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헝가리를 짝사랑했던 작곡가 바르토크…민요 채집해 세계적 음악으로 승화 정작 고국에선 외면당해
입력 : 2014.08.07 16:51:21
제임스 개피건이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이 바르토크의 이상한 중국의 관리 모음곡을
연주하고 있다.<사진제공=서울시립교향악단>
헝가리 작곡가 바르토크(1881~1945)는 유년시절 병약한 아이였다. 태어나자마자 습진과 폐렴에 시달렸고 5세에는 척추굴곡 진단을 받았다. 이 때문에 밖에서 또래들과 뛰어놀지 못하고 집 안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자랐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직접 피아노를 가르쳤다. 두 사람은 네 손을 위한 피아노곡을 즐겨 쳤다.
아들은 천재성을 보였다. 7세에 춤곡을 작곡했을 정도다. 어머니는 그 곡을 악보에 옮겨줬다.
어린 바르토크는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으면서 식사하는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도 먹을 수 있나요?”라고 질문할 정도로 음악을 사랑했다.
그러나 농업학교 교장이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집안 살림이 위축됐다. 어머니는 피아노 레슨을 하면서 아들을 뒷바라지했다.
그 헌신 덕분에 바르토크는 11세에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 데뷔 무대에 선다. 자선 공연에서 자작곡 ‘다뉴브강’을 연주했는데, 물줄기가 흑해까지 도달하는 과정을 선율에 녹여 극찬을 받았다.
유년시절 집 안에서 병치레를 많이 한 탓인지 그는 자연을 동경했다. 벌레를 수집해 알코올이 든 플라스크 병에 담아 두기도 했다.
여행을 좋아했던 그는 언어에 능통했다. 헝가리 마자르어와 독일어, 라틴어, 영어, 불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유럽 민요를 채집하면서 슬로바키아어와 루마니아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터키어도 배웠다.
민요에 대한 관심은 부다페스트 왕립 음악원 재학 시절에 생겼다. 헝가리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자연스레 자국 문화를 깊이 연구하게 됐다. 마자르 농민음악뿐만 아니라 루마니아와 슬로바키아, 터키, 북아프리카 아랍 민족의 농민음악까지 조사해 과학적으로 분류했다. 무려 9년 동안 에디슨 축음기를 둘러메고 오선지를 쥔 채 전국을 헤맸다. 악보에 수없이 수정한 흔적이 남아 있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소박한 농민 음식을 먹고 광활한 땅을 옮겨 다니면서 채집한 민요 1만4000곡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세상에 내놓았다. 1906년 작곡가 코다이(1882~1967)와 합작으로 헝가리 민요 20개도 발표했다. 기성 음악계에서는 천박하다고 손가락질했지만 그는 어떤 음악이든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았다.
그의 교향시 ‘코슈트’(1903년)도 민족주의 색채가 강했다. 오스트리아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지만 실패한 독립전쟁 영웅 라요쉬 코슈트의 생애를 담았다. 교향시를 확립한 독일 작곡 거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의 영향을 받은 대작이다.
1904년 ‘코슈트’는 필하모닉 소사이어티 콘서트에서 연주될 예정이었으나 취소될 뻔 했다. 오스트리아 국가 ‘신이여 지켜 주소서’를 고의적으로 왜곡했다는 이유로 오스트리아 트럼펫 주자가 연주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음악회가 열리기는 했지만 극찬이 나오지 않았다.
바르토크는 애국심이 넘쳤지만 정작 고국의 푸대접을 받았다. 부다페스트에서 콘서트 음악을 활성화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아 절망했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헝가리 황소들, 즉 헝가리 대중들에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렵니다”라고 언급했을 정도로 분노가 컸다.
현(絃)을 끊어놓을 정도로 날카로운 선율
고국에서 외면 받았지만 세계 음악가들은 그를 인정했다. 이탈리아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부조니(1866~1924)는 바르토크의 14개 바가텔 악보를 본 후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출판사에 추천장을 써 줬을 정도로 아꼈다. 하지만 출판사는 대중들에게 너무 어렵고 현대적이라는 이유로 출판을 거절했다.
실제로 그의 음악은 쉽지 않았다. 날카롭고 거친 불협화음을 즐긴 그의 작품을 연주할 때 현악기 줄이 ‘툭’ 끊어질 때가 많았다. 바로 강한 피치카토(pizzicato) 주법 때문이다. 피치카토는 활을 사용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현(絃)을 퉁겨 연주한다. 바르토크는 현이 악기 지판(指板)에 수직으로 강하게 부딪힐 정도로 온 힘을 다해 튕기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현을 혹사시키다 보면 조율한 음정이 불안해진다. 더욱이 바르토크 작품은 활로 거칠게 현을 긋는 대목이 많아 줄이 끊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한다.
만약 바르토크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을 연주할 때 독주자의 바이올린 현이 끊어졌다면 어떻게 될까. 독주자는 악장의 바이올린을 빌리고, 악장은 부악장의 것을 ‘빼앗아’ 연주하다 보면 독주자 악기가 맨 뒷줄 단원에게 가 있는 경우도 있다. 줄 끊어진 바이올린을 든 단원은 어쩔 수 없이 연주 시늉만 하는 ‘핸드 싱크’를 해야 한다. 그러다 연주가 잠깐 중단되는 악장 사이에 호주머니에서 여분의 줄을 꺼내 급하게 교체하기도 한다.
