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도빌에 도착했다. 이곳은 파리지앵이 꼽은 최고의 휴양지이자 수많은 영화의 단골 촬영지다.
1870년 작(作) 모네의 <트루빌 해변의 판자길>을 본다. 노르망디의 빛을 담은 화폭은 파랗게 빛난다. 모래사장 한편에 놓인 특유의 판자길. 서걱서걱 모래 밟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노르망디 해안의 빛에 반해 평생을 그곳에서 보낸 인상파 화가 모네. 첫 아내 카미유와 결혼한 뒤 꿀맛 같은 휴가를 보낸 곳이 트루빌이다. 트루빌은 도빌(Deauville)과 지척이다. 도빌에서 ‘투크(Touques) 강’이라는 작은 하천을 건너면 도착할 수 있다. 대서양을 품은 트루빌의 해변은 곧 도빌의 해변이다. 파리지앵들이 최고의 휴양지로 꼽는 도빌. 여행자 누구나 그 곳을 자연의 빛이 만들어낸 도시로 상상한다. 하지만 기자는 감히 이렇게 말한다. 자연의 도시? 천만에. 도빌은 인간이 만들어 낸 최고의 ‘인공 도시’라고. 30년 전 영화 '남과 여'의 해변. 영화 '007 카지노 로얄'의 몽환적인 카지노. 그리고 최근 상영작 '코코 샤넬'의 고혹적인 명품 매장까지. 도빌이 단골 영화 촬영지인 건, 그 도시가 정교하게 만들어진 세트장이기 때문일 게다. 인구 4000명의 소도시 도빌. 수많은 영화의 거장들은 지금도 이 세트장으로 몰려들고 있다.
Ready Action : 거대한 세트장
도빌로의 환상여행은 파리 생라자르(Saint-Lazare) 역에서 시작된다. 파리지앵들은 말한다. “도빌로 가는 모든 사람은 생라자르 역에서 이미 영화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라자르에서 도빌 역사까지는 기차로 2시간이다. 이 간극은 시간의 이동이라기보다는, 현실에서 영화 속으로 들어가는 공간의 이동에 가깝다.
첫 느낌도 어김이 없다. 도시 전체가 앙증맞게 만들어진 세트장 같다고 할까. 태생 자체도 그렇다. 1861년 도빌을 세운 모르니(Morny; 나폴레옹 3세의 이복동생) 공작은 교회보다 경마장을 먼저 지었을 정도로 오락과 레저를 겨냥한다. 건물에 박힌 벽돌 하나하나, 도로변의 블록까지 정교하게 짜인 세트장의 느낌이다.
도빌 중심부는 한가운데 자리 잡은 분수를 중심으로 여덟 갈래로 나뉜다. 동양적인 의미의 8괘 한가운데 모든 것을 수용한 물이 솟아나는 형국이다. 풍수를 고려한 듯 세밀하게 설계한 흔적이 읽힌다. 여덟 갈래로 뻗어가며 빼곡히 들어선 건물들은 마치 헨젤과 그레텔이 사는 동화 속 집 같은 고혹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해변을 따라 400여 개의 군을 이룬 명품 부티크 숍 역시 잘 만들어진 소품이다. 명품의 거장 코코 샤넬이 처음 열었다는 매장. 에르메스, 루이비통 등 모든 명품 부티크 숍은 하나하나 독립된 건축물로 지어져 고고한 자태를 뽐낸다. 도빌에선 그래서 소비 활동마저 몽환적인 느낌이다. 지갑을 꼭 쥐고 있던 손엔 힘이 빠진다. 즉시, 무장해제. 누구나 기꺼이 지갑을 열고 만다.
SCENE #~ : 카지노와 <남과 여>의 해안
도빌의 도시 행사는 치밀한 영화 시나리오 같다. 계획적이면서도 정확하다. 폴로 경기를 포함해 10여 가지 스포츠 관련 행사와 함께 매년 3월 도빌아시아영화제 그리고 9월에는 미국 영화만 대상으로 한 도빌미국영화제가 진행된다.
1년에 두 번 해변에 깔리는 레드카펫을 밟기 위해 전 세계 스타들과 파리지앵들은 기꺼이 이 거대한 세트장, 도빌을 찾는다. 바캉스 시즌엔 상주인구 4000명의 10배가 넘는 6만여 명이 몰린다. 도빌은 휴양을 위한 여백의 도시지만 그래서 그 여백을 찾아보기가 더 힘들다.
도빌에 와서 꼭 둘러봐야 할 명소는 카지노. 영화 '007 카지노 로얄'의 무대가 된 바로 그 ‘르 카지노 드 도빌(Le Casino de Deauville)’ 카지노다. 이 카지노 한편엔 독특한 느낌의 ‘O₂카페’가 있다. 글자 그대로 산소를 만들어낸다. 카페 테이블엔 시험관처럼 생긴 형형색색의 유리관들이 놓여 있다. 잘 보면 고무호스가 나와 있다. 스위치를 켜면 곧 신선한 산소가 만들어진다. 산소 생성기가 갓 만들어낸 ‘산소 신생아’의 맛은 갓 뽑아낸 커피 향처럼 은은하다.
소비문화의 상징인 르 카지노 드 도빌 앞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연의 상징, 대서양 해변이 펼쳐진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조의 도빌이 도심을 이룬다면 자연의 도빌은 해안을 품는다. 그 극명한 대조가 이뤄내는 자연미는 아찔하다. 대서양은 모성(母性)의 바다다. 모든 것을 받아주고 포용한다. 진중하고 울림도 깊다. 하루 두 번 들숨과 날숨을 돌려 쉬어도, 경망스럽게 헐떡이지 않는다. 대서양은 100년이 넘게 물끄러미 도빌의 성장과정을 관조만 하고 있다. 거대한 세트장. 그 속에서 아옹다옹 사는 아이를 그저 지켜보는 어머니의 눈빛이다.
Director’s cut : 실종을 주의할 것
도빌에선 길을 잃기 쉽다. 양상은 두 가지다. 소극적인 실종과 적극적인 실종이다. 소극적인 실종은 보통 도빌 중심가에서 일어난다. 십중팔구 처음 도빌을 찾은 여행객들이 대부분이다.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앙증맞은 주변의 풍경에 넋을 잃고 일행을 놓치는 것이다. 도빌 시내를 돌아볼 땐 그래서 꼭 로밍폰을 켜두는 게 좋다.
두 번 이상 도빌을 찾은 여행객들은 후자에 주의할 것. 그 속살까지 샅샅이 보는 데 2~3일이면 충분한 소도시지만 이곳에서 수많은 여행객들은 한 달, 아니 평생을 머물기도 한다. 기꺼이 실종되고 싶은 곳이 또한 도빌이다. 별안간 기자가 뿅하고 사라진다면 도빌 해변을 뒤져보시길.
[도빌(프랑스)=신익수 매일경제 여행전문 기자 soo@mk.co.kr / 취재 협조= 프랑스관광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