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가장 두꺼운 인구 집단은 50대다. 국가데이터처의 장래 인구추계를 보면 올해 기준으로 50대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6.6%에 이른다. 전 연령대를 통틀어 가장 높은 수치다. 오랜 경제활동을 통해 자산을 축적한 이들은 이미 소비시장의 중심축으로 자리를 굳혔는데, 최근 이 영향력이 시니어 주거 시장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아직 은퇴 시점이 도래하지 않았음에도 노후의 주거 환경을 미리 체험하고 설계하려는 이른바 ‘프리 실버(Pre-Silver)’ 세대가 실버타운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 강남에서 차를 몰아 20여 분을 달리자 경기도 의왕시 백운호수 자락에 대규모 단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해 말부터 순차적으로 입주가 시작된 ‘백운호수 푸르지오 숲속의 아침’이다. 부동산 디벨로퍼 엠디엠(MDM) 그룹이 사업을 시행하고 자회사인 엠포레가 운영 전반을 직접 전담하는 이 단지는 주거형 오피스텔 842실과 시니어주택 536가구를 합쳐 총 1378가구에 달하는 규모로 지어졌다. 흥미로운 점은 입주민의 연령 분포에서 드러난다. 시니어주택은 60대 이상만 입주 자격이 주어지지만, 오피스텔 쪽의 사정은 달랐다. 단지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오피스텔 계약자 가운데 60%가 넘는 비율이 50대라고 한다. 직장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은퇴 이후의 삶을 한발 앞서 경험해보고 싶어 하는 ‘프리 실버’가 그 수요층이다. 출퇴근이 가능한 입지가 이 같은 선택을 뒷받침한다. 단지에서는 지하철 4호선 인덕원역과 신분당선 판교역을 오가는 자체 셔틀버스를 매일 운행하고 있어 판교 테크노밸리나 강남 업무지구로의 이동이 어렵지 않다. 단지 관계자는 “50대 프리 실버 입주자들의 경우 본격적인 시니어 생활에 진입하기 전 커뮤니티 시설과 헬스케어 인프라를 직접 체험해보려는 목적이 상당하다”면서 “오피스텔에서 일정 기간 거주한 뒤 시니어하우스 입소 요건을 충족하면 자연스럽게 전환하겠다는 수요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50대 주민 한 명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은퇴 이후 시니어타운에 들어갈지 고민만 하다가, 차라리 먼저 와서 살아보자는 생각으로 결정을 내렸다”며 “수영장이며 건강관리 프로그램이며 매일 빠짐없이 이용하다 보니 체력이 이전보다 나아졌고, 나이대가 비슷한 이웃도 자연스럽게 생겨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다”고 입주 후의 변화를 들려줬다.
그렇다면 이들의 발길을 사로잡는 요인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약 1만1500㎡, 평수로 환산하면 3500여 평에 이르는 입주민 전용 커뮤니티 ‘클럽 포시즌’이다. 직접 둘러본 이 시설은 어느 공간 할 것 없이 입주민들로 채워져 있었다. 실내 수영장에서는 물살을 가르며 아쿠아로빅 수업이 진행 중이었고, ‘맨즈 클럽’이라는 이름이 붙은 공간에서는 입주민 여럿이 당구 큐를 쥐고 연신 공을 굴리고 있었다. 벽 한쪽에는 당구 대회의 순위표가 빼곡하게 적혀 붙어 있었다.
