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환경 에너지 도입’ ‘전기차로 인한 내연기관의 소멸’.
2023년 벽두에 글로벌 자동차 시장의 상황을 요약한 내용이다. 세계 각국이 탄소중립에 따른 탄소 절감을 내세우며 두 가지 화두를 내세웠다. 이를 위해 탄소배출권 등을 협의하고 RE100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친환경 정책을 쏟아냈다. 하지만 결국 주춤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가 만만치 않았던 탓이다. 에너지 전략화는 각국의 경제와 생태계를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친환경 에너지 정책은 잠시 뒤로 밀렸다. 전세계 주요 분석기관은 2023년과 2024년 자동차 시장을 분석하며 각각 3~5% 수준의 성장을 예상했다. 2023년은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빠르게 회복해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2024년에는 상대적으로 완만한 성장세가 예상된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전기차(BEV)와 플러그인하이브리드(PHEV)를 중심으로 속도를 높이던 친환경차 시장에 성장 둔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물론 전기차 생산량과 판매량은 매년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2023년에도 전년 대비 전기차 등록대수가 늘었다. 에너지 전문 시장조사업체인 SNE리서치에 따르면 2023년 1월부터 9월까지 글로벌 시장에 등록된 전기차는 697만 대. 전년 동기 대비 31.4% 성장했다. 같은 기간 PHEV는 278만 대가 판매되며 50.2% 늘었다. 그럼에도 업계 관계자들은 “부족하다”고 말한다. 일반적인 기준에선 높은 성장률로 비칠 수 있지만 지난 수년간의 성장률과 비교하면 턱없이 모자란다는 의미다.
실제로 전기차는 2020년 25%, 2021년 115.3%, 2022년 62.6%나 성장했다. 나열해보면 성장 속도가 둔화하는 추세다. 테슬라를 비롯해 GM, 포드 등 주요 완성차 기업들은 그동안 전기차 제조에 쏟아붓던 막대한 자금에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포드는 120억달러 규모의 전기차 투자계획을 연기했다. GM은 지난 10월 2년간 전기차 40만 대를 생산하겠다는 계획을 폐기하고 일본 혼다와 50억달러(약 6조8000억원) 규모의 전기차 공동개발 계획도 철회하기로 했다. 테슬라는 2023년 3분기에 순이익이 전년 대비 44% 감소하는 어닝쇼크(실적 악화)에 빠졌다. 충전 인프라 부족, 가격 부담, 보조금 축소 등의 여파로 줄어든 수요는 전기차 가격 하락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여전히 내연기관 차량에 비해 비싼 가격이 발목을 잡았다. 수익이 악화되자 기업들은 투자를 재검토하거나 연기했다. 완성차 기업의 이 같은 움직임은 전기차 배터리 등 차량 공급망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장 상황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
2023년 11월 8일 FKI타워에서 열린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의 ‘2023 KAIDA 자동차 정책세미나’에선 “글로벌 전기차 시장의 성장세가 둔화하고 있지만 이는 일시적인 조정 현상으로 장기적으로 전기차 모델 수 증가와 가격 하향 안정화, 충전 기술 개선, 소비자 인식 개선으로 수요 회복이 뒤따를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이날 ‘탄소중립과 미래차 시대, 파워트레인별 수요전망’이란 주제로 발표에 나선 이항구 자동차융합 기술원장은 “전기차 수요 둔화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전제하며 “신기술과 신제품이 도입되면 일반적으로 초반에 침체기를 겪다가 본격적인 도입이 진행되는데, 현재 전기차는 소비자 불만이 고조되는 등 일시적인 침체를 겪는 단계”라고 설명했다. 이 원장은 “2025년 전 세계 하이브리드 차량 수요는 806만 대, 전기차는 1900만 대에 이를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전기차 모델 수 증가, 충전 하부구조 증가 및 속도 개선, 소비자 인식 개선, 가격 동등성에 따라 증가세는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한 SNE리서치도 “잠시 주춤하고 있는 전기차 시장은 가격 중심 트렌드가 유지되는 동안 중저가형 세그먼트 전기차 시장에 수요가 집중되며 지속적인 성장이 예상된다”고 전했다.
