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았다.”
지난 11월11일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엿새 뒤인 17일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면서 성과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짧지만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답변이었다.
건강 문제와 G20 정상회담 그리고 비즈니스 서밋 개최 시기와 겹쳐 이 회장은 당초 아시안게임 참석을 포기했다. 2018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유치위) 측에서 출국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회장은 동행하지 않는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갑자기 일정이 바뀌었다. 13일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를 상대로 한 유치위 측의 프레젠테이션을 비롯해 아시아 각국의 IOC 위원들이 참석하는 아시안게임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치위 측에서도 이 회장의 참석을 간곡히 부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광저우에서 이 회장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은 없다. 수영 200m에서 우승한 박태환 선수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준 것이 전부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국가적 역량을 쏟아 붓고, IOC 위원인 이 회장의 역할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에 비하면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동계올림픽 유치 위한 특별사면·복권
지난해 12월31일 정부는 경제인으로는 이례적으로 이 회장을 단독 특별사면·복권시켰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힘써달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이 회장의 단독 특별사면·복권에 대해 “국가적 관점에서 이 전 회장의 사면을 결심했다”며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IOC 위원인 이 전 회장의 활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강원도민과 경제계·체육계의 청원이 있었다”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이귀남 법무장관 역시 “내년 2월 밴쿠버 IOC 총회가 한 달여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 전 회장의 IOC 위원 자격 회복을 도와 적극적인 유치활동에 나서도록 할 필요가 있다”며 “사면심사위원회 위원들도 만장일치로 사면에 찬성했다”고 말했다.
특별사면·복권으로 이 회장은 2008년 7월 조세포탈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으면서 스스로 직무정지를 요청했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직에도 복귀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이 회장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문대성 선수 위원을 제외하면 이 회장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일한 IOC 위원이기 때문이다.
올림픽 개최 도시는 IOC 위원들의 투표로 결정된다. 완벽한 준비와 국민의 유치 열망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IOC 위원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표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IOC 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면 유치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지난 두 번의 실패 원인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두 번 모두 1차 투표에서는 앞섰지만 과반을 넘지 못해 결선투표에서 역전당했던 경험은 이의 방증이다. 준비 상황과 국민적 염원에서는 경쟁도시들보다 앞섰지만 IOC 위원들의 마음을 끝까지 다잡지 못해 실패했던 것이다. 신무철 유치위 홍보처장은 “나름대로 분석해놓은 요인은 있지만 패자는 말이 없는 법”이라며 “다만 실패를 교훈삼아 열심히 뛰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음을 잡아야 하는 IOC 위원은 쉽사리 만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다. 세계 어디를 가든 ‘국빈’ 대우를 받는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같은 IOC 위원이라야만 가능하다. 즉 IOC 위원이 아닌 이들은 IOC 총회나 올림픽 관련 행사에서도 접근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심지어 해당 국가 올림픽유치위원장도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현재 유치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사업보다 유치위 활동에 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고 있지만 투표권을 갖고 있는 IOC 위원들을 직접 접촉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IOC 규정에 따르면 비 IOC 위원이 IOC 위원을 만나기 위해서는 사전허가를 받아야 하고 만난 후에는 리포트도 작성해야 한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조 회장이 유치위원장으로서 한 치의 소홀함도 없지만 분명히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IOC 위원들을 상대로 한 유치활동은 이건희 회장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으며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조 회장은 대한항공 회장으로 폭넓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어 유치위 위원장으로서는 어느 누구보다 적격자라는 데 이견이 없다. 그러나 조 회장이 가지지 못한 IOC 내의 네트워크는 이건희 회장이 가지고 있다.
유치위와 대한항공 관계자들이 “조 회장의 보폭을 넓혀주는 역할을 이 회장에게 기대하고 있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이 회장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딜레마의 다른 표현이다. 삼성이 IOC의 공식후원사라는 점이 그것이다. 유치위 한 관계자는 “IOC 규정에 따르면 공식후원사 회장은 특정 도시를 지원하는 활동이 금지돼 있다”며 “비록 이건희 회장이 대한민국의 IOC 위원이지만 IOC 공식후원사인 삼성의 회장이라는 점이 맹점”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경쟁도시인 뮌헨의 올림픽유치위원회와 독일 언론은 이를 적극 활용하며 유치위의 활동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있다. 이 회장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조금이라도 허점이 보이면 바로 공론화시키거나 문제 삼고 있다. 언제든 IOC에 고발하는 것도 불사할 태세다.
