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 지난 10월3일 브라질은 물론 전 세계 언론의 관심이 개표 결과에 집중됐다. 여당 후보가 당선돼 현 정부의 정책이 계속될 것인지 아니면 야당이 정권 교체를 이룩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다. 브라질 사상 최초로 여성 대통령의 탄생이 확정되는 순간을 취재하기 위한 관심이었다. 유수 여론조사 기관과 매스컴에서 하나같이 룰라 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수석장관 출신 여성 후보 질마 후세피(PT 노동자당)의 당선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본 결과, 질마 후세피 후보는 47%를 득표, 과반수 획득에 실패했다. 이에 따라 2위(33%) 득표자인 주제 세하(PSDB 브라질사회민주당)와 10월31일 결선투표를 앞두게 됐다.
획기적 변수 없는 한 무난한 승리 예상
이를 두고 일부 전문가들은 선거 이전에 실시된 여론조사는 물론이고 출구조사에서도 승리를 예상하던 차에 유권자들이 막판에 여론조사 1위 후보에게 등을 돌림으로써 결선투표까지 가게 됐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3위(19%) 후보자인 마리나 실바(PV 녹색당)와의 연합을 누가 어떻게 이뤄내는가에 따라 예상 밖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조심스런 예상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1차 투표 후 실시된 여론조사에 의하면 결선투표 때까지 판을 뒤집을 정도의 획기적인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질마 후세피 후보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된다.
영국 유력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최근 기사에서 “메르켈 독일 총리와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을 뛰어넘는 여성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질마 후세피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다. 이 기사는 또한 “게릴라 출신 브라질 대통령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권한을 지닌 여성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2억 명에 육박하는 인구, 세계 5위의 영토, 엄청난 규모의 식량과 자원 대국인 브라질이 세계무대에서 점차 영향력을 확대할 것이라는 전제가 뒷받침하는 어찌 보면 당연한 예상이라고 할 수 있다. 결선투표 결과가 예상처럼 질마 후세피 후보의 승리로 이어질 경우 브라질 국민들은 사상 최초로 여성 대통령을 갖게 된다.
세계적으로 현직 여성 정상들이 지금처럼 많았던 건 전례가 없을 정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타르야 할로넨 핀란드 대통령, 줄리아 길러드 호주 총리, 프라티바 파틸 인도 대통령, 알런 설리프 라이베리아 대통령 등 현재 세계는 가히 ‘마담 프레지던트’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의 사회 진출에 대해 그 동안 보수적인 태도를 보여 왔던 중남미 지역도 세계적으로 부는 거센 여풍(女風)으로부터 비껴가지는 못했다. 현재 유엔여성기구(UN Women) 초대회장인 미첼 바첼렛이 2006년 칠레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된 것을 시작으로 2007년에는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가 남편의 후광을 받아 아르헨티나 대통령직을 계승했으며 금년 2월 실시된 대선에서 라우라 친치야 후보가 승리함으로써 코스타리카 역시 첫 여성 대통령을 배출하게 됐다.
끊임없이 ‘마담 프레지던트’를 생산하는 전 세계적 여풍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특히 전통적으로 가부장적인 문화 속에서 여성의 사회적 참여가 오랜 기간 제약을 받아 왔던 중남미 지역에서 여성 대통령들이 연이어 배출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관계지향적·수평적 특징의 리더십 요구
크고 작은 긴장과 갈등 속에서도 비교적 오랜 기간 세계 평화가 지속되고 있다. 전쟁이 계속되던 시대에는 남성성이 요구됐지만 평화의 시대에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게 된다. 또한 세계화로 일컬어지는 현대사회가 겪고 있는 대변화의 과정을 이유로 들 수 있겠다. 교통과 정보통신의 급속한 발달로 말미암아 지구촌의 지리적 경계는 갈수록 허물어지고 있다. 현대사회는 더욱 다원화된 이익집단이 증가하고 각계각층의 인간관계 역시 복잡하고 다양하게 바뀌고 있다. 민주화와 교육수준의 향상으로 여성의 사회 진출도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결과적으로 현대사회의 구조는 수직적이고 획일적이던 과거의 모습을 벗어나 좀 더 수평적이고 다양한 양상을 띠게 된 것이다.
