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장원 특파원의 굿모닝 하노이] ‘베트남판 포니’ 빈패스트 자동차 박항서 축구열풍 앞세워 애국 마케팅
홍장원 기자
입력 : 2019.03.07 14:37:27
수정 : 2019.03.07 14:37:41
베트남 축구 응원 인파
특정한 나라의 힘이 얼마나 세졌는지는 다양한 각도에서 판별할 수 있다. 제조업의 수준이 얼마나 올라왔는지도 하나의 척도가 될 수 있다. 조선업의 패권은 유럽을 거쳐 일본을 지나 한국에 왔고, 아마도 조만간 중국에 넘어갈 공산이 크다. 한때 소니와 샤프는 한국 기업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글로벌 최고의 기업이었지만 이제 그 위치는 한국의 삼성전자가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5~10년 뒤는 또 알 수 없는 게 세상 이치다. 중국의 하이얼이 글로벌 패권을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삼성전자가 자랑하는 스마트폰 경쟁력 역시 비슷한 시기 샤오미나 오포를 비롯한 중국 업체에게 시장의 더 많은 부분을 내어주게 될 것이다.
최근에는 실적이 주춤해 ‘위기론’이 불거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인구 5000만의 협소한 내수시장의 한국에서 현대·기아차그룹이란 글로벌 차메이커를 배출한 것은 평가받아야 한다. 베트남에서 부는 현대차 인기도 상당하다. 현대차는 지난해 베트남 시장에서 전년 대비 2배가 넘는 5만5924대의 차를 팔아치웠다. 사상 처음으로 판매량 5만 대 고지를 돌파한 것이다. 점유율 기준으로 따지면 도요타에 이은 2위다. 19.4%나 된다. 지난해 판매된 차 5대 중 1대에 현대차 로고가 찍혀있었다는 얘기다.
현대차는 최근 베트남 탄콩그룹과 판매 합작법인 설립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탄콩그룹은 2009년부터 베트남 현대차 판매를 대행하고 있다. 판매량이 가파르게 늘어날 기미가 보이자 합작법인 설립까지 얘기가 진전된 것이다. 탄콩그룹은 베트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형차 i10을 반제품 조립(CKD) 방식으로 생산하고 있다. 생산 규모를 현 연간 5만 대 수준에서 10만 대로 늘리겠다는 목표다.
‘제조업의 꽃’이라 불리는 자동차 산업은 특히 국력에 비례해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중산층이 형성되는 시점에 발맞춰 자국 차메이커를 육성해야겠다는 움직임이 관측된다. 차를 살만큼 먹고 살 만한 사람들이 서서히 늘어갈 시점에 ‘애국 마케팅’으로 무장해 내수시장 파이를 키울 자동차 업체가 새로 등장하는 시나리오다. 또한 중산층이 무럭무럭 자라는 시점에 ‘엘리트 스포츠’에 쏠리는 관심도 덩달아 커진다. 국민 전체가 잘 먹고 잘 마시며 여가를 즐길 만한 시점에 나라를 대표할 ‘스포츠 영웅’을 갈망해 대리만족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자동차 산업과 엘리트 스포츠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시대 조류를 읽어내는 셈이다.
빈패스트 LUX
현대차동차의 역사를 봐도 마찬가지다. 현대차가 첫 자체 제품을 내놓은 것은 1976년이었다. 한국의 기업이 독자 생산 모델 차량을 만든 것은 아시아에서 두 번째였다. 주인공은 ‘포니’였다. 물량이 많지는 않았지만 포니는 인근 국가에 수출되는 쾌거를 달성하기도 했다. 한국 제조업 역사를 통틀어 기념비적인 한 해라 부를 만하다.
이 때 한국 스포츠에서도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대기록이 달성됐다. 1976년 열린 제 21회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양정모 선수가 레슬링 자유형 62㎏에서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금메달을 딴 것이다. 올림픽이 끝나고 서울에서 열린 선수단 환영식에서 양정모 선수를 보기 위해 구름같이 인파가 몰렸다. 한국이 첫 완성차를 만든 시점과 한국이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딴 시점이 공교롭게 겹친 것이다. 산업이 발전하고 내수시장이 커가는 경로에 맞춰, 비슷한 시기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두개의 현상이 한해에 함께 벌어진 것이다.
