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돔 사용을 거부하는 남성과는 과감히 헤어지라고까지 말하는 극단적인 성 전문가들이 있다. 그만큼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한 여성의 정신적·육체적 폐해가 크다는 이야기일 테다. 또 이런 무식한 권고가 나올 만큼 많은 남성들이 피임에 비협조적이라는 반증일 것이다. 대부분이 아니라 거의 모든 남성들이 콘돔에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불법으로 규정한 낙태 수술이 연간 100만 단위 이상 행해지는 나라에 살고 있으면서도 불편하고 쾌감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콘돔을 멀리하는 남성들은 여성이 겪는 임신 공포나 그로 인한 고통을 외면할 준비가 충분히 돼 있다고 간주된다.
처음에는 여성도 절대 콘돔 없이 관계할 수 없다고 버티다가 그놈의 정 때문에 완강히 들이대는 남성을 밀쳐내지 못한다. 사랑하는 상대의 몸이 달아있는데 콘돔이 없다고 야박하게 밀쳐내기가 쉽지 않다. 결국 질 안에 절대 사정하면 안 된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선에서 적당히 합의를 하고 콘돔 없는 관계에 돌입한다. 여기에는 ‘설마’ 하는 여성의 안일한 계산도 깔려 있다.
하지만 질외사정을 불임시술, 먹는 피임약, 자궁 내 장치, 콘돔 등 기타 피임법과 비교했을 때 피임 실패율이 가장 높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다. 아무리 남성이 훌륭히 페니스를 통제해 사정 직전 페니스를 질 밖으로 번개같이 빼낸다 해도 사정 직전에 흐른 쿠퍼액에 이미 100만 마리 이상의 정자가 들어있다. 쿠퍼액이 뭔지 인터넷 검색으로 지식을 습득한 여성들의 고민은 더해진다. 아는 게 병이 되는 순간이다. 질외사정으로 원치 않는 임신을 해 낙태라도 했던 쓰디쓴 경험이 있는 여성이라면 더욱 임신에 대한 공포가 심하다.
장갑 끼고 코 파 보라고?
대부분의 남성들이 콘돔 사용을 기피하는 가장 큰 이유가 감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일전에 콘돔을 여러 겹 이용해 성감을 증대시킨다는 커플을 소개한 바 있다. 하지만 이는 굉장히 드물고 희박한 케이스다. 대개는 느낌이 좋지 않고 귀찮다며 콘돔 사용을 기피한다. 종종 종교적인 이유로 싫어하는 경우도 있다.
남녀의 사랑행위를 어찌 질내 삽입의 촉감만으로 등급을 매길 수 있으랴. 삽입성교 직전에 수많은 교감과 애정과 스킨십이 수행되는데도 제대로 느낄 수 없기 때문이라는 한마디로 일축하니 여성의 몸으로 페니스 끝의 그 미묘한 감각 차이를 모두 이해할 순 없으나(어떤 남성들은 장갑 끼고 코 파 보라고, 얼마나 불편하겠냐며 우스갯소리도 한다) 콘돔 한 겹 차이가 뭐 그리 절대적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피임이 절실한 미혼 여성들이 선택하기에 가장 적절한 피임법이 콘돔이다. 그럼에도 미혼 여성 A씨는 자신의 남친이 기꺼이 콘돔을 스스로 착용하는 유일한 경우는 자기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사정이 빨라 어이없게 끝날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롱○○콘돔뿐이라고. 조루라 구박한 적도 없거늘 여친의 생리주기를 살펴 위험 시기에는 조심해주는 진정한 배려는 할 줄 모르고 오로지 섹스 타임을 늘리는 마취제가 발라져 있는 롱○○콘돔으로 힘쓸 생각만 하는 남친에게 전혀 몰입이 안 된다고 한다.
또 다른 미혼 여성 B씨는 하도 남친이 콘돔 없이 시도 때도 들이대기에 다 받아주는 편인데 질외사정 후 석 달간 생리를 안 해서 가슴 졸인 경험을 했다. 다신 이런 아찔한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아 콘돔을 가방에 준비하고 다녔더니 남친이 기분 나빠 하더란다. 갑갑함을 감수하기도 싫고 불미스런 일이 생겨도 자기 몸 상할 일도 아니면서 여성이 스스로를 방어하겠다는데 그게 왜 기분이 나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콘돔 거부 남성에겐 섹스 거부 보복
기혼 여성의 피임 걱정도 만만치 않다. 요즘은 치밀한 계산을 해야 원하는 시기에 밥줄 끊어지지 않고 출산을 할 수 있는 시대다. 그런데 출산 전 부부의 피임은 또 온전히 여성의 몫이기 십상이다.
