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는 단일 성씨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유지된 왕조라고 한다. 사극에서 그려내듯 국가의 위정자인 사대부가 정말 당파싸움만 일삼았다면 500년이 넘는 세월을 견딜 수 있었을까?
조선왕조가 유지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이른바 ‘선비정신’이라는 게 있었다. 그 선비정신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상소(上疏)다. 상소는 고위직에 있지 않거나 벼슬이 없는 선비가 공개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였다. 왕에게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상소문을 을람(乙覽; 왕이 늦은 밤까지 글을 봄)할 의무가 있었다.
'삼가 전하께 아뢰옵나니'(홍서여 지음, 청조사 펴냄)라는 책을 보면 격동의 세월에 대처한 선비들의 기개가 느껴진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 선비 최익현이 고종에게 올린 상소는 유명하다. 박제순 등 오적을 처단하라는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라는 준엄한 글이었다.
“폐하께서는 일본이 조선황실을 보호해준다는 말을 정말로 믿으십니까. 매국노들의 죄를 물으십시오. 그리고 거짓 조약을 회수해야 한다는 신의 간청을 받아 들여 나라를 보존하십시오. 죽고 싶은 심정을 견디지 못해 통곡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기록상으로 상소를 가장 많이 올린 이는 율곡 이이라고 한다. 율곡은 나이 어린 명종이 보위에 오르고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온갖 문제를 불러일으키자 붓을 잡았다.
“국가의 참혹한 화가 지금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여위고 쇠약한 백성에게 부역을 시키고, 국맥을 상하게 하니 앞으로 다가올 근심과 환란을 가히 짐작할 수 없겠습니다. 국가가 병들 기미를 본 이상 도저히 침묵을 지키지 못해 간절한 마음으로 정신없이 말씀을 올렸으니, 직책을 뛰어넘어 말한 죄, 달게 받겠습니다.”
당시 율곡의 벼슬은 지금으로 치자면 외교통상부나 교육부의 계장에 해당하는 예조좌랑이었다. 말단관리인지라 직접 왕을 접하기는 힘들었을 테니 방법은 상소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장에서는 미관말직으로 목숨을 걸고 붓을 들어야 했을 이이의 결의가 느껴진다.
이이의 현실참여는 직책이 높아진 이후에도 계속된다. 그가 남긴 편지에서도 그의 의지는 분명하다. '간찰, 선비의 마음을 읽다'(심경호 지음, 한얼미디어 펴냄)라는 책에 이이의 편지 내용이 실려 있다. 1581년 선조 14년 음력 11월15일, 대사간으로 있던 율곡 이이에게 친구인 송익필이 서찰을 보낸다. “세상이 어지러우니 몸조심하라”는 충고였다. 답장에서 율곡은 현실참여 의지를 강하게 내비친다.
“지금 억만 백성이 물새는 배에 타고 있으므로 그것을 구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차마 벼슬을 버리고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건의해서 받아들여 시행되지 않는다고 곧 떠나버리는 건 오늘의 시국에 대한 적절한 의리가 아닙니다.”
조선시대에는 편지를 ‘간찰(簡札)’이라고 했다. 본래 죽간이나 목찰에 작성한 글을 뜻하는 말이 모든 편지를 지칭하는 말로 확대된 것이다. 선비들이 주고받은 간찰에는 한 시대를 온전한 정신으로 살았던 선비들의 아픔과 상처가 담겨 있다.
천재 김시습이 설악산 자락에 은둔하고 있을 때 양양부사였던 유자한은 김시습의 재능이 안타까워 여러 차례 관직을 권유했다. 유자한의 애정 어린 천거에 김시습은 간찰로 답한다.
“저는 외곬이라 아무리 궁해도 구걸을 못합니다. 남이 주는 것도 받지 않고, 받더라도 어깨를 움츠리고 무릎으로 설설 기지 않습니다. 사례하더라도 감격해서 달려가는 법이 없습니다. 제 자신 이것이 나쁜 습관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습관이 본성으로 굳어져서 바꿀 수가 없습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의 멋진 야인기질이 그대로 드러나는 서찰이다.
언젠가부터 이메일과 문자가 편지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시대의 변화라고 쉽게 받아들이기엔 편지와 함께 사라진 것들이 너무 안타깝다. 인문정신으로 무장한 선비들의 편지에는 지조와 기개가 담겨있었다. 철학을 ‘공부한’ 것이 아니라 철학을 ‘살았던’ 그들이 그립다.
* 비블리오필리(bibliophilie)는 ‘애서취미’ 혹은 ‘진본에 대한 조예’를 뜻하는 라틴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