2019년 베트남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베트남 차 업계에서 초미의 관심은 시장에 본격 뛰어든 빈패스트(VINFAST)의 완성차다. 지난해 차량 디자인을 공개한 빈패스트는 오는 9월 초 생산에 본격 나설 예정이다. 올해 들어 예약 판매를 받으며 시장 진출을 이미 시작한 상황이다. 빈패스트가 속한 빈그룹은 ‘베트남의 삼성’이라 불린다. 가전매장(빈프로) 마트(빈마트) 리조트(빈펄리조트) 학교(빈스쿨) 스마트폰(빈스마트) 건설(빈홈) 병원(빈멕국제병원)을 거느린 베트남 최대 대기업이다. 창업자인 팜 넛 브엉 빈그룹 회장은 최근 포브스가 집계한 부자 순위에서 글로벌 198위에 올랐다. 그의 재산 가치는 75억달러(약 8조4400억원)에 달한다.
빈패스트가 자동차 산업에 진출한 지난해는 베트남 스포츠사(史)에 길이 남을 한 해로 기억된다. ‘박항서의 해’라 불릴 만하다. 박 감독은 지난해 1월 23세 이하 대표팀을 데리고 나간 아시아축구연맹(AFC) 23살 이하(U-23) 챔피언십에서 팀을 결승에 올리며 준우승을 차지했다. 8월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는 축구팀을 준결승까지 이끌었다. 베트남으로는 난생 처음 4강에 진입하는 역사를 썼다. 연말 ‘동남아의 월드컵’으로 불리는 스즈키컵 우승을 차지하며 ‘화룡점정’의 성적을 냈다. 지난해 베트남 전역은 축구 열풍에 휩싸여 금성홍기가 부대꼈다. 박 감독은 베트남에서 가장 존경받는 스타 자리에 올랐다. 1976년 양정모 선수가 올림픽 첫 금메달을 땄을 때와 큰 차이가 없는 열기였다.
최근 빈패스트는 빈그룹이 운용하는 쇼핑몰 다수에서 빈패스트 차량 3종을 전시하고 있다. 베트남 시장을 상대로 상업 생산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리는 포석이라 할 만하다. 빈패스트는 차량 생산을 위해 여러 글로벌 업체와 손을 잡았다. 설계와 디자인은 피닌파리나(Pininfarina)와, 기술과 공정, 생산은 BMW와 협력한다. 공장 설계와 운영은 지멘스, 부품과 자동차 기술은 보쉬(Bosch)와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그 덕에 글로벌 주요 자동차와 견주어 빠지지 않는 외관을 갖췄다. 하지만 빈패스트의 도전이 성공으로 끝날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 SUV 모델인 ‘LUX SA2.0’의 팸플릿을 보니 구매가를 부가세 포함 14억1460만동으로 책정했다. 한화 기준으로 환산하면 7000만원에 육박하는 거액이다. 소형차인 팔디(Faldi) 가격 역시 부가세가 붙어 4억동 정도를 줘야 한다. 한화 기준 2000만원에 육박하는 액수다. 등록비, 번호판 수수료와 취득세 등 부대비용을 감안하면 필요금액은 2300만원 안팎까지 올라간다.
여기서 빈패스트의 도전이 기존 세계 자동차 역사와는 궤를 달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차를 비롯한 대다수 완성차 업체들은 사업 초기 ‘바텀업’ 방식을 추구했다. 대중적인 국민차로 시장테스트에 나선 뒤 차츰 사양을 높여가며 고급화했다.
하지만 빈패스트는 하이앤드 시장을 먼저 공략하고 내려오겠다는 ‘톱다운’ 방식이다. 공식 통계상 1인당 GDP가 3000달러 안팎인 베트남에서 얼마나 판매 대수를 늘릴 수 있을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은 인구가 1억 명에 가까운 대국인 데다 30대 이하 비율이 전체 인구 절반이 넘어, 장기적인 안목에서 빈패스트의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도 곳곳에서 나온다. 지금까지 베트남의 주요 이동수단은 오토바이지만 양질의 직업이 보장되는 중산층 부피가 커지면서 ‘마이카’에 대한 수요가 커졌기 때문이다.
한국사람 못지않은 베트남 국민들의 애국심도 감안해야 한다. 빈그룹이 자사 유통망을 총동원해 애국 마케팅에 나서면 효과가 있을 공산이 크다. 현대차가 사업 초기 한국 국민들의 성원을 받은 것처럼, 빈패스트 역시 조기에 베트남 시장의 지분을 차지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