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적으로 변한 군중은 오직 과장된 감정에만 감동한다. 군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은 웅변가는 과격하고 극단적인 확언을 거침없이 늘어놓아야 한다. 과장하고 확언하고 반복하되 이성적 사고에 의해 논증하려는 시도는 일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대중 집회 연설가들이 잘 알고 있는 연설 기법이다.”
지금으로부터 124년 전인 1895년 귀스타브 르 봉이 쓴 <군중심리(Crowd Mind)>에 나오는 구절이다.
르 봉의 지적은 SNS가 여론을 주도하는 지금 더욱 확실하게 와 닿는다. 지금은 그야말로 ‘군중의 시대’다. 감정에 치우친 사람들은 순식간에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순식간에 불특정 다수와 의기투합을 한 대중들은 사회 공동의 이슈를 만들어내고 더 나아가 정치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개인’ 일 때와 ‘군중’일 때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인다. 수소와 산소가 따로 따로 있을 때와 둘이 결합했을 때 극단적으로 다른 특성을 보여주는 것과 흡사하다. 수소와 산소는 모두 불이 잘 붙는 가연성 물질이다. 그러나 두 물질이 결합해서 생긴 물(H₂O)은 오히려 불을 끄는 구실을 한다. 따로 있을 때 불이던 것이, 모여 있으면 물이 되는 것이다.
인간사에서도 이 같은 현상은 일어난다. 바로 ‘군중심리’다.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놓고 볼 때는 극히 정상적이었던 사람들이 군중 속에 섞이면 평소와는 다른 이상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군중심리다.
나는 간혹 출장차 독일여행을 할 때마다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렇게 원칙적이고, 깔끔하며 예의바른 독일인들이 어떻게 불과 반 세기 전에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 동조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모든 독일인이 유대인 학살에 동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당수 독일인이 나치 전위부대 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반 세기 전 이 같은 독일인들의 행동에는 ‘군중심리’ 가 깔려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같은 사례는 역사나 일상 속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보스니아 내전 때 잔혹하게 인종청소를 자행한 세르비아 민병대 대원 중에는 엘리트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내전이 일어나기 전 평범한 교사나 의사였던 사람들이 군중에 섞이면서 그 같은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바로 옆집 이웃을, 초등학교 동창을 상대로 그런 폭력을 자행할 수 있었을까.
귀스타브 르 봉은 이렇게 극단적으로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조건에 반응할 뿐이다.”
사실 인간은 결코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이지 않다. 단지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이 되려고 할 뿐이다. 특히 급박한 순간이거나 자신의 이익이 직결되어 있는 문제가 발생할 때 인간은 결코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이지 않다.
“존재가 인식을 규정한다”는 말이 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존재하느냐에 따라 인식도 달라진다는 말이다. 살면 살수록 느끼지만 맞는 말이다.
쉽게 말해 프랑스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프랑스인의 인식을 갖게 되고, 돈을 많이 번 사람은 자연스럽게 부자의 인식을 갖게 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미국의 과학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베레비는 자신의 책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에서 한 술 더 떠 “인간은 서로 비슷한 사람들이 한패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패가 되고 나서 비슷해진다”고 단언한다.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논리다.
집단의 논리가 한 명 한 명이 가지고 있는 도덕성과 교양을 폐기처분해버리고 그들로 하여금 엄청난 악(惡)에 가담하게 만드는 경우는 의외로 흔하다.
광적인 축구팬들인 훌리건들도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을 찾기 전에는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과 “멀쩡한 사람도 예비군복만 입으면 이상해진다”는 한국사회의 속설도 이 같은 논리를 뒷받침해준다.
베레비는 “당신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은 바로 당신이 속한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18세기 말 인디언에게 포로로 붙잡혔던 찰스 존스턴이라는 백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형적인 백인이었던 존스턴은 쇼니 인디언 부족에게 한 명의 흑인과 함께 포로로 붙잡힌다. 그때를 존스턴은 이렇게 회상한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가까이하지도 않았을 검둥이가 내 동료이자 친구가 되었고, 내 마음은 아주 편안했다.”
공식적인 인종차별이 엄존하던 시대 ‘백인과 흑인’이라는 무리짓기에 익숙했던 존스턴에게 흑인은 같은 사람이 아닌 다른 종에 불과했다. 그러나 ‘포로와 감시자’라는 새로운 집단분류에 던져지면서 인식과 가치관이 돌변한 것이다.
베레비는 인류학에서 신경과학까지 여러 분야의 논리들을 근거로 이 같은 부족적(Tribal) 감각이 삶의 모든 국면에서 표현되는 인간 본성의 일부라고 말한다. 따라서 부족적인 감각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우리 사회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한다.
베레비는 자신의 책에서 중요한 경고를 한다. 그는 대중들이 절대적이라고 믿고 사는 무리의 정체성이 사실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유행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200년 전만 해도 이탈리아 사람은 즉흥적이고, 터키 사람은 엄격하고, 영국 사람은 매너가 있다는 속설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지금 이런 말을 하면 웃음거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과학적으로 혹은 통계학적으로 틀린 생각이기 때문이다. 영국 사람이 즉흥적일 수도 있고, 이탈리아 사람이 엄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집단 논리를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믿는 것 자체가 오류다.
가장 중요한 코드는 자기가 속한 무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머릿속에 있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존경받는 지식인이나 영웅들은 바로 무리를 뛰어넘은 사람들이었다. 무리의 집단의식을 뛰어넘어 보편적이고 과학적인 판단을 실천한 사람들이 결국 인류의 스승으로 남을 수 있었다.
인간은 본능처럼 무리를 짓고 산다. 그러나 그 무리는 영원하지 않다. 부자였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가난뱅이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은 늘 여러 무리를 옮겨 다닐 수밖에 없다.
무리의 논리에 매몰되지 않는 일. 무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해서 말하는 일. 그것이 초연결사회를 사는 현대인에게 주어진 숙제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