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은 선거로 출발해서 선거로 끝난다. 전 세계 인구 4분의 1이 투표소로 향한다는 소위 ‘슈퍼 선거의 해’다. 집권 세력에 대한 심판, 포퓰리즘으로 인한 재정 확대, 이민·PC(정치적 올바름)주의에 대한 반발까지 다양한 결과가 나왔다. 연초 대만과 인도, 프랑스, 영국에 이어 오는 11월 미국의 총선·대선을 앞둔 시점에 2024년 선거 결과를 중간 점검했다.
전반기에 치러진 선거에서 상당수는 정권 심판에 초점이 맞춰졌다. 여당이 패배한 한국 총선이나 14년 만의 정권 교체를 이룬 영국이 대표적이다. 프랑스도 유럽의회 선거와 총선에서 마크롱 대통령은 부침을 겪어야만 했다.
‘슈퍼 선거의 해’를 열었던 대만의 총통(대통령 격) 선거에선 대만 독립 성향인 민진당의 라이칭더가 당선됨으로써 정권을 지켰다. 중국의 지속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2016, 2020년에 이어 반중·친미 노선을 고수하는 세력이 집권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함께 치러진 총선에서는 친중 성향의 야당 국민당이 52석을 얻어 민진당(51석), 민중당(8석) 등을 제치고 제1당이 됐다. 야권이 과반을 이루는 여소야대 구도가 만들어졌다. 중국이 대만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는 가운데 라이 총통은 대만의 주권 침탈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또 차이잉원 전 총통이 주창한 ‘네 가지 견지’를 지키겠다고 밝혔다.
동남아시아 최대 국가인 인도네시아는 지난 2월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렀다. 야당 후보였던 프라보워 수비안토 국방장관이 인도네시아 38개 주 중 36개 주에서 승리하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야당 후보가 당선됐지만 ‘정권 교체’라고 보기는 어렵다.
프라보워 당선인이 조코 위도도 대통령의 아들인 기브란 라카부밍 라카를 부통령 후보로 임명하며 여당 표까지 흡수했다. 이번 선거는 유권자 1억 9000만 명의 80% 이상이 투표를 할 정도로 참여율이 높았다. 낙선 후보들이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인도네시아 헌법재판소가 지난 4월 소송을 기각하면서 대통령과 부통령의 당선이 확실시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3월 대선에서 5선을 달성했다. 그는 앞서 4번째 임기를 수행하던 2020년 개헌을 통해 재출마의 길을 닦아놓았고, 이번 선거로 30년 집권을 굳히며 사실상 ‘종신 대통령’이 됐다. 스스로 종신 집권을 택한 푸틴 대통령은 ‘현대판 차르(황제)’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투표율 77%, 득표율 87%로 모두 역대 최고치였다. 푸틴의 강력한 지지율에는 2000년 첫 당선 이후 펴온 이른바 ‘강한 러시아’ 정책이 주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수많은 정적을 탄압하며 권위주의로 접어든 푸틴 대통령은 왜 굳이 선거를 치를까. 러시아 외교관 출신인 보리스 본다레프는 알자지라 기고문에서 “푸틴은 자신이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통치자임을 보여주고 싶어한다”며 “선거에서 압승하면 우크라이나 전쟁도 명분이 생기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인도 총선(4월 19~6월 1일)은 집권 권력에 대한 ‘심판’의 성격이 나타났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3연임에 성공했지만 압승을 예상했던 의석수는 예상보다 한참 못 미쳤다.
모디의 인도국민당(BJP)이 540석 중 370석을 얻을 것이란 기대와 달리 294석을 얻어 2014년 이후 처음으로 단독으로 과반의석을 얻는 데 실패했다.
10년 전 총리에 오른 모디는 경제성장이란 성과를 내세우며 압승을 노렸지만 유권자들의 마음은 사로잡지 못한 셈이다. 높은 경제성장률과 해외 기업의 투자 유치에 성공했음에도 빈부격차, 소수민족 차별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는 분석이다.
