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기생충>은 양가(兩價)적이다. 이중 가치가 있다는 얘기인데 매우 계급적이면서도 어떻게 보면 反계급적이어서 그렇다. 계급적 분노를 유발시키는 측면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순화시킨다는 의미의 얘기이다.
절대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7~8년 전에 인기를 모았던 청소년급 영화 <헝거게임>이나 <메이즈 러너> 등을 생각하면 된다. 2011년에 미국 월가(Wall Street)에서는 젊은이들이 주축이 된 대규모 시위가 계속됐었는데, 이른바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가 그것이었고 미국 국내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혁명 세대의 출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 금융권의 세습 자본주의적 행태에 대해 젊은 세대들의 저항이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의 사태를 정작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이 바로 할리우드 제작자들이다. 필름 메이커들은 ‘젊은 피’를 먹고 산다. 관객의 주도층이 1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의 ‘영 제너레이션’이라는 얘기다. 제작자들은 영화계에서 ‘혁명’이 상품이 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직감했다.
<헝거게임>과 <메이즈 러너>는 청소년 주인공(들)이 ‘지배세력=기득권 계층’과 싸워 혁명을 성공시키는 이야기다. 할리우드의 거부(巨富)들은 이런 영화를 만듦으로써 혁명(상품)으로 돈을 벌고 한편으로는 사회 내 ‘불온한’ 기운을 오락으로 상쇄시키는 효과를 가져 왔다. (젊은)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계급적 분노를 해소시켰다. 결국 영화가 사회 (자본) 개혁의 에너지가 순치(順治)되는 과정을 조성(혹은 조장)한 셈이다. 계급 문제가 상품화됐을 때 나타나는 이중적인 결과물이다. 그래서 교양 있는 자본가들, 혹은 그들 체제를 옹호하는 노련한 권력자들은 탄압보다 이러한 우회로를 선택한다. 이른바 합리적 보수주의의 정치체제를 경험하고 유지시켜 본 경험이 오랜 서구 국가일수록 이런 문화적 상품을 허용하는 경우가 많다. <기생충>같은 영화는 검열이 횡행하는 지금의 중국에서는 나올 수 없는 이야기이며 비정상적 정치 행태가 이어지고 있는 아베 하(下)의 일본에서는 불가능한 작품인 셈이다.
그렇다고 <기생충>이 꼭 저 두 작품과 같은 조류(潮流)의 영화라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봉준호가 자본가 편에 서서, 그 맥락을 다 내다보고 저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 역시 더더군다나 결코 아니다. 다만, 어찌 보면 저토록 ‘불순한’ 영화를 한국사회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사회 모두가 왜 이렇게까지 열광하게끔 허용하고 있느냐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하층 계급, 그리고 그 계급에 의한 사회적 전복(顚覆)을 그리고 있는 <기생충>이 어떻게 전 세계적인 아이콘으로 등극했는가에 대한 답으로서 생각해볼 만한 ‘꺼리’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그것은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국제영화상, 각본상 등 주요 4개 부문을 싹쓸이한 직후 세계 곳곳의 미디어에서 일제히 쏟아냈던 질문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과연 어떤 요인이 <기생충>에게 오스카 트로피를 몰아주게 했느냐 라는 것이다.
▶왜 <기생충>에 열광하는가?
물론 작품이 ‘굉장히’ 뛰어났기 때문이다. 봉준호의 영화적 어법은 그의 전작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다. 봉준호의 영화는 남녀노소, 세대별 구간을 금방 뛰어 넘는다. 심지어 가장 정통 마르크시스트 논법으로 돼 있다는 전작 <설국열차>같은 영화도 중학생 정도의 교양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도록 스토리텔링이 짜여 있다. 그의 영화는 가장 어려운 정치·경제·사회학적 담론(談論)을 가장 대중적인 어법으로 구사하고 설명해낸다는 특징을 지닌다는 평가를 받곤 한다. <설국열차>는 황금칸에서 꼬리칸으로 나뉘어져 있는 열차가 계속해서 뺑글뺑글 설원을 달린다는 얘기다. 그러던 어느 날 꼬리칸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들은 황금칸으로 진격한다. 마치 예전의 러시아에서 농노가 차르(러시아 황제)를 향해 낫과 곡괭이를 들었듯이. 마치 예전의 중국 농민들이 청 왕조의 지배체제에 반기를 들었듯이. 러시아의 레닌과 중국의 마오가 그랬듯이, <설국열차>의 주인공이자 리더인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사람들을 무장시켜 봉기(蜂起)로 이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설국열차>는 혁명 영화보다는 SF액션처럼 치장돼 있다. 그 분장의 두께가 꽤나 두껍다.
