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강국 프랑스. 그것도 심장부 파리 한복판에서 상상하지 못한 일들이 벌여졌다. 동방신기, 소녀시대, 슈퍼주니어, 샤이니, f(x) 등 SM엔터테인먼트 소속 5개 그룹은 6월10일과 11일 ‘르 제니트 드 파리(Le Zenith de Paris)’ 공연장에서 진행된 ‘SM타운 라이브 월드 투어’를 통해 한류의 유럽 진출의 서막을 알렸다.
SM 5개 팀은 3시간30분 동안 44곡의 노래를 립싱크 없이 불렀다. 핀란드, 스웨덴, 독일, 스페인, 영국, 덴마크 등 유럽 각지에서 몰려든 1만4000여 명의 한류 팬은 열광했다. 그들은 태극기와 한글이 새겨진 옷을 입고 ‘한국어’ 노래를 따라 부르며 함께 춤을 췄다.
케이팝(K-POP)을 둘러싼 한류의 실체는 분명했다. 한류 스타들이 파리 드골공항에 도착하자 현지 팬 1000여 명이 몰려들기도 했다. 티켓은 발매 15분 만에 7000여 장이 동이 났다. 당초 하루 일정으로 예정됐지만 극성팬 성화에 못 이겨 공연 일정이 늘어났다.
그러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의 주류 사회를 움직이려면 아직 멀었다. 유럽의 젊은이들이 케이팝과 한국 영화, 드라마에 빠져들고 있지만 ‘그들만의 문화’에 한정돼 있다.
프랑스 대표 일간지 '르몽드'도 케이팝 열풍에 담겨진 문제점을 꼬집었다. 지난 6월11일자에서 “음악을 수출품으로 만든 제작사의 기획으로 길러진 소년과 소녀들이 긍정적이며 역동적인 국가 이미지를 팔고자 하는 한국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파리 공연 현장과 한류 팬들의 반응, 케이팝의 경쟁력, 과제 등을 짚어봤다.
케이팝을 즐겨라
지난 6월 10일 2회 공연 엔딩무대 때 눈물 흘리는 유럽팬
6월10일 오후 7시 ‘르 제니트 드 파리’ 공연장. 7000여 명의 팬은 객석에서 자연스럽게 파도타기를 하면서 흥을 북돋았다. 색색의 야광봉을 흔들고 발을 구르며 공연의 개막을 재촉했다. 걸그룹 f(x)가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환호성을 받으면서 무대에 올랐다. 데뷔 히트곡 '라차타', 'chu~' 등으로 화려한 무대를 선보였다.
남성그룹 샤이니가 나오자 금발의 소녀팬들은 ‘와’ 하며 함성을 쏟아냈다. 파워풀한 댄스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관객들은 '누난 너무 예뻐', '링딩동' 등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면서 온 몸으로 공연을 즐겼다. 리더 온유는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의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불러 가창력을 과시했다.
소녀시대 / 슈퍼주니어 / 동방신기
소녀시대는 성숙한 여인의 향기를 물씬 풍기면서 섹시 카리스마를 발산했다. 멋진 각선미를 뽐내며 '소원을 말해봐', 'Gee' 등의 히트곡으로 섹시와 귀여움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공연을 펼쳤다. 유럽 남성팬들은 공연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을 질러댔다.
또한 유명 팝가수의 패러디와 댄스 퍼레이드가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슈퍼주니어의 희철, 신동, 이특, 은혁이 레이디 가가와 비욘세를 패러디해 웃음을 선사했다. ‘여러분의 친구가 되겠다’를 프랑스어 및 영어 자막과 함께 수화로 표현하기도 했다.
슈퍼주니어의 인기도 대단했다. '미라클', '댄싱 아웃', '돈돈' 등의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감 넘치는 보컬과 표정으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관객들은 노래가 나올 때마다 한국어 가사를 따라 불렀고 '쏘리 쏘리' 댄스는 과반수 관객이 따라했다. 공연이 절정에 다다르자 동방신기의 유노윤호와 최강창민이 공연장 천장에서 와이어에 매달린 채 등장했다. 동방신기는 섹시한 웨이브 댄스와 카리스마로 무대를 단숨에 장악했다.