모디 총리가 유세 과정에서 인구 80%를 차지하는 절대 다수 힌두교 표심만을 노리고 무슬림을 의도적으로 차별했다는 논란도 일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런 결과에 대해 “인도 민주주의의 승리”라며 “충격적 선거 결과는 결국 인도를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갈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30년간 집권당이 바뀌지 않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선 최초의 연립정부가 탄생했다. 남아공에서 ‘만년 여당’ 자리를 지켜 온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지난 5월 총선에서 처음 과반 득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민주화의 아버지’ 넬슨 만델라를 배출한 ANC의 존재감은 독보적이었다. 이번 총선에선 달랐다. ANC는 40% 득표율도 겨우 넘기며 참패했다. 실업률이 32%를 넘어서고, 툭하면 정전이 벌어지는 데다 정치권의 부정부패가 반복되면서 유권자들은 등을 돌렸다.
6월 프랑스 총선에선 ‘막판 대역전’이 펼쳐졌다.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은 선거 기간 내내 여론조사 지지율 1위를 달렸다. 지난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집권당을 누르고 압승했고, 총선 1차 투표에서도 1위에 오르며 돌풍을 일으켰다. 이번에야말로 ‘극우 내각’ 또는 ‘극우 총리’가 나올 수 있다는 전망이 쏟아졌지만, 마지막 관문인 2차 투표에서 반전이 벌어졌다.
승승장구하던 RN은 3위로 밀렸고, 좌파 연합이 1위를 차지했다. 극우 집권을 막기 위해서라면 좌도, 우도 없다는 일념으로 유권자들이 뭉친 결과다. 외신들은 “충격적인 반전” “프랑스 선거 역사상 가장 놀라운 결과”라는 반응이다.
RN과 그 지지자들은 이번 결과가 좌파연합과 범여권의 “부자연스러운 동맹”이 만든 결과라고 깎아내렸다. 1차 투표 이후 2, 3위 정당이 후보 단일화를 한 게 불공정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BBC방송은 극우 집권을 막기 위해 적극 투표에 나선 유권자가 만든 변화라고 짚으면서 “프랑스인들은 극우 집권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금 보여줬다”고 전했다.
한편, EU는 6~9일 유럽의회 선거를 치렀다. 중도우파 유럽인민당(EPP)이 188석, 중도좌파 사회민주진보동맹(S&D)이 133석을 차지해 1, 2당을 지켰다. 그러나 강경우파 성향의 유럽보수와개혁(ECR)이 83석으로, 극우 정치그룹 ‘정체성과민주주의(ID)’가 58석을 얻는 등 극우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멕시코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나왔다. 오는 10월 1일 취임을 앞둔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당선인이다. 차기 정부 요직에 잇따라 여성들을 앉히고 있다. 지금까지 발표한 장관 후보자 18명 중 9명이 여성으로, 나머지 자리에 모두 남성이 임명된다고 해도 여성이 절반에 육박하게 된다. 멕시코는 그동안 사회 전반에 걸친 남성 중심적인 분위기 때문에 ‘마초의 나라’로 알려져 왔다. 셰인바움은 특히 주목도가 높은 요직에 여성들을 잇따라 기용하고 있다.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세계 열강들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면서 핵심 부서로 부상한 환경자원부 장관에는 현재 외교 사령탑인 알리시아 바르세나 외교 장관이 기용됐다. 외교 경험을 살려 국익을 최대화한 ‘자원 외교전’을 펼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셰인바움은 여러 차례 “여성들의 지지 덕분에 당선됐다”고 언급했고, 6월부터 순차적으로 주요 부처 장관 여성들을 잇따라 지명해 왔다. 그러나 셰인바움의 정치적 아버지 격인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AMLO) 대통령을 보좌하는 현 내각 인사 최소 9명이 다음 정부에서도 일하게 되면서 차기 정부 출범 뒤에도 오브라도르가 ‘상왕’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멕시코 대통령은 6년 단임제라 오브라도르는 재선에 도전하지 못했다.
