각종 치료제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자연스레 시장 파이가 증가할 것이란 시선이 많았다. 글로벌 주요국 사이에서 친환경 이슈가 꾸준히 제기되면서 신재생에너지 관련주에 대한 투자도 장기적으로 유망할 것이란 분석이다.
한편 슈퍼리치들은 코스피가 연말엔 현재보다 상승할 것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았다. 코스피가 2600~2800포인트에서 머물 것이란 의견이 44.4%로 다수였다. 2400~2600포인트에 머물 것이란 의견도 34.3%로 적지 않았다. 2800포인트 위로 상승할 것이란 전망도 8.3% 나왔다.
향후 가장 유망한 투자 시장으로는 한국보다 미국 증시를 꼽은 경우가 57.4%로 가장 많았다. 적극적인 자사주 매입, 높은 배당 성향으로 주주 환원율이 높은 미국 증시의 매력도를 높게 평가했다는 분석이다. 베트남, 인도 등 고성장이 기대되는 신흥국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반면 지정학적 리스크에 외국인 자본이 대거 이탈되는 중국 시장 투자 매력도는 대부분이 낮다고 평가했다.
고액 자산가 B씨는 “지난 2000년대 초반 빠르게 성장한 중국 증시의 급격한 상승세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며 “다소 리스크가 있을 순 있지만, 장기적으로 뛰어난 수익률을 기대하고 신흥국 지수 상품을 분할 매수 중”이라고 말했다.
한편 슈퍼리치들은 시중 금리가 꾸준히 오름세를 보이고 있지만, 채권 투자 기회가 여전히 있다고 보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에 의한 긴축 공포가 정점에 이르렀던 지난해 말, 채권 금리가 치솟았을 때 장기채를 저가에 매수한 슈퍼리치들은 향후에도 추가 매입할 의지를 내비쳤다. 특히 실물 채권의 경우 상장지수펀드(ETF)와는 다르게 만기까지 보유할 시 원금 보장이 되고 오히려 차익 실현 기회가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장기간 ‘기다리는 투자’를 할 여력이 충분한 슈퍼리치 입장에선 채권 실물 투자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채권 보유 시 매년 시장 금리에 준하는 이자 수익도 얻을 수 있다.
실제 향후 유망한 투자 수단 관련해서 주식(59.3%) 다음으로 채권을 꼽은 슈퍼리치들이 25.9%로 많았다. 부자들은 채권 투자 매력이 비상장 주식, 정기 예적금, 가상화폐, 외화 현금성 자산을 비롯해 부동산, 금 등 실물 자산보다도 높다고 판단했다. 연말 및 내년 국내외 채권 자산 투자 비중을 추가로 늘리겠다는 슈퍼리치들이 59.3%로 많았다. 최근 채권 금리가 꾸준히 오르면서, 채권 가격은 내리고 있지만 저가매수에 따른 채권 투자 기회가 있다는 의견이 63.9%에 달하기도 했다.
한 PB는 “고액 자산가들은 금리가 급격히 오르던 지난해 말 장기채 위주로 편입한 바 있다”며 “현재는 매집 완료 후 금리 인하를 기다리는 경우가 많고, 최근 추가 편입을 원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투자 비중을 늘리고자 하는 채권 중에선 미국 국채를 택한 이들이 39.1%로 가장 많았다. 그 뒤로 한국 국채(35.9%), 한국 회사채(18.8%), 글로벌 기업 회사채(3.1%), 저신용 고수익 회사채(3.1%) 순이었다. 10월 중순 기준 미국의 기준금리가 5%대 중반으로 한국(3.5%) 대비 높은 상황에서 향후 금리 인하에 따른 채권 자본(매매) 차익 폭이 미국 국채가 훨씬 크리라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굴리는 자산 규모가 큰 슈퍼리치들은 세금이 발생하는 이자 수익보다는 비과세인 채권의 자본(매매) 차익에 집중하는 편이다. 따라서 고금리 단기채 상품보다는 표면금리가 낮은 저쿠폰 장기채 투자를 선호한다. 미국 10년물 국채금리가 10월 접어들어 4.8%까지 넘어선 상황에서 잔존만기(듀레이션)가 10년 이상인 장기채는 현재 가격이 많이 떨어진 상황이다. 다만 연준의 기준금리 인상 사이클이 정점에 도달했다는 기대감에 지금부터 저가 매수에 따른 기대 수익률이 높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여삼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높은 채권 투자 불확실성으로 단기간은 단기채를 중심으로 투자하되 미국채 10년물 5% 마디 구간에서 장기채를 늘려가는 전략이 필요하다”며 “한국채의 경우 미국 금리 상승 충격이 없다면 내부적으론 국내 금리 상승을 견인할 재료가 부재해 국고금리 4%대는 과도한 저평가 영역”이라고 말했다.
장기채 투자가 빛을 발하는 시점은 연준이 경기 침체 발생 혹은 금융 시스템 불안 등 요인으로 인해 금리 인하 카드를 꺼낼 때다. 슈퍼리치들은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 시점으로 대부분(44.4%) 내년 상반기를 보고 있다. 또 투자 관련 가장 중요한 매크로 요인으로도 금리 수준(40.7%)을 꼽았다.
황지연 교보증권 연구원은 “금리가 불안정하지만 채권 비중 확대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며 “고금리가 유지되던 지난 1990~2009년 채권의 역사적 수익률은 연평균 6.9%로 주식(5.9%)보다 높았다”고 밝혔다.
차창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