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와인의 전통은 굉장히 오래됐습니다. 이탈리아는 전 국토의 대부분 지역에서 와인을 생산할 수 있을 만큼 ‘와인강국’이죠.그럼에도 프랑스에 밀린 까닭은 정책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프랑스는 국가 차원에서 와인 산업을 관리하고 지원했던 반면이탈리아는 그렇지 못했습니다.”와인업계 한 전문가의 말이다.이탈리아 와인의 역사는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또 그 종류와맛도 굉장히 다양하다. 그러나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와인 종주국’의 자리는 프랑스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와인은 인정받지도 못했고 이탈리아가 와인을 그렇게 많이 생산하는지 알려지지도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대부분 이탈리아 내수시장에서 유통됐다. 세계시장에서 낄 자리가 없었다.
이탈리아 와인의 역사와 명성을 되찾다
이탈리아 와인의 역사와 지위를 되찾아온 기업이 안티노리다. 안티노리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기업이다. 지금까지는서기 1000년에 설립한 프랑스 와인 회사 ‘샤토 드 굴랭’이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회사로 기록돼 있지만 안티노리의 역사도그에 못지않다.안티노리의 역사는 700년이 넘었다. 12세기 토스카나 지역에 정착한 안티노리 가문은 13세기 초 피렌체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피렌체는 상업의 발달로 번창한 대표 지역이었다.피렌체로 옮긴 안티노리 가문은 곧바로 동업자 조합인 길드에 가입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안티노리 가문은 와인과 거리가 멀었다.그들이 가입한 길드는 비단 길드, 모직물 길드 등이었다. 당시에는 ‘와인 길드’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길드 가입을 발판삼아 안티노리 가문은 피렌체 지역에서 은행계의 거물로 두각을 나타냈다.13세기 말 유럽에서 마침내 와인 길드가 만들어졌다. 유럽에서 와인을 생산하거나 와인을 파는 상인은 모두 와인 길드에 가입했다.안티노리 가문이 와인 길드에 가입한 것은 1385년. 조반니 디 피에로 안티노리였다. 이런저런 사업을 펼쳐오던 안티노리 가문은 와인 길드의 가입을 계기로 와인 생산과 판매야말로 가문의 천직임을 알게 된다.
안티노리 와인의 출발은 길드 가입 연도인 1385년으로 되어 있다.또 창업주 역시 길드 가입을 주도한 조반니 디 피에로 안티노리로되어 있다. 하지만 조반니는 8대 수장으로 인식되고 있다.안티노리가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180년이다. 하지만 조반니가 길드에 가입한 1385년을 공식 원년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비록 공식적인 출발은 1385년이지만 이전부터 와인을 생산해왔기때문에 회사 자체적으로는 필리포 안티노리를 1대로 삼는 것이다.조반니가 8대 수장으로 기록돼 있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현재 안티노리를 맡고 있는 피에로는 25대며 피에로의 세 딸은 26대가 된다. 다시 말해 안티노리는 26대손까지 한 대도 끊어지지 않고 700년을 넘게 이어온 가족기업이다.안티노리 가문은 중세 유럽, 특히 피렌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메디치 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안티노리의 11대수장 토마조는 메디치 가의 대사 역할을 맡으며 안티노리의 이름을 프랑스와 벨기에 등지까지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에도안티노리 가문과 메디치 가문의 관계는 계속됐다.
메디치 가와 관계 중세 피렌체 명품 와인
(아래) 안티노리 가문 문장
안티노리의 본사 역할을 하는 팔라조 안티노리도 1506년 12대 니콜로가 로렌조 데 메디치의 도움을 받아 매입한 것이다. 지금도 팔라조 안티노리는 피렌체식 궁전 형태를 띠고 있다.사실, 20세기 중반까지 이탈리아 와인이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으나 안티노리 와인만은 예외였다. 중세 이탈리아에서 안티노리 와인은 많은 사람의 극찬을 받았다. 안티노리 와인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반부터다.18대인 니콜로 프란체스코에 이르러 안티노리의 와인은 비로소 품질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니콜로 프란체스코가 원로원 회원, 피렌체 법원의 회계감사관 등 정부의 중요한 지위에 올랐던 것도 원동력 중 하나였다.
이때 당시 안티노리 와인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르네상스 시대 시인이자 와인 감식가로 알려져 있던 프란체스코 레디가 쓴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레디는 <토스카나의 주신>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저기, 안티노리에서, 잘 익은 검은 포도에서 순수하게 얻어낸, 잔 속에서 뛰어오르며 약동하는 것이여.”
니콜로 프란체스코의 아들, 즉 19대 수장인 빈첸치오 안티노리에 이르러 안티노리 와인의 명성은 더 높아졌다. 당시 교황 클레멘트 12세는 빈첸치오의 숙부, 즉 빈첸치오의 아버지 니콜로 프란체스코의 동생이었다. 빈첸치오는 숙부인 교황 클레멘트 12세에게 종종 와인을 선물했다고 한다.