영국은 지난 7월 5일 찰스 3세 즉위 후 첫 선거를 치렀다. 노동당은 411석을 확보해 과반의석을 달성했으며 반대로 보수당은 121석 확보에 그쳐 약 100년여 만에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다.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으로 국민들의 불안감이 높아졌고 보수당이 잇따른 스캔들로 민심을 잃으면서 창당 이래 최악의 결과를 맞았다. 브렉시트 이후 급증한 난민, 의료·교통 등 공공 서비스 붕괴 등으로 억눌렸던 민심이 대폭발하며 정권 심판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조기총선 승부수를 던졌던 리시 수낵 영국 전 총리는 자리에서 물러났고 노동당 대표였던 키어 스타머가 5일 신임 총리로 취임했다. 스타머 총리는 취임 직후 정책 대전환을 선포했다. 특히 ‘간판 정책’인 르완다 난민 이송 계획 폐기를 선언했고, 주요 공약이었던 공공의료 서비스 회복을 다시 약속했다.
슈퍼선거의 해에서 가장 주목되는 남은 주요 선거는 역시 11월 5일 미국 대선이다. 세계 최강대국의 선거인 만큼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슈퍼 선거의 해’ 2024년은 어떻게 마무리될까?
선거권을 가진 미국 시민은 2억 7000만명 정도이지만 미국 대선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민주당 후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경쟁 구도는 여성과 남성의 맞대결이라는 점 때문에 자연스럽게 2016년 대선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8년 전처럼 트럼프 후보가 승리하게 될지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당시 클린턴 후보의 당선 가능성은 70%대로 트럼프 후보보다 월등히 높았다. 선거 직전까지 두어 곳을 빼고는 모든 여론조사에서 클린턴 후보의 지지율과 당선 가능성이 우위였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 보니 트럼프의 승리. 득표율에서는 트럼프 후보가 46.1%로, 클린턴 후보보다 2.1% 포인트 낮았지만 미국 선거 특유의 승자독식 시스템으로 트럼프 후보가 선거인단 304명을 확보하면서 클린턴(227명) 후보를 눌렀다.
이 대선에서 거의 모든 예측이 틀린 배경으로 주류 언론이 민심을 읽지 못한 탓을 꼽는다.
이번 대선은 2016년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해리스 부통령은 당내 환경에서 훨씬 유리한 고지에 있다. 2016년 민주당전당대회(DNC)는 클린턴 후보와 당내 경선에서 경쟁한 샌더스 의원 지지자들이 뒤엉켜 혼란스러웠다. 이번 DNC에선 전현직 대통령과 샌더스·낸시 펠로시 등 고령 지도부에 3040기수들까지 민주당 전체가 하나의 목표를 위해 뭉쳤다. 한 달전 공화당 전당대회 때 트럼프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낸 마이크 펜스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민심은 트럼프의 미국과 그의 공염불도 겪었다. 그렇다고 미국 경제 상황과 국제 안보 환경은 집권당인 민주당에 우호적이지도 않다.
외교군사 변수는 우크라이나와 중동 전쟁으로, 각각 반격과 인질 협상이 교착 국면이라 민주당의 악재로 평가된다. 헤즈볼라, 예멘 후티 반군 등 이란을 대리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정파와 이스라엘의 대립이 격화하면서 민주당에는 한층 위기다. 베트남전 당시인 1968년 반전 여론 여파로 대선 후보에서 사퇴한 린든 존슨 전 대통령, 1952년 한국전쟁 교착에 따른 지지율 하락으로 경선을 포기한 해리 트루먼 전 대통령의 사례도 있다.
장·단기 경제 성과는 바이든 행정부의 인플레이션 억제에 대한 국민들 체감도가 높지 않지만 금리 인하 효과에 따라 여론이 반전될 수도 있다.
반면 도전자의 카리스마 면에선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고, 사법 리스크 역시 무마되거나 지지자들이 개의치 않는 상황이라 공화당에 다소 유리하다.
두 후보의 지지율은 박빙이다. 70대 후반 백인 남성 트럼프, 60세 흑인·아시아계 여성 해리스, 미 대선 사상 가장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 두 후보의 지지율 경쟁은 이제 본격적으로 출발한 셈이다.
[김병수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9호 (2024년 10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