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국그릇에 국을 밥그릇에 담을 수 없듯 술 역시 제짝이 필요하다. 잔은 술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과학이다.
술 좀 마신다고 자부하는 애주가는 많이 봤어도, 술은 꼭 맞는 잔에 마셔야 된다고 정도(正道)를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다. 그러나 명백히 술에 맞는 잔은 정해져 있다. 잔이 술 맛을 최종 완성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한잔에 마시는 적당한 양이나 시각적인 완성도를 고려하고, 주로 마시는 성별이나 부류, 그 술이 탄생한 역사적인 배경까지 고려한 황금조합에 기인한다. 쉽게 말해 술은 궁합이 맞는 잔에 마셔야 특유의 풍미가 온전히 살아난다.
이러한 기운을 담아 오랜 전통의 세계 맥주 명가들은 제각기 다른 잔을 만들어 낸다. 기네스 잔은 완만한 곡선이 단아하고, 칼스버그 잔은 긴 나팔처럼 날렵하다. 호가든 잔은 탱크처럼 단단하고, 레페 잔은 수도원 출신답게 성배(聖杯) 모양, 듀벨 잔은 튤립형이다. 시판되는 330㎖ 병맥주는 이들 잔을 거품과 함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가득 채운다. 와인 역시 보르도 지방과 부르고뉴 지방의 잔이 다르다.
이에 대해 W 서울 워커힐 우바의 장지석 매니저는 이렇게 말한다.
“굳이 거창한 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소주와 청하, 백세주에 맞는 잔이 각각 따로 있지 않습니까? 최고의 술은 이 세 가지가 지켜진 술이죠. Right Glass, Right Ganish, Right Presentation!”
술집에 가서 가격, 분위기, 예쁜 여성의 수만 체크하는 사람은 하수, 위의 세 가지를 체크하는 사람은 고수다. 옆자리에 앉은 여성의 이름만큼이나 술잔의 이름도 기억해두자.
1. 샴페인 in 플루트(flute) 글라스 예전엔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 나오는 드럼(drum)이라는 넙적한 잔에 샴페인을 마셨으나, 플루트에 담겨진 샴페인이 천천히 올라오는 기포까지 담아내며 훨씬 섹시하다.
2. 모히토 in 모히토 글라스 수북하게 쌓이는 얼음과 민트와 같은 내용물이 효과적으로 스쿼시 된다.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해 시각적으로 청량감을 준다.
3. 마가리타 in 마가리타 글라스 술과 잔이 잘 매칭 돼야 최상의 맛을 낸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마가리타 전용 글라스. 클래식 마가리타, 프로즌 마가리타, 언프로즌 마가리타 등이 있다.
4. 보드카 토닉 in 갤러웨이 글라스 보드카 토닉이나 진 토닉 등과 같이 토닉과 섞이는 음료나 두 가지 정도 섞는 레시피를 가진 술을 마실 때 좋은 잔. 온더락으로 마실 때 차가운 얼음이 천천히 녹으면서 밑에 깔린 술이 천천히 올라온다.
5. 롱아일랜드 아이스티 in 미츠 하이볼 글라스 네 가지 베이스를 자랑하는 롱아일랜드 아이스티, 주스와 양념이 많이 들어가는 블러드 시저와 블러드 메리처럼 내용물이나 양이 많은 드링크에 적합하다.
6. 피지 in 하이볼 글라스 소다수의 탄산에 있는 기포가 올라오는 것과 색깔이 레이어 되는 게 예쁘다. 잔이 길수록 청량감이 더해진다.
7. 데낄라 in 슬래머 글라스 슬래머는 ‘세게 놓다’라는 뜻의 슬램(slam)에서 나온 말. 데낄라 1/2 또는 1/3과 스파클링 워터를 넣고 샷 잔을 꽝 내리쳐서 먹는 술로, 밑동이 두꺼워 내리쳤을 때 바닥까지 거품이 내려갔다 올라온다. 데낄라는 소금을 뿌려 일반 잔에 먹을 수도 있지만, 재미있게 소리를 내면서 마시면 분위기도 흥겨워진다.
8. 코냑 in 브랜디 글라스 브랜디 특유의 향을 잘 담아서 맨 윗부분의 좁은 부분에서 퍼지도록 고안된 잔. 향을 모아놓는 형태라 잔속으로 코를 집어넣으면 향에 집중할 수 있게 코가 딱 맞춰진다. 잔의 줄기인 스템(stem)이 짧아서 잡기가 불편한데, 이는 손으로 잔 밑동을 잡아 체온과 술의 온도가 맞아 떨어질 때 브랜디가 최상의 향을 내기 때문이다. 고로 힘겹게 줄기를 잡기보단 잔 밑을 잡으라는 말씀!
9. 스무디 in 스무디 글라스 얼음을 갈아서 만드는 드링크류를 마시기 좋은 잔. 논알콜 스무디 종류가 대부분 여기에 담긴다.
10. 코즈모폴리턴 in 코즈모폴리턴 마티니 글라스 마티니는 원래 007시리즈의 제임스 본드가 즐겨 마실 정도로 독하고 남성적인 술. 섹시하고 깔끔해서 식전주로 제격이지만, 여자들이 먹기엔 다소 강해 코즈모폴리턴 같은 여성적인 성향의 퓨전 칵테일도 많이 나온다. 오직 코즈모폴리턴을 위해 생겨난 잔이지만, 이 잔을 사용하는 제대로 된 바는 많지 않은 현실.
11. 드라이 마티니 in 서클 마티니 글라스 가장 남성적이면서 섹시한 모습을 보여주는 글라스로, 남자의 역삼각형 몸을 연상시킨다. 바에서 멋진 정장을 차려 입은 남자가 스트로를 꽂은 빨간색의 칵테일 잔을 들고 있는 것보단 마티니 글라스를 들고 있는 게 훨씬 있어 보이지 않는가. 또 하나, 제대로 된 마티니에는 올리브가 3개 들어 있는데, 좋은 바에서는 씨가 들어있는 홀 올리브(whole olive)를 꽂아주고, 그렇지 않는 바에서는 작고 저렴한 스터프드(stuffed olive)를 꽂아준다는 사실.
12. 샹그리아 피처 in 크라프 글라스 보드카 등을 먹을 때 오렌지주스나 크렌베리주스 등 믹스 드링크를 내놓는 잔으로, 샹그리아를 담기에도 적당하다.
13. 위스키 in 온더락 글라스 락아이스와 같은 큰 얼음을 사용할 때 얼음이 최대한 바닥에 닿게 해준다. 이는 얼음이 천천히 녹아서 술을 마시기에 최상의 조건을 제공한다.
[김선아 스타일칼럼니스트 modori_@naver.com / 도움말 장지석 매니저 W 서울 워커힐 Woo B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