대한항공의 국제빙상연맹(ISU) 후원계약과 삼성전자의 국제조정연맹(FISA) 후원계약은 비근한 사례다. IOC 윤리위원회가 동계올림픽 유치에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조사에 들어간 것이다. 오타비오 친콴타 ISU 회장과 데니스 오스왈도 FISA 회장이 모두 IOC 위원이어서 조양호 유치위원장이 회장으로 있는 대한항공이나 이건희 위원이 회장으로 있는 삼성전자가 후원하는 것이 문제될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특히 오스왈도 회장은 토마스 바흐 IOC 수석부위원장이자 뮌헨동계올림픽유치위원장과 함께 차기 IOC 위원장으로 거론될 만큼 영향력이 지대한 인물이다.
대한항공은 결국 동계올림픽 개최지가 결정된 후에 후원하는 것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삼성전자의 경우 오스왈도 회장의 부인과 적극적인 설명으로 후원계약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바흐 부위원장과 독일 언론은 한시라도 이 회장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
이 같은 제약과 견제, 감시에도 이 회장은 스포츠 외교에 헌신하겠다는 집념을 불태우고 있다. 사면·복권 당시 삼성 측이 “개최지가 결정되는 2011년 7월까지 스포츠 외교에 전념할 것”이라고 밝힌 대로다. 이 회장은 사면·복권되자마자 2010년 1월8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에 전·현직 IOC 위원 3명을 초청해 삼성전자 전시관을 둘러보게 했고, “전·현직 IOC 위원과 저녁을 같이 했다”고 말했다. 곧바로 2월에는 밴쿠버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IOC 총회에 참석하는 등 IOC 위원으로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사면·복권 후 유치활동 위해 지구촌 강행군
지난 4월에는 보름 동안 유럽 지역을 돌며 유치 활동에 나섰다. 지난 7월 조석래 회장의 사의로 공석이 된 전경련 회장직도 고사하며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활동에 매진할 뜻을 내비쳤다. 8월4일에는 부인 홍라희 여사와 함께 호주로 떠나 IOC 위원들을 만나 유치활동을 펼쳤고, 이어 14~26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회 유스 올림픽(Youth Olympic)을 참관, 전 세계에서 모인 IOC 위원들을 만나 평창을 홍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0월20~24일 멕시코 아카풀코에서 열린 세계국가올림픽총연합(ANOC)총회에 이광재 강원도지사, 박용성 대한체육회장, 조양호 위원장과 함께 참석했다.
이 회장은 유치위 측이 “G20 정상회의 관계로 이 회장은 동행하지 않을 예정”이라던 광저우 아시안게임 행사에도 참석했다. 박태환 선수의 목에 직접 금메달을 걸어주기도 했다.
이 회장이 이처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까닭은 지난 두 번의 실패가 ‘스포츠 외교의 부재’ 탓이라고 평가받기 때문이다. 두 번 다 결선투표에서 역전당한 것도 그렇거니와 특히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전에서 러시아 소치에 역전패당한 것이 결정타였다.
당시 대부분 사람은 평창의 우세를 점쳤다. 막판까지 경합을 벌이긴 했지만 두 번째 도전하는 평창에 더 높은 점수를 주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을 완전히 뒤집었다.
소치의 역전승으로 끝나자 해외 언론은 ‘소치의 동계올림픽 유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덕분’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AFP·로이터통신 등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소치 성공의 원동력”이라고 평가했다. AFP통신은 “푸틴이 소치에 역사적 승리를 가져왔다”며 “유치단의 ‘주장’으로 통하는 푸틴이 최종 프레젠테이션을 이끌었고, (러시아어 대신) 영어를 써가며 발제한 것이 IOC 위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 전했다.
러시아는 푸틴 대통령이 동계올림픽 유치활동에 직접 발 벗고 나섰다. 최종 프레젠테이션을, 그것도 자국어가 아닌 영어로 IOC 위원들을 설득한 것이 주효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국제 스포츠계 거물 스미르노프 IOC 위원의 치밀한 로비, 유럽 천연가스 공급 점유율 1위인 러시아 천연가스 기업 가즈프롬의 보이지 않는 압력 등이 힘을 보탰다. 여기에 맞설 무기가 없었던 평창은 평가에서는 앞서고 표 대결에서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는 이건희 회장의 세 번째 도전이다. 지난 두 번은 국가 차원에서 전폭적인 지원이 부족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다르다.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사항인 데다, 지방정부에서 추진하던 것에서 발전해 중앙정부에서 적극 협력하고 있다.