(아래) 안티노리 가족들
19세기에 들어와 안티노리 와인은 더 큰 사랑을 받았다. 메디치 가와 관계를 맺으며 피렌체의 유명 가문으로 올라선 안티노리 가문은 이탈리아 통일 후 통일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후작에 해당하는 ‘마르케제’ 작위를 받았다. 귀족의 반열에 올라선 안티노리 가문은 가문의 문장과 함께 좌우명을 새겨 넣을 수 있게 됐다. 이때 안티노리 가문이 채택한 좌우명은 ‘뛰어난 품질을 추구하라’였다. 사업가 가문다운 좌우명이다.
마르케제 작위와 좌우명 덕분이었을까. 1800년대 후반, 안티노리 와인은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1873년 빈 세계박람회에서 안티노리 와인은 ‘명품’ 증서를 받기도 했다. 23대 수장 피에로와 그의 동생 로도비코 등 안티노리 가 사람들은 토스카나에 있는 네 개 농장을 현대화했다.
이탈리아의 유명 오페라 작곡가 푸치니는 안티노리에서 샴페인 형식의 와인이 처음 생산됐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당신이 귀족을 위한 샴페인을 만들었다고 하던데요.” 푸치니와 피에로는 오랜 친구 사이였다.
비록 명성은 자자했으나 안티노리의 사업 규모는 보잘것없었다. 생산량도 그렇거니와 운영방식도 조직적이지 않았다. 안티노리가 얻은 명성이란 것도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내에 한정돼 있었다. 안티노리의 사업을 현대화·조직화하고 규모를 늘린 사람은 바로 23대 피에로와 그의 동생 로도비코다.
23대 피에로와 로도비코가 안티노리의 현대화·조직화의 토대를 닦았다면, 24대 니콜로는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닦은 토대에서 사업적으로 다양한 시도를 했다. 여러 가지 연구를 수행했으며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혁신적인 제품들을 출시했다. 니콜로가 ‘혁신의 귀재’로 불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끼안티 와인을 프랑스 보르도 지방 메독에서 온 와인과 섞어 만든 제품을 출시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니콜로가 출시한 혁신 제품 중 대표적인 것은 빌라 안티노리 끼안티 클라시코, 빌라 안티노리 비앙코, 안티노리 오르비에토 클라시코 등이다.
니콜로는 1966년 불쑥 아들 피에로 안티노리에게 가문의 사업을 물려주고 일선에서 후퇴했다. 니콜로의 기력이 아직 왕성한 시기였고 그의 사업·경영 능력도 이미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 터여서 그의 이선후퇴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게다가 그가 사업체를 물려준 아들 피에로의 나이는 불과 28세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니콜로가 사업을 아들에게 물려준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만류하고 나선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니콜로는 단호했다.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안티노리 가문은 위태로운 지경에 빠져버렸다. 중세 이탈리아에서 ‘명품’으로 이름나 있던 안티노리 와인의 자부심과 700년 넘게 이어온 전통이 흔들릴 위기에 처한 것이다. 또 와인 제조방식과 농장 운영방식이 구시대적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해 노동력을 확보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니콜로의 결단은 이런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태의연함을 버리고 새롭게 출발하려는 생각에서였다. 비록 28세에 불과했지만 아들 피에로의 능력을 일찍 간파한 니콜로의 혜안도 한몫을 했다. 본인이 할 수 없는 쇄신을 젊은 아들은 능히 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니콜로의 판단은 정확했다. 25대 피에로는 아버지에게 사업을 물려받자마자 모든 것을 쇄신하기 시작했다. 포도 재배부터 생산, 유통까지 피에로가 쇄신하지 않은 부분이 없을 정도다.
이탈리아 와인의 세계화·고급화에 앞장
티냐넬로 포도원 전경
20세기 중반까지 세계시장에서 별 볼일 없었던 안티노리 와인, 이탈리아 와인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한 사람도 25대 피에로다. 와인과 와인 사업에 대한 지식, 정열이 누구보다 넘쳐났던 피에로는 안티노리 와인과 이탈리아 와인 산업의 세계화·고급화에 앞장섰다.
피에로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포도 품종을 재배해 와인을 생산했다. 또 이탈리아 고유의 와인 제조방식에서 벗어나 고급 품종과 혼합을 시도했다. 그는 아버지 니콜로가 했던 시도보다 한발 앞서나갔다. 끊임없는 도전정신과 실험정신, 과감한 투자로 최고급 와인을 만들기 위해 애썼다. 그 결과, 오늘날 안티노리 와인은 전 세계 유명 와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더불어 이탈리아 와인 산업도 세계가 인정하는 수준으로 올라섰다. ‘이탈리아 와인의 역사를 바꾼 와인의 거장’으로 불리는 피에로의 노력의 결실이다.
오늘날 안티노리는 토스카나 지방을 비롯해 롬바르디아, 움브리아, 폴리아 지방 등에 걸쳐 최고 수준의 포도원을 소유하고 있다. 최고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최고 포도원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는 피에로의 소신에 기인한다.
또 ‘솔라리아 1997 빈티지’가 전 세계 와인 중 가장 좋은 와인으로 꼽히기도 하는 등 안티노리 와인은 과거 이탈리아 왕족과 귀족이 찬사하던 ‘명품’의 지위를 되찾고 있다.
앞서 언급한 와인업계 한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몇 년 전만 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현재 우리나라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이탈리아 와인의 인기가 대단합니다. 저가 와인 이미지도 없어졌습니다. 고가 와인도 제법 많죠. 이제야 이탈리아 와인이 제자리를 찾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