유럽 한류 팬 총집결
“휴가 내고 뮌헨에서 소녀시대 윤아를 보기 위해 왔어요”(세바스찬·23·독일) “내게는 꿈같은 순간입니다”(요한나·20·스웨덴) “케이팝이 너무 좋아요. 어느 나라 가수와 비교할 수 없어요” (앨리스·19·프랑스)
유럽 각국에서 몰려온 팬들은 공연장 안팎에서 케이팝에 흠뻑 취했다. 공연 시작 4~5시간 전부터 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슈퍼주니어의 '쏘리 쏘리'가 흘러나오자 우르르 모여 노래를 함께 따라했다. 소녀시대의 무대 복장을 똑같이 흉내 낸 의상을 입고 활보하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국가, 언어, 인종의 장벽은 어디에도 없었다. 노르망디에서 차를 몰고 왔다는 줄리아(23)는 “3년 전부터 케이팝에 빠졌다. 리듬이 매우 좋고, 후렴은 따라 부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스위스 출신의 앨리시아(19)는 “스펙터클한 무대에 감동받았다”며 “원더풀! 원더풀!”을 연신 외쳤다. 이번 공연을 지원한 한국방문의해위원회도 프랑스에 잘 알려진 애니메이션 캐릭터 뽀로로 인형을 등장시켜 한국 알리기에 주력했다.
공연 내내 기립해 환호성을 지르다 탈진한 관객들도 속출했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아쉬움에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했고 일부 팬은 울먹이기도 했다. 리용에서 왔다는 마리아(20)는 “지난 2년간 매일 들었던 노래의 가수를 직접 보니까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왜 케이팝에 홀렸나
전문가들은 ‘케이팝 인베이젼’이 국내 기획사들의 세계화 전략과 유튜브와 아이튠즈 등 디지털 자산으로 인해 가능했다고 입을 모았다.
소녀시대, 동방신기 등 SM엔터테인먼트의 가수들은 곡 작업의 절반 이상을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출신의 작곡가와 함께한다.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는 유럽 작곡가 그룹 ‘디자인 뮤직’. f(x)의 'chu'는 스웨덴, 동방신기의 '주문-미로틱'은 덴마크 작곡팀의 작품. 북유럽 최고 작곡가들은 글로벌 음반시장에서 ‘흥행 보증수표’로 통한다. 소녀시대의 '런 데빌 런'은 미국(busbee)과 영국(Alex James), 스웨덴(Kalle Engstrom) 등 다국적 작곡가들의 합작품이다.
여기에 세계 음악시장의 주무대인 미국 안무가의 힘도 더해졌다. 샤이니는 저스틴 팀버레이크, 힐러리 더프 등의 안무를 맡은 미샤 가브리엘에게 춤을 배웠다. 김영민 SM 대표는 “유럽서 만든 곡이 미국 시장서 터지는 게 기본 공식”이라며 “미국에 이어 유럽, 아시아, 남미 시장으로 확산된다”고 말했다. 1970년대 스웨덴의 전설적인 그룹 아바가 미국 시장 진출 때부터 ‘북유럽 작곡+미국 안무가’라는 공식이 생겼다.
SM은 여기에 한국의 아이돌을 접목시킨 것이다. 한국형 트레이닝 시스템은 기획사에서 선발한 아이돌에게 3~5년간 고강도 훈련을 통해 댄스·가창력·퍼포먼스 등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추게 한다. 한 연예기획사 대표는 “현재 국내 매니지먼트사의 기업형 트레이닝 시스템은 세계적인 수준이다”면서 “전 세계 어디에서도 5명 이상의 멤버가 똑같은 안무를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노래까지 라이브로 부르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SM의 경우 “연간 한 멤버당 2000만원, 5명이면 대략 5억원이 투자된다. 여기에 숙소 구입비, 음반과 뮤직비디오, 의상 제작비까지 포함하면 데뷔 전 15억~20억원이 들고 이후 생산하는 콘텐츠 및 마케팅 비용도 추가된다”고 소개했다. 동방신기는 총 80억원짜리 프로젝트였다. 그는 “아이돌 육성은 5명 중 1명이 성공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며 “미국과 일본의 경우 이 같은 리스크를 안고 아이돌을 키우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최근에는 세계시장 공략을 위해 외국어에 능통한 다국적 멤버를 구성한 점도 주효했다.
이번 파리 공연 티켓 값은 최저 51유로에서 최고 111.5유로였다. 청소년들에게 부담이 적은 편이어서 한류 팬의 동참을 유도하는 데 일조했다.