정치판에도 변화의 패러다임과 함께 새로운 리더십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과거의 획일적이고 비교적 단순했던 사회구조에는 본질적으로 물리적 힘에 바탕을 둔 권력지향적이며 수직적인 남성적 특징의 리더십이 어울렸다고 한다면,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현대사회에는 관계지향적이며 수평적인 여성적 특징의 리더십이 상대적으로 어울리는 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예외 없이 가톨릭을 국교로 채택한 중남미 식민지 국가들은 보수적이며 전통적인 관습을 유럽에 비해 훨씬 오래 간직해 왔다. 여성의 참정권만 하더라도 중남미에서는 미국과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보다 30여 년이나 늦게 보장했다. 여성 참정권을 1932년에 인정하기 시작한 브라질은 칠레, 아르헨티나(이상 1947년), 멕시코(1953년) 등 다른 중남미 국가들보다 비교적 일찍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한 셈이다.
하지만 사탕수수나 카카오 경작을 중심으로 시작된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의 특성으로 인해 사회구조 역시 절대적인 남성 권력을 수반으로 하는 가부장제를 기초로 하는 것이어서 브라질 여성들은 오랜 기간 사회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남성들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인내해야만 했다. 당시 사탕수수 농장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작품에 등장하는 한 남성 인물이 “여자와 깜둥이는 남자가 하는 말에 끼어들면 안 된다”고 하는 인종 편견에 빗댄 성차별적 발언을 통해 가부장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산업화와 함께 가부장적 사회의 틀은 와해됐지만 정작 사회 구성원들의 머릿속에 각인돼 남아 있던 가부장적 전통의 사고방식이 바뀌는 데는 더욱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하지만 변하는 세월 앞에 버틸 장사는 없었다. 사회와 제도에 버팀목이던 가부장적 사고방식 또한 실패와 좌절이 반복되면서 존재 의미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고 아래를 모르던 권위는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1960년대를 거쳐 1980년대까지 계속된 브라질 군부독재는 대다수 브라질 국민들로부터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앗아갔다.
불도저와 같은 밀어붙이기… ‘브라질 대처’
젊은 시절 질마 후세피는 반정부 게릴라 조직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정치범으로 잡혀 3년 동안 옥살이까지 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당시에 “국민들에게 더 나은 삶과 희망을 줘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 있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질마 후세피를 정치 경험이 아주 없다고 하는 이도 있지만 그의 정치 참여는 바로 군부독재라는 남성적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이미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룰라 행정부에서 에너지장관을 거쳐 수석장관을 역임하면서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추진력 때문에 영국 수상에 빗대어 ‘브라질 대처’라고 불린 그였다. 정책 조정 회의에서 의견이 다른 전력공사 사장에게 욕을 해가며 자기 의견을 관철시킨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처럼 억세고 거친 모습으로 어지간한 남성보다 더 강한 남성적 이미지를 보여주던 질마 후세피가 ‘화려한 변신’을 한 것은 대선 후보로 지명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한 달 동안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이전과는 딴판인 부드러운 여성의 모습이었다. 머리에 염색을 하고 맵시 나는 디자이너 의상을 입은 것은 둘째 치고 얼굴에 선명하던 주름살이 사라지고 피부는 탱탱해져 10년 이상 젊어진 데다 눈초리와 입 모양새 등이 하나같이 부드러운 분위기로 탈바꿈돼 있었다. 여러 군데 칼을 댄 게 틀림없었다. 거의 ‘페이스오프’에 가까울 정도의 대대적인 변신에 대해 그는 굳이 부인하려 들지 않는다. 실제보다 어떻게 보이는지가 더 중요한 게 정치의 실상 아니던가.
성공적인 이미지 변신의 덕을 봐서 그런지 몰라도 질마 후세피는 당내경선에서 승리했고 유권자들의 지지율 역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20% 가까이 지지율 격차를 벌이며 여론조사에서 1위 자리를 여유 있게 꿰차고 있던 주제 세하의 지지율은 반대로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로부터 불과 수개월 만에 전세가 역전되기까지 했다. 그러자 측근 한 명이 성형을 할 것을 권유했지만 거절당했다는 후문이다. 주제 세하 후보도 충고를 받아들여 성형을 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한 후보자는 변화하는 상황에 맞게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화시켰고 다른 후보자는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미 중남미 대륙에 상륙한 ‘마담 프레지던트’ 여풍의 위세는 때마침 부드러운 여성 이미지로의 변신에 성공한 질마 후세피 후보의 지지도에 날개를 달아줬다.
