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판 다이소’인 달러트리는 35년간 모든 품목을 1달러에 팔던 대표적인 미국의 유통체인이다. 월마트 못지않게 미국 전국 방방곳곳에 있어서 어디서든 부담 없이 방문할 수 있는 곳이었다. 지난해 11월 달러트리는 인플레이션 압력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며 일부 제품 가격을 1.25달러로 인상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기자가 뉴욕주, 뉴저지주 일대에서 실제 달러트리를 방문해보니 실상은 딴판이었다. 1달러 품목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모든 제품 가격을 1.25달러로 인상한 매장이 대부분이었다. 지난해 말까지 1달러로 팔던 제품을 한꺼번에 25% 가격을 올린 것이다.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로 국제유가가 급등하고, 인플레이션이 급등하자 아마존은 판매자에게 5%의 추가 수수료를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아마존은 자사 물류센터를 통해 상품을 발송하는 사업자들에게 이 같은 조치를 단행했다. 아마존은 이런 판매자들에게 “코로나19 관련 규제가 완화되면서 (인플레이션이) 정상화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연료비 상승과 인플레이션 심화로 더 어려운 상황이 됐다”고 양해를 구했다. 아마존은 팬데믹 이후 물류센터 근로자의 시간당 최저 임금을 15달러에서 18달러로 인상하는 등 인건비 상승 압박에 직면했다. 월마트는 트럭기사 확보에 극심한 어려움을 겪자 트럭기사 초봉을 9만5000~11만달러(약 1억1700만~1억3500만원)로 인상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연봉인 8만7000달러(약 1억700만원)보다 최대 26% 인상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월마트는 원하는 사내 직원은 누구나 트럭 기사로 전직할 수 있게 사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1인당 4500달러가 소요되는 12주 과정 교육비까지 월마트가 부담한다. 월마트, 아마존, 달러트리는 공통점이 있는 유통체인이다. 미국 물가 상승을 억제하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장 지배적 위치에 있는 이들 유통체인이 가격 인상에 나설 경우 이 파장은 업계 전반에 미칠 수밖에 없다.
미국 뉴욕주에 있는 월마트 매장 입구 모습. 트럭기사 초봉을 11만달러까지 올린 월마트, 이런 비용 상승은 결국 최종 소비자들에게 전가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3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월 대비 8.5% 상승하면서 1981년 2월 이후 약 40년여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월가 전망치(8.4%)보다 높았고, 전월 대비로도 전망치(1.1%)보다 높은 1.2%를 기록했다. 다만, 변동성이 큰 에너지, 식품을 제외한 근원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6.5%를 기록, 월가 전망치와 같은 수준이었다. 전월 대비로는 0.3% 상승하며 전망치(0.5%)를 다소 밑돌았다. 최근처럼 물가가 연쇄적으로 급등하는 시기에는 전월 대비 추세가 더 시장의 주목을 받는다. 이처럼 근원 소비자물가지수가 전월 대비 상승 폭이 둔화되면서 물가 상승세가 정점을 찍은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하지만 기자가 미국에 살면서 느낀 바에 따르면 이럴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인다. 근원 소비자물가지수가 전월 대비 상승 폭이 꺾인 것은 중고차 가격 상승세가 다소 진정됐기 때문이다. 3월 중고차 가격은 전월 대비 3.8% 감소했다. 하지만 전년 동월 대비로는 35.3%로 여전히 높은 상태다. 이런 일시적 요인을 제외하고 소비자물가지수에 영향이 큰 요소들의 흐름을 보면, 물가 상승세가 정점을 찍었다고 보기 힘든 부분이 많다.
가장 중요한 주거비 상승세가 계속되고 있다. 주거비는 단일 항목 중 가계 지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요소다. 실제 소비자물가지수 구성 요소 중에서 주거비는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3월 소비자물가지수를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주거비는 전월 대비 0.5% 상승했다. 전년 동월 대비로는 5.0% 상승해서 1991년 5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국의 전례 없는 주택 상승세는 금리 인상에 따른 모기지(주택담보대출) 금리 상승에도 불구하고 진정되지 않고 있다.
