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마광수 교수는 동양의 음양이론에 기초해 “남성들은 가학(사디스트)적 성본능을 갖고 있는 반면 여성들에게는 피학(마조히스트)적인 성적판타지인 ‘강간 콤플렉스’가 있다”고 주장했다. 여성은 남녀가 사이좋게 성행위를 하기로 합의하고 난 뒤에 갖는 삽입성교보다도 졸지에 강간당하기를 은근히 바라는 잠재의식이 있다는 것인데 이를 ‘강간 콤플렉스(rape complex)’라고 한다. 일종의 마조히즘 심리로 여성이 자위행위를 할 때 상상 속에서 경험하는 섹슈얼 판타지(sexual fantasy)는 대부분이 강간 콤플렉스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서 여성은 신체구조상 거의 예외 없이 마조히스트이기 때문에 일체의 책임감이나 의무감으로부터 면제받고 싶어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여성계로부터 온갖 비난의 포화를 한 몸에 받았음은 당연지사다.
섹슈얼 판타지의 다양성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남편과의 섹스 중에 낯선 남자에게 강간당하고 있다는 상상으로 쾌감을 느끼는 사례를 소개하면 남자들은 예외없이 기정사실화 한다. 아닌 척해도 다 그런 줄 이미 알고 있다는 태도인데 한국영화를 들여다보면 ‘남성의 강간 판타지’가 더 쉽게 이해된다.
<오아시스>의 나공주가 그러하고, <나쁜 남자>의 선화가 그러하다. 심지어 <연애의 목적>의 홍이마저 말도 안 되게 찌질하게도 들이대며 강간당하듯이 당하고도 그 남자를 받아들이고 사랑한다. 참으로 강간에 대한 마초판타지가 보편적이라 하겠다.
여성의 판타지는 판타지일 뿐
남자들은 강간 판타지가 여성에게 에로틱한 자극이 되기 위해선 성적 주체로서의 느낌이 밑바탕에 깔려있어야 한다는 걸 모르는 것 같다. 이런 남성 중심의 강간 판타지로는 여성의 강간당하고 싶다는 판타지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모든 여성들은 늘 강간당할까봐 불안하다. 어쩌면 이런 남성 위주의 반여성적인 오해가 성범죄나 데이트 강간, 부부 사이의 강간으로 이어지는지도 모르겠다.
강간과 그 밖의 모든 성적 학대는 여성에게 신체적, 정신적으로 최악의 굴욕감과 혐오스러운 상처를 평생동안 남기는 일이다. 반면 여성의 판타지는 판타지일 뿐이다. 현실 세상에서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다.
폭력이나 강간이 성적 상상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성이 지배권과 조절권을 갖는 안전한 상황에서의 상상이다. 상상 속에서의 강간은 무섭지 않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얼마든지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둘 수 있는 놀이일 뿐인 것이다. 현실의 강간같은 고통, 굴욕감, 무기력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섹스 중 강간을 상상하는 것은 남성이 터프하게 자신을 리드 해주기를 바라는 갈망이다. 터프한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서 실제 상황에서 거칠게 다루어지거나 얻어맞고 싶다고 생각하는 여성은 없다.
남자들이 자꾸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여자들은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성적 공상을 마음 놓고 떠올리거나 감히 말해볼 엄두를 낼 수 있겠는가?
<연인들을 위한 에로틱 판타지>의 저자 바이올렛 블루는 뉴욕의 어느 술집에서 금속공예가인 남성과 만나 그의 땀 냄새와 그가 칼 전문가라는 말을 듣고 자신이 지독한 ‘칼’에 대한 섹슈얼 판타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섹슈얼 판타지란 ‘성적 자극을 끌어 올리는 모든 것’이다. 상상, 이미지, 특정한 시나리오 등 그 형태는 무엇이든지 상관없다. 그리고 이런 판타지를 적절히 활용할 수 있다면 성감을 현기증 날 정도로 높일 수 있음은 물론 마스터베이션, 파트너와의 섹스 시에도 더욱 황홀한 오르가즘을 높일 수 있다고 말한다. 여성비뇨기과 성클리닉에서도 성치료의 한 과정으로 다양한 성적판타지를 이용할 것을 권고하기도 한다.
남성적 속단과 잣대가 판타지 억압
많은 여성들은 자신만이 갖고 있는 성적판타지가 있다. 성감대를 자극하는 특별한 상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강간 판타지도 그것의 하나일 뿐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를 상상하거나 아파트 경비원과, 주유소 총각, 친구의 남편을 섹스 상대로 상정하거나 인상 깊은 영화 속 장면 속에 자신을 대입하기도 한다. 외도나 혼음, 근친상간, 수간, 가학, 피학 등 도덕적으로 금지된 다양한 일탈에 대한 욕망이 성적판타지로 발현되기도 한다. 자신만이 갖고 있는 성적판타지, 은밀하게 감춰뒀던 욕망의 이미지를 평생 발견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프레드릭 폰테인 감독의 <포르노그래피 어페어>처럼 자신의 ‘섹슈얼 판타지’를 직접 실현하려고 남자를 구하는 광고를 내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 감독은 주인공의 섹슈얼 판타지를 카메라에 담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만 들려줌으로써 온전히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 여주인공이 오랫동안 꿈꿔왔던 ‘섹슈얼 판타지’를 맛보기 위해 포르노 잡지에 광고를 내고 대낮부터 남자를 만나 서로에 관해 아무것도 묻지 않고 호텔로 직행한다.
그리고 어두침침한 호텔 방. 질펀한 정사를 기대했던 관객에게 “허리가 뻐근하다”는 남성의 중얼거림, 깔깔대며 “이런 짓은 하루에 한 번만 하자”는 여성의 쾌활한 목소리만 들려주며 자신의 상상력을 총동원해 두 남녀가 호텔방 안에서 벌이는 온갖 비정상적인 변태적 성행위를 그려보도록 한다.
과연 우리의 우아한 여자 주인공이 그토록 몰래 간절히 원했던 ‘섹슈얼 판타지’는 무엇이었을까? 감독은 남자 주인공을 통해 관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건 죽어도 말 못합니다. 내 두 눈을 뽑고, 배를 가르고, 손톱을 뽑는 고문을 당할지라도 그건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녀를 보호해줘야 할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요.”
이 영화가 마음에 드는 이유다. 제발 여성의 판타지는 여성의 것으로 내버려 두시라. 강간 판타지도 마찬가지다. 그런 상상으로 가끔 좀 자극받고 남몰래 짜릿해 하며 금기를 어겼다는 쾌감을 좀 누려보면 안되겠는가. 남자들의 남성적 속단이나 잣대가 판타지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 상상은 상상일 뿐이다. 어디 CF의 한 장면처럼 소리라도 질러야 할까? “우리 그냥 자유롭게 상상하게 해주세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