SM의 글로벌 비즈니스 모델은 디지털 시장을 목표로 삼고 있다. 디지털 음원 매출과 광고시장을 노리는 것. 예전 음악시장에서는 CD가 800만장 정도 팔려야 세계적인 인지도가 있는 가수로 여겨졌다. 그러나 디지털 시장에서는 한 곡으로 1억 회 이상의 유료 다운로드도 가능하다. 김영민 대표는 “우리 케이팝 가수들이 1억 회 다운로드를 올리며 세계 1위라는 상징성과 함께 광고가 붙으면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SM 소속 전체 가수의 뮤직비디오는 유투브를 통해 지난해 전 세계적으로 약 6억 건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 올 1월부터 4월까지 4개월간 조회 수가 4억 건을 돌파했다. 올해는 지난해 의 두 배인 약 12억 건의 조회 수를 올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파리 공연의 숨은 주역들
SM의 파리 공연을 성사시키는 데 일등공신은 잘 알려진 대로 한류 팬클럽 ‘코리안 커넥션’이다. 한류 팬들이 그동안 라이브 공연을 개최해 달라는 러브콜을 숱하게 보냈지만 팬들의 바람에 그쳤다.
그러나 ‘코리안 커넥션’의 막심 파케 대표가 최준호 주프랑스 한국문화원장과 박재석 한국관광공사 파리지사장을 만나면서 달라졌다. 박 지사장은 파리에서 케이팝 콘서트 개최를 청원하는 페이스북을 개설하자고 제안했다. 숨어 있던 한류 팬들의 실체가 드러나면 파리 공연이 가능할 것으로 내다본 것. 지난해 11월 페이스북에 ‘Concert K-POP A Paris(파리 케이팝 공연을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개설했고 1만3600여 명이 가입했다. 특히 IT회사 엔지니어인 파케 대표는 SNS로 팬을 결집하는 등 탁월한 리더십을 보였다.
당초 파리 공연의 흥행에 ‘반신반의’했던 SM도 파리 공연을 본격적으로 검토했다. 김영민 대표는 “당초 늦여름이나 가을에 공연을 계획했다가 팬들의 반응을 보고 앞당겼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최 문화원장도 물밑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SM은 당초 유럽에서 첫 공연이라는 점에서 3000석 규모의 공연장을 고려했다. 유럽 팬들의 열기를 파악한 뒤 7000석 규모로 확대하기로 결정했지만 3개월 만에 공연장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파리의 웬만한 공연장은 최소 1~2년 전에 대관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수소문 끝에 푸시캣 돌스, 조나스 브라더스 등 세계적인 가수들이 공연을 펼친 ‘르 제니트 드 파리’ 공연장을 어렵게 잡았다. 더욱이 한류 팬들이 추가 공연을 요구하자 공연장 확보에 다시 비상이 걸렸다. 이 같은 소식을 접한 최 문화원장를 비롯한 대사관 직원들이 발 벗고 나서 프랑스 문화부와 문화계 주요 인사들에게 긴급 요청을 넣었다. 예정됐던 공연을 연기시키면서 SM의 공연 연장을 받아들인 것. 여기에 한국방문의해위원회도 한류 확산 차원에서 이번 공연에 3억원을 후원했다.
‘반짝 한류’를 넘어서
프랑스는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는 나라다. 그간 사랑받아 온 한국 영화도 이창동, 홍상수 감독의 예술영화들이었을 만큼 주류 문화의 입맛은 깐깐하기 짝이 없었다. 최근 ‘서유럽의 동아시아 대중문화 향유를 이해하기’라는 논문을 발표한 홍석경 프랑스 보르도대학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최근 프랑스 청소년들은 케이팝에, 여대생과 직장 여성은 감성적인 한국 드라마에 빠져들고 있다”면서도 “아직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 갈 길이 멀다”고 진단했다. 아직은 아날로그 문화의 힘이 큰 유럽 시장에서는 “인터넷에 의존하고 있는 현재 케이팝이 CD와 DVD 등의 음반과 공연 시장을 좌우하는 라디오와 방송 매체에도 진입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고정민 한국창조산업연구소 소장도 “유럽의 한류는 우리 가수들의 진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현지의 붐에 의해 자연스럽게 일어난 점이 고무적이다”면서 “마니아가 애호하는 수준에서 대중화 단계로 빠른 안착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회장은 ‘한류 3단계론’을 제시했다. 1단계는 수출, 2단계는 합작, 3단계는 현지화로 구분한 것이다. 남성그룹 H.O.T가 중국 시장에서 인기를 끌던 때가 1단계 한류고 2006년 강타가 F4의 바네스와 결성한 ‘강타&바네사’가 2단계 한류다. 3단계는 2010년 SM이 준비하는 현지화 사업이다. 이 회장은 “한류의 3단계는 현지화를 통해 얻어지는 부가가치를 함께 나누는 것”이라며 “이것이 한류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한류의 중심은 일본이다. 다수의 국내 가수들은 중국에서 미래를 보고 뛰고 있다. 이제 케이팝도 좀 더 시야를 넓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