모기지 평균 금리는 최근 5%를 돌파했다. 남부 선벨트 지역(텍사스주, 플로리다주, 조지아주 등)은 상대적으로 더 가파르게 주택 가격 상승세가 지속되고 있다. 기준금리가 오르고, 모기지 금리가 오르면 주택 상승세가 꺾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올캐시 바이어(대출 없이 현금을 100% 주고 사는 구매자)’들은 더 득세하고 있다. 모기지 금리가 오르면 주택 소유자는 이 비용을 다시 세입자에게 전가할 수밖에 없다. 뉴욕으로 출퇴근이 가능하고 학군이 우수해 한국인들의 선호도가 높은 뉴저지주 테너플라이, 클로스터, 데마레스트 같은 지역의 주택 렌트비는 팬데믹 초기 대비 30% 이상 올랐다.
테너플라이는 1만5000명이 넘는 타운인데 렌트 매물이 2~3채도 나오지 않는다. 이미 시장에 나오기 전에 입도선매로 사라지고, 가격도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미국의 일상이 정상으로 돌아오며 서비스 요금이 덩달아 뛰고 있다. 항공료는 전월 대비 10.7% 올랐고, 전년 동월 대비로는 24% 올랐다. 휘발유는 전월 대비 18.3%, 전년 동월 대비로는 48% 올라서 3월 소비자물자기수 상승의 절반을 차지했다. 우크라이나 사태 관련 리스크가 잦아들지 않는다면, 국제유가는 계속 고공행진을 할 가능성이 높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도매물가인 생산자물가지수(PPI)가 계속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3월 생산자물가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11.2% 상승, 2010년 관련 집계를 시작한 이래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2월(10.3%)보다 0.9%포인트 상승했다. 최근 4개월 연속 두 자릿수대 상승 폭을 기록하고 있다.
미국은 위드코로나 시대로 완전히 전환했고, 뉴욕에는 전 세계 관광객들이 모여들고 있다. 이는 항공료 등 서비스요금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뉴욕에서 관광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
생산자물가지수 상승은 시간을 두고 소비자물가지수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뉴욕의 한 물류업계 CEO는 “인플레이션은 이제 시작이라고 본다”며 “러시아산 곡물 공급이 제한되면서 중남미산 곡물을 비롯해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중남미산 옥수수 가격이 오르면 시간 차를 두고 사료 가격 등에 영향을 주게 되고, 이는 결국 돼지고기를 비롯 식품 가격에 전가된다”며 “판매자들이 바로바로 가격에 반영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실제 최종 소비자 가격에 반영되는 데는 약 6개월~1년이 소요된다”고 말했다.
전미자영업협의회가 최근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 따르면 응답자의 약 50%가 향후 3개월 내 가격을 인상하겠다고 밝혔다. 응답자의 약 72%가 이미 판매가격을 올렸다고 응답했다. 대부분의 중소기업이 원가 상승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연쇄적으로 가격을 올리겠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는 중국의 봉쇄정책 여파다. 중국이 ‘제로코로나’ 정책을 고수함에 따라 상하이, 광저우 등 대도시를 봉쇄한 여파는 중국 경제는 물론 전 세계 경제에 큰 타격을 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전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리는 광둥성에 있는 광저우 일대가 봉쇄됨에 따라 글로벌 공급망에 다시 한 번 충격이 더해질 것으로 보인다. 더 큰 ‘퍼펙트 스톰’이 다가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기자가 만난 미국의 한 포워딩 기업 CEO는 “중국발 선적 물량이 최근 들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어 우려된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사태라는 전례 없는 위기를 맞아 타격을 입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 각국은 경쟁적으로 무제한적 양적완화에 나섰었다. 이렇게 돈을 마구잡이로 찍어낸 대가는 혹독하다. 이제 우리는 인플레이션이라는 또 다른 세금을 내면서 살아야 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다른 세금은 세율이 고정돼 있지만 ‘인플레이션세(稅)’는 세율이 계속 올라가고 있고, 예측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무서운 세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