전기차 시장에 대한 장기적인 성장성에 각 완성차 업체들도 장기적인 안목으로 대응하고 있다. 우선 현대차그룹은 지난 10월 울산공장 내에 연간 생산량 20만 대 규모의 전기차 전용 공장을 마련, 차세대 모빌리티 개발·생산을 본격화하겠다고 밝혔다. 현대차가 국내에 새 공장을 짓는 건 1996년 아산공장 이후 29년 만이다. 지난 11월 13일 울산 공장에서 기공식을 개최한 현대차는 앞으로 2조원을 투자해 축구장 80개에 달하는 54만8000㎡ 규모의 EV 전용 공장을 짓게 된다. 현재 주행시험장으로 가동 중인 부지다. EV 전용 공장은 오는 2025년 완공되며 2026년 1분기부터 양산이 시작된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기공식 현장에서 “울산 EV 전용공장은 앞으로 50년, 전동화 시대를 향한 또 다른 시작”이라며 “이 자리에서 100년 기업에 대한 꿈을 나누게 돼 영광”이라고 말했다. 정 회장은 “과거 최고의 차를 만들겠다는 꿈이 오늘날 울산을 자동차 공업 도시로 만든 것처럼 현대차는 EV 전용공장을 시작으로 울산이 전동화 시대를 주도하는 혁신 모빌리티 도시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강조했다. 현대차는 이 공장에 싱가포르 글로벌 혁신센터(HMGICS)에서 개발한 제조 혁신 플랫폼을 적용해 근로자의 안전과 편의성, 효율적 작업을 고려한 미래형 공장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2023년 미국 시장에서 가장 많은 전기차를 판매한 테슬라는 중국 시장에서 자동차 가격을 인상했다. 중국 내 전기차 기업들이 판매 목표 달성을 위해 할인경쟁에 나선 것과는 정반대 행보였다. 지난 10월 테슬라는 웨이보 공식 계정에 모델3 신형 롱레인지와 모델Y 롱레인지 가격을 각각 1500위안, 2500위안 인상한다고 밝혔다. 테슬라는 지난 5월에도 전 모델의 가격을 2000위안씩 일괄적으로 인상한 바 있다. 비슷한 시기에 독일에선 3000만원대의 전기차 생산 계획이 전해지기도 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가 독일의 기가팩토리를 방문했을 때 직원들에게 이곳에서 2만5000유로대의 전기차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혔다”는 것이다. 테슬라는 현재 독일 공장의 생산 규모를 2배로 증설하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일본 토요타의 고급브랜드인 렉서스는 2030년까지 모든 차종에 전기차 모델을 도입할 계획이다. 와타나베 다카시 렉서스인터내셔널 사장은 “전기차의 진정한 가치는 차에 대한 상상을 실제로 구현할 수 있다는 점”이라며 “이 실현의 계기는 소프트웨어이며, 그런 면에서 제네시스에 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언급했다. 토요타는 현재 세계 각국 상황에 맞는 탄소중립을 위해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PHEV, 수소연료전지차를 모두 제공하는 멀티 패스웨이 전동화 전략을 진행하고 있다. 렉서스는 지난 재팬모빌리티쇼에서 항속거리 800㎞의 전기 세단 콘셉트카 ‘LF-ZC’를 선보이며 전동화 의지를 밝혔다.
국내 자동차 시장에선 전기차 판매량 둔화에 이어 하이브리드차의 판매량 증가가 화제다. 카이즈유데이터연구소에 따르면 2023년 1월부터 11월까지 국내에서 판매된 하이브리드 차량은 총 28만3365대. 12월 판매량을 합하면 사상 처음으로 30만 대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에선 하이브리드 차량이 경유(디젤)차를 앞지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11월까지 판매량에서 경유차가 하이브리드보다 약 5000대 앞서고 있지만 성장세를 고려하면 충분히 역전도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하이브리드 차량의 판매량은 2019년 10만4112대에서 2022년 21만1304대로 5년 새 3배 가까이 증가했다. 국산 완성차 업체의 한 관계자는 “내연기관보다 연비가 높고 친환경차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게 하이브리드 차량의 장점 중 하나”라며 “전기차의 단점 중 하나가 충전 리스크인데 하이브리드는 이러한 관점에서도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국내 시장에도 하이브리드 모델 출시가 줄을 잇고 있다.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을 추가한 기아의 ‘카니발’은 사전계약자 10명 중 9명이 하이브리드 모델을 선택할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현대차의 5세대 ‘싼타페’도 가솔린과 하이브리드로만 제품 라인업을 구성했다. 수입차 업계에선 토요타가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2023년 들어서만 ‘라브4’ ‘크라운’ ‘하이랜더’ ‘알파드’ 등 대표적인 하이브리드 모델을 선보였고, 12월엔 5세대 ‘프리우스’까지 투입했다. 프리우스는 세계 최초의 양산형 하이브리드 자동차로 신형 모델은 공인연비가 20.9㎞/ℓ에 달한다.
그런가 하면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3000만원대 보급형 전기차 출시 계획을 언급하면서 2024년에는 본격적인 반값 전기차 시대가 올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폭스바겐은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인 중국에서 보급형 전기차 생산을 위한 새로운 플랫폼을 개발한다고 발표했다. 17만위안(약 3100만원) 이하 전기차 4개 차종을 개발하고, 신모델 출시 기간도 4년에서 2년6개월로 축소한다는 계획이다. 폭스바겐은 2023년 3월에도 소형 전기SUV ‘ID.2 ALL’을 공개하며 2025년 약 2만5000유로(약 3500만원)에 출시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스텔란티스는 저가 배터리를 장착해 전기차 가격을 낮춘다는 방침이다. 최근 중국 CATL과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공급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스텔란티스는 지프·피아트 등의 브랜드에도 가격 경쟁력이 있는 전기차 라인업을 구축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GM도 ‘볼트EV’ 신모델에 LFP 배터리 탑재를 예고했다. 르노는 2024년 2월 출시를 앞둔 ‘르노5 E-테크’를 3500만원대에 판매할 계획이다. 수입차업계의 한 관계자는 “가성비를 앞세운 중국산 전기차의 공세에 글로벌 완성차 브랜드들도 대응 차원에서 3000만원대 전기차 출시를 들고 나왔다”며 “전기차 라인업이 확대되는 2024년 하반기에는 지금보다 50% 낮은 수준의 전기차 모델이 주류를 이룰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했다. 이호 한국자동차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전기차 시장은 정부 정책에 많은 영향을 받는 특징이 있는데 2024년에 예정된 정치 이벤트 등으로 정책 변화 가능성이 존재해 불확실성이 예상된다”며 “2024년 11월에 예정된 미국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그간의 정책을 크게 강화하거나 역으로 크게 후퇴하는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를 전하기도 했다. 이 책임연구원은 “최근 유럽에서도 중국 전기차 영향력 확대에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한 정책이 추진되며 전반적인 시장과 경쟁구도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안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