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 특파원의 일본열도 통신] 대만 TSMC와의 협력에 승부 거는 日, 반도체 부흥에 올인… 소니·덴소도 가세
김규식 기자
입력 : 2022.03.03 14:38:49
수정 : 2022.03.03 14:39:12
일본 정부·기업과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업체인 대만 TSMC의 협업이 확대되고 있다. 최근 TSMC는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에 짓는 공장의 생산력을 20% 증대하기로 했고, 이 사업에 소니에 이어 세계적 자동차 부품업체이자 도요타가 최대주주인 덴소가 참여하기로 했다. 일본 정부는 자국 내 신·증설되는 첨단 반도체 공장의 설비투자를 지원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는데 첫 수혜는 TSMC가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작년 10월 출범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내각은 경제안보를 주요 정책으로 추진하고 있고 그중에서 핵심으로 꼽히는 게 반도체의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하는 것이다. 재작년 말 이후 글로벌 시장에서 차량용 제품을 중심으로 반도체 부족 현상이 지속되면서 많은 제조·IT업체들이 영향을 받고 있고 이에 따라 미국·유럽·일본 등이 공급망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자동차가 주력 산업 중 하나인 일본의 경우 주요 업체들이 반도체 부족으로 생산에 차질을 빚으면서 산업에 큰 영향을 받기도 했다.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를 노리는 일본 정부는 파격적 지원을 바탕으로 TSMC의 공장을 유치했고, 이 프로젝트에 일본 기업의 참여가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TSMC가 자사의 최첨단 기술을 구마모토 공장에 적용하지 않는 점을 감안해 ‘외국 기업에 막대한 지원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비판이 나온다. 이와 함께 1980년대 세계를 호령하다가 경쟁력을 잃어버린 일본의 반도체 산업에 대한 반성도 나온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TSMC는 최근 일본 구마모토현에 짓는 반도체 공장에 투자를 늘려 생산능력을 20%가량 높이기로 했고 세계적 자동차 부품 업체인 덴소는 400억엔을 투자하기로 했다. 덴소의 투자는 소니에 이어 두 번째인데 반도체의 안정적 공급망을 경쟁력 확보에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는 일본 기업과 TSMC의 협력이 강화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TSMC는 최근 구마모토현에 조성하는 공장의 생산능력을 높이기 위해 투자액을 기존 8000억엔에서 9800억엔가량으로 상향 조정했다. 이와 함께 도요타가 최대주주로 있는 덴소도 400억엔가량을 출자해 10%가량의 지분을 확보하고 소니에 이어 3대 주주로 자리매김할 계획이다. 소니는 이미 570억엔을 투자해 10~20%의 지분으로 확보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또 일본 정부는 반도체의 안정적 공급망 확보를 위해 이 공장에 4000억엔가량을 지원할 것으로 예상된다.
▶구마모토 공장 12~16나노 제품 제조
구마모토 공장에 대한 투자 확대에 따라 생산능력도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작년 11월 공개된 계획에서는 12인치 웨이퍼 투입 기준으로 월 4만5000장가량의 생산능력을 확보할 예정이었고 회로선폭 22~28나노미터(1㎚=10억분의 1m) 공정의 제품이 생산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이번 투자 확대에 따라 기존 계획보다 더 고성능인 12~16나노 제품도 제조될 것으로 보이는 등 전체적인 생산능력이 20%가량 높아질 것이라는 게 닛케이의 분석이다. 반도체는 미세공정을 통해 회로선폭을 줄일수록 성능·생산 효율 등을 높일 수 있다. TSMC는 당초 발표와 비교해 첨단기술 인력 고용도 1500명에서 1700명으로 확대할 것으로 보인다.