결혼 2년차 여성인 P씨의 속사정을 들어보면 임신을 앞두고 있는 기혼 여성의 고민을 제대로 짚어볼 수 있다. P씨는 질외사정으로 피임 중이다. 직장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임신은 생각할 수도 없기에 아이는 나중에 여유가 되면 갖든지 아니면 자식이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제발 남편이 알아서 척척 피임을 해주면 고맙겠는데 그는 콘돔을 사용하면 느낌이 안 온다고 번번이 P씨의 요구를 무참히 묵살한다. P씨는 바빠 죽겠는데 피임약 같은 걸 챙겨먹을 시간도 없고 그렇다고 몸에 인위적인 피임시술을 하고 싶지도 않아 고민한다. 질외사정이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배란일 즈음에 사정조절이 안 돼 실수로 질내사정이 되면 ‘혹시라도 임신이 됐을까’ 하는 불안감이 하늘을 찌른다. 사후 피임약은 병원에서 처방받아야 하니 병원가기 귀찮아 다음 생리까지 기다리며 마음을 졸인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하며 주문을 건다. 그래서 P씨는 요사이 부부관계가 꼭 ‘러시안룰렛’이라도 하는 기분이란다. 정관수술을 하더라도 나중에 복원수술을 하면 되니 남편에게 정관수술을 좀 권해달라고 필자를 찾았던 것이다.
비뇨기과 의사 입장에선 정관수술이 가장 간단하고 영구적인 피임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더 이상 자녀가 필요치 않은 부부들에게 해당되는 이이야기다. 복원이 100% 된다는 보장이 없다. 콘돔도 쾌감을 감소시킨다며 사용하지 않는 남편인데 선뜻 수술을 결정할 것 같지 않다는 설명도 해줬다. <디어헌터>라는 영화에서 ‘러시안룰렛’ 장면이 인상 깊었다며 그녀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임신을 원하지 않는다면 남성이 콘돔을 사용하거나 여성이 피임약 복용이나 피임시술을 받아야 할 것이다. 파트너와 잘 상의해 피임법을 결정할 수밖에는 없다. 느낌이 안 와서 피임하기 싫고 시간이 없어서 피임이 귀찮다면 섹스는 그야말로 ‘러시안룰렛’이 된다. 안전하고 행복하게 섹스를 즐기기 위해서는 서로 한 발씩 양보하고 협력해야 한다.
P씨 진료는 20년도 더 된 전쟁영화 '디어헌터'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됐다. 이 영화를 통해 러시안룰렛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됐다. 전쟁 이후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어떻게 육신과 정신을 피폐하게 하는지 보여준 영화였다. 세 명의 죽마고우가 베트남전에 참전하고 베트콩의 포로가 되면서 잔인한 고문과 죽음의 확률게임 러시안룰렛에 발을 들인다. 이성을 잃어갈 쯤 두 친구는 탈출에 성공, 나머지 한 친구는 실종된다. 이후 거액의 도박액에 이성을 잃고 죽음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친구와 조우하며 전쟁의 참상을 알게 된다.
'디어헌터'는 나에게 또 다른 인연이 있다. 영화 도중 흐르던 존 윌리엄스의 기타연주곡 'Cavatina' 때문에 의치대 연합 클래식 기타 동아리에 들기도 했다. 꼭 내 손으로 쳐보리라 하며 말이다. 물론 기타 실력이 더 늘지 않는다는 좌절감에 본과 1학년 때 합주와 듀엣을 끝으로 기타를 들지 않았지만.
지난 한 달은 환자로 인해 연상된 ‘러시아룰렛’ 주간이었다. 급기야 글을 쓰는 오늘은 온종일 리한나의 '러시안룰렛'을 듣고 흥얼거렸다.
노래의 후반부 ‘But it’s too late, and you can see my heart bleeding(하지만 너무 늦어버렸어, 보이니 내 심장이 피 흘리고 있는 것을)’이라는 가사는 무모한 사랑의 도박을 은유한다. 생각할 시간조차 없이 돌아가는 러시안룰렛의 긴장감이 그대로 느껴진다. 말도 못하게 허무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즐거워야 할 섹스가 긴장과 불안의 러시안 룰렛 같이 느껴지면 끝장이다. 남성이 콘돔을 거부하면 당당히 섹스를 거부해야 한다. 상대가 아무리 양심적이고 훌륭한 남성이라도 나와 살을 섞는 그를 믿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면 그것만큼 슬픈 일이 없다.
섹스는 의지나 요행으로 결과가 아름답게 꾸며지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행해 결과가 드러나는 것이다. 스스로 몸에 주인답게 움직여야 한다. 설마 했던 몇 번 중 한 번이 임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