시설의 스케일도 인상적이었다. 25m 길이의 3레인 실내 수영장에 비데풀, 실외 선큰 수영장까지 갖추었고, 220평 규모의 피트니스센터에는 러닝머신과 웨이트 기구가 빼곡하게 배치돼 있었다. 스크린룸이 딸린 골프연습장도 마련돼 있었다. 운동 뒤의 휴식까지 세심하게 고려한 흔적도 엿보였다. 호텔식 사우나와 전문 스파 시설을 결합한 ‘바디케어 존’은 입주민이 일상적으로 드나드는 공간으로 자리 잡은 모습이었다. 이 밖에도 프라이빗 영화관 ‘시네마룸’, 미술 강좌가 열리는 강의실, 악기를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도록 사실상 24시간 개방해둔 음악실 등이 입주민의 여가를 채우고 있었다.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입주민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커뮤니티 문화였다. 이 단지에서 자체적으로 결성된 동호회만 해도 14곳에 이른다. 골프와 당구, 탁구, 수영은 물론이고 통기타나 우쿨렐레 같은 악기 동호회, 보드게임이나 마작 모임까지 장르가 다채롭다. 주짓수 ‘브라운 벨트’ 실력을 갖춘 60대 입주민이 재능 기부 차원에서 새벽 6시 반부터 무료 주짓수 강좌를 열고 있다는 안내문이 커뮤니티 게시판에 붙어 있는 것도 눈길을 끌었다. 아침에는 단지 곳곳에서 기체조로 하루를 여는 입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고, 그 흐름을 이어 트로트 라인댄스와 시니어 요가가 일과처럼 진행된다고 한다. 연말이나 명절이 되면 손자녀와 함께 즐기는 원데이클래스와 윷놀이, 배드민턴 대회, 스크린골프 대결, 노래자랑까지 가족 단위 행사가 열려 세대를 아우르는 소통의 장이 펼쳐진다.
일상의 편의를 책임지는 생활 서비스도 호텔 수준에 견줄 만했다. 전담 영양사가 직접 관리하는 전용 식당이 단지 안에서 운영되고 있었는데, 입주민 개개인의 건강 상태를 고려해 저염·저당 건강식부터 계절별 특식까지 삼시 세끼를 빠짐없이 제공한다. 각 단지별 식당에는 주간 메뉴표가 미리 공개돼 있어 입주민이 식단을 견주어보고 원하는 쪽을 골라 먹을 수 있는 구조였다. 여기에 하우스키핑과 세탁, 컨시어지 서비스가 결합돼 장보기나 요리, 청소 같은 가사 노동에서 사실상 손을 놓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었다. 건강관리 체계도 눈에 띄었다. 단지 내 건강관리센터에는 간호사가 24시간 교대로 상주하며 입주민의 상태를 살핀다. 혈압과 혈관 건강 측정 기기가 상시 비치돼 있고, 측정 결과를 토대로 개인별 맞춤 식단을 제안하는 ‘챌린저스’라는 이름의 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었다. 3개월 동안 권장 식단을 실천하고 그 전후의 신체 변화를 추적하는 방식이다. 심폐소생술(CPR) 교육이나 건강 관련 강좌도 정기적으로 개설되고 있었다. 의료 접근성 측면에서도 호재가 예고돼 있다. 단지 바로 옆 학의동 일대에 250병상 규모의 종합병원이 유치된다는 발표가 나온 상태다.
비용 구조에서도 오피스텔 쪽의 매력이 부각된다. 시니어하우스의 경우 급식과 세탁, 청소 등 전반적인 생활 서비스를 모두 포함한 월 생활비가 300만원대에 책정돼 있지만, 오피스텔은 본인이 실제로 이용한 만큼만 비용을 지불하는 선택형 구조여서 월 100만~200만원대에도 충분히 생활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상훈 엠디엠플러스 개발부문 부문장은 “오피스텔은 시니어하우스처럼 풀서비스 기준으로 생활비가 산정되는 방식이 아니라, 입주민 스스로 필요한 서비스만 골라 쓸 수 있는 구조여서 경제적 부담이 한결 낮다”면서 “보증금 역시 5억~7억원대로, 인근 분당이나 과천 지역의 아파트 전세 시세가 9억~10억원대에 달하는 것과 비교하면 가성비 측면에서 분명한 우위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 단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건설·부동산업계 전반에서 시니어 주거 시장을 향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2024년 기준 국내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전체의 20%를 넘어서며 한국은 공식적으로 초고령 사회에 진입했다. 그러나 미국 자산운용사 인베스코에 따르면 한국의 시니어 하우징 보급률은 0.6%에 불과하다. 미국(11.1%)과 호주(5.9%), 일본(2.5%) 등과 비교하면 사실상 공급 사각지대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실제로 대형 건설사와 호텔 그룹, 자산운용사, 헬스케어 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체들이 시니어 레지던스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롯데건설은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에 810가구 규모의 하이엔드 시니어 레지던스 ‘VL 르웨스트’를 공급했다. 이 단지는 롯데호텔의 운영 지원과 다중 역세권 입지를 바탕으로 운영된다. 이곳에선 미술, 음악, 어학, 인문학, 디지털 활용 등 월별 문화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시네마, 노래연습실, IT 스튜디오, 아뜰리에, 라운지, 당구장, 그린하우스 등의 커뮤니티 시설이 마련돼 있다. VL웰니스클럽에는 피트니스, 사우나, 골프연습장, 퍼팅 라운지, GX룸, 필라테스 공간이 조성됐다. 입주민들은 단지 내 프로그램과 부대시설을 활용해 개인 일정을 관리하고 여가를 보낼 수 있다. 식사 및 생활 지원 서비스도 제공된다. 사전 예약을 통해 조식, 중식, 석식을 이용할 수 있으며, 영양사가 구성한 식단 및 간편식, 특별식 등이 준비된다. 하우스키핑, 정기 소독, 컨시어지 서비스를 통해 거주 편의성을 높였다. 건강관리 부문에서는 단지 내 건강관리센터를 통해 전문 상담을 진행하며, 이대서울병원과 연계해 연 1회 건강검진을 지원한다.