예상대로 질마 후세피가 차기 브라질 대통령이 된다면 성공적인 변화를 이룬 후보 자신의 노력으로 된 것이겠지만 뭐니 뭐니 해도 대선 캠페인의 일등공신은 바로 룰라 대통령이라는 데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룰라 대통령이 질마 후세피 후보에 쏟아 부은 물심양면의 지지는 눈물겨울 정도다. 후보 지명 때 당내에서 적지 않은 인사들이 반대 의사를 표했는데 이들 모두를 대통령이 직접 설득해 그의 후보지명을 끝내 이뤄냈다. 이후 전국 각지의 굵직굵직한 행사 때마다 그를 동행시켜 현 정부의 업적이 계속 이어질 것임을 국민들에게 반복적으로 상기시켰다. 당선이 확정된 이후에도 룰라와 동행하는 수많은 일정이 잡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는 G20 정상회의도 그 중 하나다. 국제 행사장에 당선자 자격으로 참석시켜 국제무대에서 적극적으로 얼굴을 홍보하여 외교 분야에서도 리더십을 선점하겠다는 전략인 것이다.
GDP 규모 세계 8위의 국가경제를 계승
브라질은 역사적으로 왕국 이래 남미 지역의 열강으로서 외교적 성과를 과시해 왔다. 현대에 와서 전임 페르난도 엔히키 대통령 시절부터 강화하기 시작한 남미 선린 외교정책은 룰라 행정부에 들어서면서 지리적인 확장을 모색하며 가시적인 성과를 이뤄내고 있다. 남미대륙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 영토를 소유하고 거의 모든 남미 국가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지리적인 특징을 십분 발휘해 브라질은 국가 간 분쟁과 갈등을 적극적으로 중재하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또한 CPLP(포르투갈어 사용국 커뮤니티:브라질·포르투갈·앙골라·모잠비크·기네비사우·상토메이프린시피·동티모르),남미국가연합, Mercosul(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파라과이 자유무역협정), 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IBSA(인도·브라질·남아공) 등 기존 공동체를 적극 활용하는 다자간 외교와 병행해 핵·자원·식량·영토 문제 등, 사안별로 국제무대에서의 영향력을 확대시켜 왔다. 누가 차기 행정부의 수반이 되든지 간에 브라질이 외교 분야에서 일궈낸 지금까지의 성과를 바탕으로 하는 앞으로의 노선 방향은 바뀌지 않을 게 분명하다.
차기 브라질 정부는 GDP 규모 세계 8위의 국가경제를 계승하게 될 예정이다. 질마 후세피가 당선된다면 경제 정책 역시 룰라 정부와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마디로 성장 지향형 경제 정책을 지속한다는 계획이다. 올해 예상 경제 성장률은 9% 선인데 앞으로 연 평균 6% 수준의 지속 가능한 고도성장을 이룩한다는 것이다. 다만 계속적으로 GDP 대비 순채무율을 낮춰 2014년28% 수준까지 하향 조정해 연 6% 수준인 현 기준금리를 더 낮출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정부 지원에 의지하려는 마음에 수혜자 스스로 자립심을 상실하게 만든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저소득층 빈민 구제 프로그램 ‘볼사 파밀리아’ 역시 현재 방식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방침이다. 질마 후세피는 이에 대해 “빈민 구제 정책은 계속돼야 한다. 전 국민이 모두 소비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 이는 사회 지원 정책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또한 직업교육에 대한 투자를 대폭 확대할 것이라고 말하고, “브라질은 여전히 많은 분야에서 숙련공이 부족하다. 사탕수수를 베던 단순 노동자를 용접공 같은 숙련 기술자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질마 후세피 후보의 대선 캠페인 홍보 비디오에는 무엇보다 현 룰라 행정부의 업적을 찬양하고 이를 계승한다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담겨 있다. 대다수 국민들을 위해 “변화는 계속된다”는 게 가장 중요한 슬로건이다. 룰라 대통령이 현재 누리고 있는 지지율은 80%를 상회할 정도로 압도적이다. 하지만 룰라 행정부로부터 이어 받을 유산이 모두 ‘따 놓은 당상’은 아니다. 현 정부에 대한 가장 진지한 비판 중 하나는 공공지출 증가에 대한 우려다. 실제로 0.2%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작년 한 해 동안 사회복지 부문의 지출은 오히려 20%나 늘어났고 대규모 공무원 신규채용으로 인한 인건비 증가도 11%에 달했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2009년 총부채 규모는 GDP의 64%까지 치솟았다. 총부채 증가율이 위험 수위 이상으로 GDP 증가율을 추월하고 있다는 점 또한 우려할 사항이다.
경제 안정 속에 성장을 거듭하며 2014년 월드컵과 2016년 올림픽을 유치하는 등 세계로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현재의 브라질이 있기까지에는 2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쓰디 쓴 처방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면서 성장도 함께 이뤄내려면 차기 브라질 정부는 지출을 억제하면서 인프라 투자에 역점을 둬야 할 것이다. 플라날투 대통령궁의 다음 주인이 누가될 것인지는 불문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는 지도자라면 오래지 않아 긴축이라는 용기 있는 칼을 빼들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