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철학자가 될 수 없는 시대는 길었다. 근대가 찾아오기 시작한 20세기에도 한동안 그랬다. 남성위주의 인류사는 여성에게 ‘철학자’라는 말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여성이 철학자가 되기 위해 맞닥뜨려야 할 모든 벽을 허물고 역사에 남은 여성 철학자가 있다. 한나 아렌트다. 독일 하노버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나 나치의 전체주의에 저항한 그녀는 20세기 지식인의 양심을 대표했던 망명 철학자이자 참여민주주의의 옹호자로 우리에게 기억된다.
▶여성은 철학자가 될 수 없는 시대가 있었다
그녀는 <전체주의의 기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인간의 조건>등 역저들을 통해 사회악의 실체인 폭력의 근원을 파헤쳤다. 그녀가 주창한 ‘악(惡)의 평범성’ 개념은 유명하다. 악은 의외로 평범한 곳에 평범한 얼굴로 존재한다는 그의 이론은 지식사회에 하나의 표지판이 됐다. 여성과 유태인이라는 두 개의 굴레를 안고 어린 시절을 보낸 한나 아렌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머리 숙이지 말고 저항하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가슴에 안고 살았다. 그러나 그녀의 철학적 여정은 쉽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그녀는 당대 최고의 철학자였던 마르틴 하이데거를 찾아 마부르크 대학으로 간다.
그곳에서 한나는 하이데거의 제자이자 애인으로 철학의 길에 들어선다. 철학을 하기 위해 하이데거의 그늘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녀는 결코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다. 독일에 나치정권이 들어설 무렵 아렌트는 하이데거와 헤어진다. 사연은 이랬다. 히틀러의 광풍이 독일에 몰아칠 무렵 독일 지식인 중에는 히틀러를 찬양한 사람들도 많았다. 오이겐 로젠슈토크는 국가사회주의 혁명이 독일의 꿈을 실현하는 시도라고 히틀러의 노선을 추켜세웠고 유태인인 펠릭스 야코비조차 히틀러를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티누스에 비교했다. 하이데거도 그중 한 명이었다. 하이데거는 ‘독일 존재의 완벽한 변혁’이라는 찬사를 히틀러에게 보낸다. 아렌트는 하이데거를 비롯한 지식인들의 이중성에 환멸을 느끼고 독일을 버리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소신을 위해 국가와 사랑을 동시에 버린 것이다. 독일을 탈출할 무렵 아렌트는 이런 글을 남겼다.
“결코 다시 오지 않으리라. 다시는 어떤 지적인 역사도 건드리지 않으리라. 이런 사회와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으리라.”
그녀는 철학의 바탕에 인간이 있어야 하며 그것은 그 어떤 원칙보다 중요하다고 믿었던 용기 있는 철학자였다.
한나 아렌트
▶총 대신 예술로 민주주의를 지킨 여배우
멜리나 메르쿠리는 <페드라> <일요일은 참으세요> 등 영화로 유명한 그리스 출신 세계적 여배우다. 1994년 작고한 그녀는 그리스인들에게는 영웅이다.
그리스 출신으로 세계적인 배우가 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큰 이유는 그리스를 위한 그녀의 희생 때문이었다. 그녀가 주도한 ‘엘긴 마블스’ 반환운동은 세계인들에게 문화재 약탈에 관한 새로운 의식을 심어주었다. 엘긴 마블스는 기원전 432년 그리스 아테네에 세워진 파르테논 신전에 있던 대리석 예술작품이다. 그러나 이 대리석 예술작품은 그리스가 아닌 영국 대영박물관에 있다. 어떻게 그리스 예술작품이 영국에 있게 됐을까.
18세기 그리스는 터키의 지배를 받았다. 당시 그리스 주재 영국 대사는 엘긴이라는 인물이었다. 파르테논 신전의 벽과 천장을 장식한 조각품을 본 엘긴은 군침을 흘렸다. 엘긴은 대사라는 신분과 뇌물을 이용해 이 예술품들을 영국의 자기 집으로 실어 나른다. 당시 그리스를 지배하고 있던 터키는 뇌물 몇 푼에 이것을 허가했다.
그리스인들은 자기들의 문화유산이 약탈당하는 걸 눈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엘긴의 집에 있던 예술품들은 엘긴이 파산하면서 대영박물관으로 팔린다.
메르쿠리는 바로 엘긴 마블스를 파르테논 신전에 다시 가져다놓아야 한다는 반환운동에 앞장섰던 것이다. 메르쿠리는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도 앞장섰다.
1960년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세계적인 스타가 된 그녀는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준비하다 군사쿠데타 소식을 듣는다. 그리스의 모든 민주주의는 정지됐다. 학교가 문을 닫았고, 모든 모임이 금지됐으며, 심지어 예금인출과 야간외출, 외국과의 소통이 모두 금지됐다. 메르쿠리는 그리스에서 자행되고 있는 인권유린을 전 세계에 알린다. 세계적인 여배우의 행동에 사람들은 동요했고 각국 정부가 그리스에 항의하기 시작했다. 분노한 군부는 그리스 내 메르쿠리의 모든 자산을 동결하고 그녀의 입국을 금지시켰다. 그 무렵 영국 언론이 메르쿠리와 인터뷰를 한다.
