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의 ‘반도체’ 경쟁력 강화 전략에 속도가 붙고 있다. 반도체의 공급망을 강화하기 위해서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업체인 대만 TSMC 등의 추가 공장 유치에 힘을 쏟고 있고, 존재감이 약해진 자국의 반도체 산업을 키우기 위해 지난해 설립된 라피더스를 지원하고 있다. 일본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는 반도체 부품·소재·장비에서도 각종 지원으로 경쟁력을 더욱 높여 경쟁국과 격차를 벌이고 공급망을 강화하려는 전략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지난해 이후 일본 정부의 반도체 전략 중 하나의 축을 이루는 게 자국 반도체 산업의 부활이다. 1990년 세계 10대 반도체 회사 중 일본 기업은 6개였고 심지어 NEC·도시바·히타치제작소가 각각 1·2·3위를 차지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하지만 2000년에는 10위 안의 일본 업체가 3개로 줄고 2020년에는 하나도 이름을 올리지 못할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최근 일본의 반도체 부활 방안에서는 지난해 설립된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라피더스는 토요타, 키옥시아, 소니, NTT, 소프트뱅크 등 일본의 8개 업체가 반도체 산업을 키우기 위해 설립한 회사이다.
일본은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미국과의 협력을 추진해왔는데, 그 결과물 중 하나가 라피더스와 미국 IBM의 공동개발이다. IBM과 라피더스는 지난해 말 차세대 반도체를 공동 개발하는 내용의 업무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라피더스는 IBM에 100여 명의 기술자를 파견해 기술을 습득하고 공동 연구개발도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두 회사는 2027년까지 회로선폭 2나노미터(1㎚=10억분의 1m)급 공정을 개발해 반도체 칩을 생산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반도체는 미세공정을 통해 회로선폭을 줄일수록 성능·생산효율 등을 높일 수 있다. 삼성전자는 2025년 2나노 제품을 양산한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일본 반도체 전략의 또 다른 축은 ‘공급망 안정 및 강화’이고 이를 위해 글로벌 기업과의 협력에 속도를 내고 있다. 2020년 시작됐던 반도체 공급 부족 현상으로 일본 경제의 주축인 자동차를 비롯해 주요 기업이 영향을 받았다. 여기에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반도체 산업 등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2021년 마련한 ‘반도체 전략’을 통해 반도체를 “안전보장에도 직결되는 사활을 걸어야 할 중요한 전략기술”이라고 명기하며 국내 생산을 강화할 방침을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자국 내에서 반도체 생산능력을 높이기 위해 공장 신·증설에 대규모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다. 지원의 대상은 일본 기업뿐 아니라, 일본 내에 공장을 짓는 외국 기업도 포함된다. 특히 일본은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경제안보법을 활용해 반도체 공급망 안정·강화를 위한 지원에 나서고 있다.
일본의 ‘반도체 공급망 안정’ 핵심 중 하나가 TSMC 공장의 유치이다. TSMC는 규슈 구마모토에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으며 일본 정부는 이 공장에 4760억엔가량을 지원한다. 2024년 말부터 생산이 시작되고 12나노~28나노 제품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또 여기서 생산된 제품은 일본 기업에 우선 공급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일본 정부와 손을 잡은 TSMC는 구마모토에 두 번째 공장 프로젝트도 검토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 6월 TSMC 관계자는 “일본 정부가 제2 공장을 바라고 있고, (일본 정부의) 보조금도 검토되고 있는 단계”라며 “많은 고객이 TSMC의 일본 생산이 아직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어 신공장 건설을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토지는 아직 취득 단계이지만, 아마도 (구마모토에 건설 중인)제1 공장 인근에 마련되게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TSMC 외에도 여러 기업들에 보조금이 지원된다 . 일본 정부는 키옥시아가 미국 반도체 대기업 웨스턴디지털과 함께 이와테현에 건설 중인 낸드 플래시 메모리 반도체 공장 건설에도 최대 929억엔을 지원한다. 두 회사는 스마트폰 등에 사용되는 저장매체인 제6세대 3차원 플래시메모리를 양산하는 계획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정부는 미국 마이크론의 히로시마 D램 공장 증설 투자에도 최대 465억엔을 지원한다. 최근에는 대만의 파운드리 업체인 PSMC도 일본 내 반도체 공장 설립에 나섰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PSMC는 SBI홀딩스와 공동 출자회사를 세워 사업 계획을 본격 추진할 계획이다. 황충런 PSMC 회장은 “공장 입지가 정해지면 2년 안에 회로선폭 28나노의 반도체를 공급할 수 있다”며 “일본에 구축한 생산 거점은 일본에서 안정적인 반도체 공급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타오 요시타카 SBI홀딩스 회장은 “지금이 대만 기업과 협력해 일본 반도체 산업을 진흥할 기회”라고 전했다. SBI홀딩스는 자금 조달을 위해 일본 정부에 보조금과 세제상 우대 조치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는 ‘반도체 부활’을 내걸고 자국 내 반도체 매출액을 2030년 15조엔으로 2020년 대비 3배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일본 정부의 반도체 전략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게 부품·소재·장비이다. 반도체 부품·소재·장비는 일본 기업들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다. 이 분야를 더욱 육성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과 영향력을 높이고 공급망을 강화하려는 방향으로 분석된다. 닛케이에 따르면 반도체 소재 기업인 섬코(SUMCO)가 지을 예정인 첨단 실리콘 웨이퍼 공장에 일본 정부가 보조금 750억엔을 지원할 것으로 보인다. 공장 설립에 들어가는 투자액의 3분의 1가량에 달하는 금액이다. 섬코는 1999년 스미토모금속공업과 미쓰비시머티리얼이 공동으로 설립한 회사이며 실리콘 웨이퍼 시장 점유율에서 신에츠화학에 이어 세계 2위에 올라 있다. 신에츠화학과 섬코 등 일본 업체의 실리콘 웨이퍼 시장 점유율은 56.3%에 달한다.
일본 국부펀드인 산업혁신투자기구(JIC)는 포토레지스트 세계 1위인 반도체 소재 업체 JSR를 약 1조엔에 매수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JSR는 반도체 제조에 활용되는 포토레지스트(감광액)에서 시장 점유율 28%로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JSR는 2021년 포토레지스트를 개발하고 제조하는 미국 기업을 약 450억엔에 매수하는 등 관련 사업에 힘을 기울여 왔다. JIC의 산하로 들어가면, 중장기적으로는 개혁이 가능하고 자금력을 바탕으로 인수합병 여력도 확대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JIC의 JSR 매수는 일본 정부가 전략물자로 정한 반도체 분야 투자 확대와 반도체 공급망 강화의 일환으로 분석된다.
이 밖에 일본 정부는 반도체 패키지 기판 업체 이비덴의 공장 건설에 최대 405억엔, 노광장비 공장 건립을 발표한 캐논에 최대 111억엔을 지원하기로 했다.
생산 거점 확대로 반도체 제조에 필수인 물 확보가 과제로 떠오르면서 관련 설비 건설에도 보조금을 지급하는 제도가 마련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