바르토크의 선율이 유난히 날카로운 이유는 대중에 영합하지 않은 작가 정신과 고집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고국 음악계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했지만 꿋꿋하게 자신만의 예술 철학을 지켜나갔다.
그는 천대받는 집시 음악의 소박한 선율을 살리고 민족성을 초월해 세계 각국의 음악 언어를 발굴했다. 또 황금분할에 기초한 기하학적 화성구조를 사용해 대담한 화성과 불협화음, 불규칙한 리듬을 사용하는 ‘음악 혁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너무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음악은 청중들에게 낯설었다. 파리의 어느 비평가는 “더러운 흙발로 살롱을 더럽혔다”는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시대와 타협하지 못하고 외로운 창작의 길을 걸었던 바르토크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도 고독한 영혼의 울림이다. 1937년 작곡한 이 작품은 다양한 화성과 음계를 사용해 색채 효과가 뛰어나며 구성미가 긴밀하다.
피아니스트 표트르 안데르제프스키와 서울시립교향악단이
바르토크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하고 있다. <사진제공=서울시립교향악단>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던 바르토크
바르토크는 눈 감을 때까지 세상과 타협하지 못한 작곡가였다.
음악과 인간을 사랑했던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정이었다. 특히 조국 헝가리가 히틀러에게 짓밟히자 분노가 폭발했다. 유대인 학살에 대한 항의 표시로 독일에서 자신의 작품이 연주되는 것을 거부했다. 방송 전파를 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진 후 나치스가 보낸 사상 검증 질의서도 외면했다. 당연히 괘씸죄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치스의 따가운 감시와 견제를 견디지 못해 망명을 선택했다.
1940년 부다페스트에서 고별 콘서트를 연 후 20세 연하 아내 디타 파스토리와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다행히 뉴욕 컬럼비아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로 재직하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2년 후 계약 기간이 끝나자 생계가 막막해졌다.
너무 고지식한 게 또 문제였다.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지인들이 도움을 주려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아들이 보내준 돈까지 그대로 모아두었다 돌려줬을 정도로 자신에게 엄격했다.
하지만 갈수록 상황은 악화됐다. 1943년 하버드대학에서 강연을 하다 쓰러졌는데 진단 결과 백혈병이었다. 투병 중에도 그는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과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등을 작곡해 미국 음악계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작품이 빛을 보기 시작한 반면에 생명은 꺼져가고 있었다. 1945년 피아노 협주곡 3번과 비올라 협주곡을 작곡하던 중에 쓰러졌다. 뉴욕 맨해튼 57번가 웨스트사이드병원으로 옮겼으나 9월 26일 눈을 감았다.
병원에 실려 가기 직전에도 그는 침대 위 여기저기에 악보들을 흩뜨려 놓은 채 마지막 몇 마디를 채워 넣느라 혼신의 힘을 다했다고 한다. 그 주변에는 약병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아내에게 바치기 위해 쓴 유작 피아노 협주곡 3번 마지막 13소절은 미완으로 남았다. 죽음을 예감했는지 마지막 마디에 헝가리어로 ‘끝’이라고 써놓았다.
그의 제자인 티보르 셀리가 완성시킨 이 곡은 피아노의 아름다운 음색을 잘 살렸다.
날카롭던 바르토크의 선율도 많이 누그러졌다. 헌신적으로 간병해준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다 보니 가슴이 훈훈해진 모양이다. 작곡가 모차르트(1756~1791)의 선율처럼 간결하고 투명하다. 또 예전 작품보다는 덜 난해하고 친숙하다. 물론 지난 날 그를 연상시키는 신선한 악상이나 원시적인 거친 음도 충분히 담겨 있다.
또 다른 유작인 비올라 협주곡은 스코틀랜드 출신 비올리스트 윌리엄 프림로즈의 요청을 받은 작품이었다. 피아노 협주곡 3번은 거의 완성됐지만 비올라 협주곡은 시작 단계였다.
생전에 바르토크는 이 곡에 대해 “바이올린 협주곡보다 더 투명한 오케스트레이션을 사용했다. 비올라 특유의 음울하고 남성적인 성격이 작품 전체에 영향을 준다. 기교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거의 틀림없이 일부 패시지들은 연주가 불편하거나 불가능하다고 판명날 것 같다”고 설명했다.
결국 티보르 셀리가 작품을 마무리했다. 1949년 프림로즈는 안탈 도라티의 지휘 아래 이 곡을 초연했다. 하지만 셀리의 생각을 너무 많이 집어넣어 바르토크적이지 않은 관현악 편성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1995년 바르토크의 아들 페테르가 아버지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새로운 버전을 만들었지만 이 또한 인정받지 못했다. 헝가리 비올리스트 사바 에르델리의 버전이 좀 더 혁신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뉴욕에서 숨을 거둔 바르토크의 유해는 1988년 7월 7일에야 부다페스트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의 고향인 토론탈은 현재 루마니아 땅이다.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작곡가의 음악이 어쩐지 마음을 후벼 파듯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