“멜리나 메르쿠리, 그리스의 내무장관 파다코스는 당신이 그리스 국민의 적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국적도 박탈되었습니다. 무슨 할 말 없으십니까?”
영국 기자의 질문에 메르쿠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리스인으로 태어났으니 그리스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파다코스 장관은 파시스트로 태어나 파시스트로 죽겠지요.”
7년의 세월이 지나 군사정권이 몰락하고 그리스로 돌아간 메르쿠리는 국회의원을 거쳐 그리스 최초의 여성장관이 된다.
멜리나 메르쿠리
▶한국인 최초 스웨덴 유학생 최영숙
최영숙은 꿈에 가까이 갔으나 그 꿈 때문에 너무 일찍 잠들어야 했던 여인이다.
1926년 가을 스톡홀름 기차역에 앳된 얼굴의 한 동양 여인이 내린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스물 한 살의 조선인 최영숙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의 삶은 동시대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남들보다 한 발, 아니 두어 발은 앞서 있었다.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최영숙은 완고한 부모를 설득해 이화학당에 입학한다. 유관순의 1년 후배였던 그녀는 일찍부터 조선의 처참한 현실에 눈을 뜬다.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에 간 그녀는 그곳에서 사회주의 사상과 페미니즘에 심취하게 된다.
스웨덴 여성운동가인 엘렌 케이의 페미니즘 책을 읽고 감명을 받은 그녀는 다시 혈혈단신 스웨덴 유학길에 오른다. 스웨덴 웁살라 대학 교수로 있는 엘렌 케이를 만나겠다는 순수한 신념이 그녀를 움직였으리라. 그러나 최영숙이 스웨덴에 도착했을 때 엘렌 케이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어렵게 떠난 길이었기에 다시 돌아올 수 없었던 최영숙은 공부를 계속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시골학교의 청강생으로 들어가 스웨덴어를 익히고, 밤에는 생계를 위해 자수를 놓았다. 천신만고 끝에 스톡홀름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한 그녀는 황태자도서관의 연구보조원으로 일하며 학교를 졸업했다. 워낙 명민했던 그녀는 동아시아 서적을 정리하고 분류하는 일을 하면서 인정을 받는다.
동양인 최초 스웨덴 유학생이었던 그녀는 황태자와 친분을 쌓는 등 그곳에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시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여걸답게 그녀는 러시아와 중국을 거쳐 들어오는 육로를 택하지 않고 세계일주 코스를 통해 귀국길에 오른다.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이집트 인도를 거쳐 귀국길에 오른 최영숙은 기선에서 로이라는 이름의 인도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인도에서 내린 그녀는 로이와 결혼해 그의 아이를 갖는다. 고국을 잊지 못한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귀국을 결행한다. 남편에게는 몇 달만 머물다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그러나 돌아온 조국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식민국가에 불과했다. 일어 중국어 영어 스웨덴어 등 4개 국어에 능통한 그였지만 당장 일자리를 찾기도 힘들었다. 이화학당 친구들의 도움으로 콩나물 장사를 하며 도서관을 드나들던 그는 확실한 병명도 모른 채 1932년 4월 홍제동 화장장에서 27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그녀가 화장장의 연기로 사라진 며칠 후 인도에서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됐다. 여비를 함께 부치니 빨리 인도로 돌아오라는 남편의 편지였다. ‘천재박명’이라고 했던가.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너무 시대를 앞서 갔다는 것밖에 없다. 그래도 그녀가 있었기에 지금 수많은 ‘또 다른 최영숙’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흑인 소녀
흑인차별이 심했던 1960년대 중반 어느 날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백악관 정문 앞에 한 흑인 가족이 서 있었다. 부모가 흰색 대리석 건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10살짜리 딸아이가 아빠를 쳐다보면서 말문을 열었다.
“아빠, 제가 안에 못 들어가고 밖에서 백악관을 구경해야 하는 건 피부색 때문이잖아요. 두고 보세요, 전 반드시 저 안으로 들어갈 거예요.”
그로부터 20여 년 후 조숙했던 흑인 소녀는 그 말을 현실로 만든다. 소녀의 이름은 콘돌리자 라이스였다. 1990년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수석 보좌관으로 당당히 백악관에 입성한 것이다.
흑인 최초로 미국의 국무장관을 지낸 라이스의 인생은 드라마다.
라이스는 1954년 인종차별이 극심하기로 유명했던 남부 앨라배마주에서 태어났다. 피아니스트가 꿈이었던 그녀는 흑인 최초로 버밍햄 음악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피아니스트의 꿈은 흑인에게는 너무나 먼 꿈이었다. 라이스는 방향을 바꾼다. 이른바 ‘소련학’의 대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녀는 덴버 대학과 노트르담 대학에서 정치학과 국제학을 공부하면서 소련 전문가의 길을 걸었고, 평생의 스승인 조지프 고벨 박사의 제자가 된다. 조지프 박사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의 아버지다. 라이스는 그의 도움으로 스탠퍼드 대학 정치학 교수가 됐고,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정계에 입문한 그녀는 탄탄한 지식과 명석함, 반대파를 끌어들이는 설득력으로 큰일을 처리하는 데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다. 책 중에는 그녀의 인생관을 알 수 있는 구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