유치활동과 관련, 이 회장의 계획과 향후 일정에 대한 삼성 측 공식 입장은 ‘비밀’이다. 삼성 측 한 관계자는 “IOC 윤리위의 제소 소지가 있어 자세히 말하기 곤란하다”고 전했다. 삼성의 한 고위 임원은 “그동안 뮌헨이 우위였지만 최근 들어 간격을 많이 좁혔다”며 “해볼 만하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뮌헨 유리하지만 해볼 만하다”
경쟁도시 뮌헨에는 강력한 차기 IOC 위원장으로 거론되는 토마스 바흐 IOC 수석부위원장이 유치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IOC 내에서 그의 영향력은 자크 로게 위원장 다음으로 막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제 스포츠계에 밝은 한 인사는 “바흐 수석부위원장이 IOC 위원장에 나오지 않을 테니 뮌헨을 밀어달라고 할 정도로 유치활동에 적극적”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초반 강세를 보였던 뮌헨과 달리 분위기가 점차 평창 쪽으로 기울고 있다”면서 “조양호 위원장과 이건희 회장 모두 올인하고 있어 이번만큼은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한편에서는 독일 뮌헨과 경쟁하는 같은 유럽권의 프랑스 안시에 대한 평가가 다소 낮다는 점을 아쉬워하고 있다. 뮌헨과 안시가 서로 치열하게 경쟁할 경우 유럽 IOC 위원들의 표가 갈려 상대적으로 평창이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다. 그러나 뮌헨의 강세를 안시가 따라가질 못하고 있다는 게 국제 스포츠계의 평가다.
특히 유럽과 북미로 양분돼 있던 동계올림픽 개최 도시가 이제는 아시아에서 한 번 할 때가 됐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유치위의 슬로건이 ‘New Horizons’(새로운 지평)인 것도 이 때문이다.
IOC 위원들도 두 번 연속 역전패를 안긴 평창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한올림픽위원회 한 관계자는 “이 회장은 IOC 내의 이런 분위기와 평창에 대한 IOC 위원들의 미안한 마음을 적극 공략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유치위가 활동할 수 있는 크고 작은 행사는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신무철 홍보처장은 “내년 2월14~20일 IOC 조사평가위원회의 현지실사와 5월 IOC 본부가 있는 스위스 로잔에서의 후보도시 테크니컬 브리핑이 가장 비중 있는 일정”이라고 전했다. 동계올림픽 유치전의 본 게임은 이 두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시기, 즉 4~6월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평창 앞에 탄탄대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는 12월2일 발표되는 2022년 월드컵 개최지 선정 여부가 변수다. 이날 우리나라는 2022년 월드컵 개최지로 선정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때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는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된다. 2014년 대회와 관련, 평창이 탈락한 이유가 바로 인도 IOC 위원들이 결선투표 때 돌아섰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2014년 아시안게임 개최지 선정을 놓고 인천과 경합했던 인도 델리가 참패하면서 인도의 IOC 위원들이 반발했던 것이다. ‘대륙 안배 차원에서 하는 국제 스포츠 대회를 한국이 다 가져가느냐’는 비난이 그것이다.
2022년 월드컵 한국 유치 땐 평창에 불리
2018 동계올림픽과 2022 월드컵을 동시에 가져오는 것은 사실 무리라는 게 국내외 스포츠계의 평가다. 그러나 유치위 측은 “월드컵과 올림픽은 별개 사안”이라며 “2014 월드컵과 2016 올림픽을 동시에 가져간 브라질을 보라”고 말했다.
어쨌든 이건희 회장의 동계올림픽 유치 프로젝트는 이미 가동됐다. 이 프로젝트에는 동계올림픽 유치 외에도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동계올림픽 유치활동에는 이 회장의 자존심, 국가와 사회에 대한 책무, 삼성과 이 회장에 대한 여론 등이 모두 한 덩어리로 묶여 있다”고 말했다.
이건희 회장의 2018 동계올림픽 유치 프로젝트가 2011년 7월6일 남아공 더반에서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지 세계가 집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