소니·덴소 등 일본 기업이 TSMC의 구마모토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은 안정적으로 반도체를 공급받을 수 있는 길을 찾는 게 향후 경쟁력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덴소는 자율주행을 비롯해 자동차용 반도체 공급처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덴소는 엔진·운전지원 기능을 제어하는 장치나 센서 등에 반도체를 활용하고 있다. 덴소의 최대주주인 도요타를 비롯해 일본 차 업계는 지난해 반도체 공급 부족으로 생산 차질을 빚는 등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소니의 경우 TSMC가 공장부지를 확보하는 데도 협력할 것으로 보인다. TSMC의 공장 인근에는 소니의 주력 상품 중 하나인 이미지센서 공장이 있다. TSMC 공장에서 이미지센서에 활용되는 연산용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게 소니의 목표로 분석된다. 요시다 겐이치로 소니 회장 겸 사장은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조달하는 것은 일본의 국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TSMC는 반도체의 90% 이상을 대만에서 생산하고 있다. 구마모토 공장은 중국·미국에 이어 TSMC의 세 번째 해외 생산 거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공급망 확보에는 일본 정부도 적극 나서고 있다. 일본 정부는 자국 내에 첨단 반도체 공장을 신·증설할 때 설비투자의 최대 50%까지 지원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 내에서 일정 기간 이상 첨단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생산하고 수급 상황이 악화됐을 때 증산에 응하는 것 등이 지원 조건이다. 이 같은 지원을 위해 2021년도 보정(추경) 예산에 6000억엔을 반영해 놓았다. 첫 지원 대상은 TSMC 구마모토 공장이 될 것으로 보이며 그 규모는 4000억엔으로 추정된다.
▶日 정부의 파격적 지원에 논란도
일본 정부가 공급망 안정을 위해 설비투자 지원을 적극 추진하고 있지만,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우선 지적되는 것은 외국 기업인 TSMC에 유례없는 거액이 지원되는 것이다. 특히 구마모토 공장이 당초 회로선폭 22~28나노 미세공정을 활용할 예정이었고 최근에 추가된 게 12~16나노이다. 삼성전자나 TSMC가 5나노로 첨단 시스템반도체 양산을 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뒤처진 기술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일본 언론에서는 ‘의문을 느끼지 않는 국민이 없다’, ‘외국 기업에 대한 전례 없는 거액의 지원이다’ 등의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통상 마찰 가능성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일본 정부는 이번 지원 방안을 세계무역기구(WTO)의 산업보조금 관련 규정에 위배되지 않도록 설계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닛케이는 “운용에 따라서는 외국으로부터 WTO에 제소될 위험이 제로(O)인 것은 아니다”라고 분석했다.
일본이 경제안보, 특히 반도체의 안정적 공급망을 대하는 자세는 절실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는 지난 1월 온라인 정상회담에서 경제안보·투자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외무-경제장관(경제 2+2) 회의’를 만들기로 했다. 외교-안보 분야의 2+2 회담을 경제 분야로 확대한 것이다. 특히 경제 분야 2+2 회담의 역할로 기대되는 중요한 분야가 반도체 공급망이다. 경제 분야 2+2 회담의 경우 당초 미국 측이 차관급 회의를 제의했으나 일본이 장관급으로 격상하자고 제안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만큼 일본이 경제안보 분야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일본 정부는 이 밖에 국내 반도체 생산능력을 높이기 위해 고등 전문학교에 반도체 제조·개발과 관련한 교육 과정을 신설해 인재를 육성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TSMC와 손을 잡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자국의 반도체 산업 경쟁력이 떨어진 영향이 크다. 일본에는 2019년 기준으로 84개의 반도체 공장이 있지만 삼성전자나 TSMC 등처럼 기술 수준이 높지 않다. 일본 정부 관계자는 “공장 수는 세계 1위지만 상당수가 노후화돼 있다”고 설명했다.
1980년대 일본의 반도체는 세계 최강이었다. 1988년 일본의 글로벌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50%를 넘었다. 또 1990년만 해도 글로벌 5대 반도체 기업 순위에서 일본의 NEC·도시바·히다치제작소가 각각 1·2·3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2020년 글로벌 5개 반도체 업체에 일본 기업은 하나도 포함되지 못했다. 시장 변화에 적용하지 못한 점과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일본 내 미국 반도체 점유율 확대) 등이 일본 반도체 산업의 쇠락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