초고가 시장을 겨냥한 움직임도 감지된다. 올해 상반기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공급되는 ‘소요한남 by 파르나스’는 평균 보증금이 약 50억원에 달할 정도로 초고액실버 자산가를 겨냥해 개발부터 화제가 됐다.
단지는 지하 5층~지상 7층, 111가구 규모로 시공은 포스코이앤씨가 맡았으며, 조경·인테리어 등 각 분야의 대가들이 참여한다. 조경은 정영선 서안 대표가 맡는다. 자연 채광과 수공간이 어우러진 중정과 약 150m 규모의 전용 산책로 등을 조성한다. ‘종킴 디자인 스튜디오’가 담당한 실내 디자인은 2.7m의 천장 높이를 확보하고, 거실 폭은 약 5.5m로 설계해 넓은 공간감을 구현했다.
시니어 생활 패턴을 반영한 특화 설계도 눈에 띈다. 가구당 2대의 전용 엘리베이터를 배치한다. 야간 보행 안전을 돕는 센서형 ‘스텝 라이트’ 등 입주민을 배려하는 세밀한 장치도 선보인다. 이 단지의 또 다른 특징은 ‘호텔급 컨시어지 서비스’다. 5성급 호텔 운영 노하우를 가진 파르나스호텔과 헬스케어 시스템을 제공하는 차움·차헬스케어가 협업한다. 헬스케어 컨설턴트는 혈압, 혈당 등 데이터를 기반으로 건강 상태를 분석하고 맞춤형 식습관 가이드를 제공한다. 병원 예약 대행부터 검진 결과 통합 관리 서비스도 제공한다. 전용 식당에서 파르나스호텔 셰프가 선보이는 균형 잡힌 식단도 선택해 즐길 수 있다. 현대건설은 최근 프리미엄 시니어타운 ‘더클래식500’과 시니어 라이프케어 서비스 모델 개발 및 운영 협약을 맺고, 서울 강남구 압구정 3·5구역 재건축 단지에 하이엔드 시니어 서비스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HDC현대산업개발은 노원구 광운대 역세권에 조성 중인 복합단지 ‘서울원’에 768가구 규모의 시니어 레지던스 ‘파크로쉬 서울원’을 배치했다. 이 사업장은 주거 공간을 넘어 의료와 식사, 커뮤니티 등 생활 전반을 지원하는 웰니스 주거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실제 파크하얏트 서울, 안다즈 강남 등 5성급 호텔 운영 경험을 기반으로 한 컨시어지 서비스와 고메드갤러리아의 호텔식 식사 등 생활 지원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 서울아산병원, 노원을지대학교 병원과의 업무협약을 통해 진료 연계는 물론 응급 상황 대응까지 가능한 의료 지원 시스템도 적용된다.
단지 설계에는 유엔스튜디오(UN Studio)와 타운스케이프 등 세계적인 설계·조경 그룹이 참여했다. 여기에 파크 하얏트 서울과 파크 하얏트 부산, 중국 레이크뷰 리조트 호텔, 일본 브릴리아 마레 아리아케 타워 등에 참여한 글로벌 인테리어 컨설턴트 S.D.S 인터내셔널은 색다른 인테리어 설계를 선보일 계획이다.
[박재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