봉준호는 자신의 영화에서 정치적인 대사를 거의 쓰지 않으면서도 영화가 매우 정치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다. 예컨대 <괴물>은 한강에서 괴물이 나타나 사람들을 잡아먹는다는, 일본식 괴수 영화에서 출발하지만 ‘서울=한국’의 중심이라는 한강이 괴물이 근원지라는, 그래서 사회의 내부가 괴물처럼 변했다는, 한국사회 자체가 큰 위기에 빠져 있다는 정치적 각성에 동의하게 만든다. 그의 초기 메가 히트작인 <살인의 추억>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연쇄살인마의 이야기를 다루고, 시작은 여타 할리우드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의 분위기를 충실히 따르지만 그 과정과 결말은 사뭇 다르다. 1980년대 전두환 독재시절의 암울했던 한국의 사회 상황이 그대로 피부에 와 닿는다. 심지어 이 영화는 살인범을 잡지 못한다. 미국 할리우드 장르 영화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 구조인데 바로 그 같은 전개가 역설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오히려 더욱 리얼하다는 것이다.
<기생충> 역시 마찬가지다. 시작은 오히려 유쾌하고 가볍다. 평생을 무직자로 살아가는 가장을 둔 가정이지만 기택(송강호) 집안은 그리 좌절해 보이지 않는다. 아들 기우(최우식)와 기정(박소담)은 머리가 비상하고 영악한데 기택이 봤을 때 아들 기우는 늘 ‘계획이 있는 것’처럼 보여 왠지 안심이 된다. 실제로 기우와 기정은 한 사업가(이선균)의 집안에 차례로 가정교사와 미술선생으로 들어가게 되고 아버지인 기택을 운전기사로 고용하게 하는 데 성공한다. 심지어 엄마(장혜진)마저 원래 있던 가정부(이정은)를 몰아내고 대신 들여보내는 것까지 치밀한 계획으로 성사시킨다. 기택의 가족은 이 사업가의 집안을 서서히 ‘강탈’해 들어간다. 이른바 가족판 케이퍼(Caper) 무비, 혹은 하이스트(Heist) 영화의 전형이다. 그런 류의 영화처럼 코믹하고 유머러스하며 아이러니가 넘친다. 그러나 그 같은 초반의 분위기는 후반부 잔혹한 살인극의 대참사로 어마어마한 반전을 일으킨다. 대중들은 초반에 재미있어 하다가 후반에 경악한다. 비평가들은 초반에 다소 심드렁하게 지켜보다가 중반 이후 점차 열광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가 국내에서는 흥행 1000만, 전 세계적으로는 2000억원 이상 벌어들이는 흥행 대박을 터뜨리고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LA와 뉴욕비평가협회, 전미비평가협회, 골든글로브, 아카데미 등을 싹쓸이한 이유다. 대중과 평단 모두를 포획해 낸 것이다.
▶매우 계급적이면서 反계급적인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생충>은 지금 시대의 양가적 이중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주목 거리다. 한국의 극단적 양극화 상황을 고발하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런 영화를 자본주의적 투자 제작 마케팅의 과정을 통해 대중 한가운데로 착지(着地)시켰다는 점에서 실로 계급적 아이러니를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아카데미는 왜 <기생충>을 선택했는가. 그들 역시 ‘이민자=아웃사이더=미국 외 바깥의 누군가 혹은 무언가’로부터의 ‘침입’을 사실 내심으로는 전혀 반가워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혹시 ‘아카데미=백인 중산층 주류 사회=미국’은 <기생충>을 통해 제한된 혁명을 제안한 것이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트럼프가 야기한 극단의 사회 불만을 대형 폭발로 이어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기생충> 열풍은 과연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촉구하는 것인가, 아니면 위로부터의 혁명을 유도하려는 것인가.
영화 한 편이 던지는 질문은 종종, 꽤나, 묵직하다. <기생충>을 가지고 반지하 세트를 관광 상품화하겠다는 발상이 얼마나 유치하고 한심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지금, 진정으로, 그럴 때가 아닌 것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