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잘 있어, 그리고 고마웠어’라고 말했다. 그렇게 그를 떠나보냈다. 어디 우리들의 헤어짐이 이번뿐이랴. 수없는 헤어짐이 있어 왔고, 그동안 우리들의 만남을 고마워해야 할 낮과 밤은 또 얼마였던가. 그 담배와 헤어졌다.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이십대 그 무렵에는 일 년이면 한두 달씩 담배를 끊었었다. 담배를 끊는다는 것을 내 의지력의 시험처럼 생각하면서였다. 더 나이가 든 후에는 사흘에 두 갑 정도의 담배를 피웠다. 그러면서 조금씩 그가 가진 맛, 나는 그것을 늘 신비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 신비와 가까워지게 되었다.
담배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애틋한 추억도 많다. 존경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지내온 고등학교 선배가 춘천에 있다. 신문사 논설위원을 마지막으로 현업에서 물러난 노화남 형이다. 젊은 날, 그 형을 오래 만나지 못하고 지내다가 서울에서의 삶에 지치고 지쳐서 찾아간 적이 있었다. 밤늦은 시간, 술잔을 나누다 만취한 채 그 형의 하숙에서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형은 이미 외출을 하고, 머리맡에 한 장의 메모지가 있었다. 담배 세 개비와 함께 화살표를 그어 가면서 화장실은 어느 쪽이라고 적혀 있는 종이였다. 가난한 청년시절이었다. 담배 한 갑이 아니라 세 개비를 뽑아 놓고 간 형의 마음이 내 마음 속에 너울거렸다. 늘 친아우처럼 보살펴 주던 형이었기에 세 개비의 담배가 나에 대한 애정의 잣대 같이 느껴졌다. 그랬던 담배가 악마처럼 나를 덮친 것은 흔히 말하는 ‘한수산 필화사건’부터였다.
이틀 동안의 고문으로 초죽음이 된 아침, 간수 비슷한 감시병이 창문도 없는 독방 취조실로 들어와서 먹고 싶거나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잡혀 올 때 영치된 지갑 속의 돈으로 그걸 사다 주겠다고 했다. 그때 다른 것은 말고 담배를 사 달라고 하면서 나 때문에 끌려와 함께 고초를 받고 있는 나머지 네 사람에게도 한 갑씩 사다 주면 좋겠다는 부탁을 했었다. 그때 그 감시병인지 뭔지 하는 녀석이 씨부렁거렸다.
“이 새끼들 웃기는 놈들이네. 저 쪽 놈도 여러 명에게 담배를 사다 주라고 하던데… 모조리 똑같은 소리를 하네.”
전기고문을 받아 가지 빛으로 탄 몸을 하고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찾아온 정신착란은, 몇 십 년을 건너온 지금 와서 생각해도 공포 그것이었다. 뒤에 아무도 없는데도 “지금 뭐라고 했어?”라며 고개 돌려 아내를 찾지 않나, 한밤에 잠에서 깨어 “비가 쏟아지는데 거실 창문을 열어놓고 자다니!”라며 뛰어나가질 않나, 사흘에 두 갑 정도를 피던 담배가 하루에 세 갑으로 늘어난 것이 그때였다.
불안에 시달리는 강박관념이 가져온 가련함이었다. 하루 60개비의 담배를 피워댄다는 것은 하루 종일 담배를 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살았다. 피우는 담배와 따로 새 담배 하나를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살았으니… 그 후의 나는 담배의 노예였다.
내가 좋아하는 극작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와 <유리동물원>의 테네시 윌리엄스는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던 8년 동안 누군가와 만날 때면 술병이 바라보이는 자리가 아니면 앉아 있지 조차 못했다고 한다. 그처럼 나도 피우는 담배와 또 한 갑의 담배를 몸에 지니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나날들의 비참함이라니.
그 담배를 처음 끊을 때였다. 뉴욕 쪽에 강연이 있어서 미국으로 출국하던 날, 공항 보안검사대 앞에서 젊은 직원에게 물었다.
“담배 피세요?”
“네.”
“그럼 이거 가지세요. 저 오늘부터 담배 끊습니다.”
가지고 있던 담배와 라이터를 그에게 건네주고 뉴욕으로 떠났다. 그리고 미국에서 보낸 9일 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귀국 후에도 세 달을 담배를 끊고 지냈다. 아, 나도 담배를 끊을 수 있구나. 그건 나 자신에 대한 감동 그것이었다.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이렇게 쉽게 담배를 끊을 수 있다면 좀 더 피다가 언제든 그냥 후딱 끊자. 이런 따위 생각을 하면서 슬금슬금 다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를 어쩔 것인가.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게 되자 양이 더 늘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루에 세 갑 반쯤으로.
그 후, 절체절명으로 이제는 담배를 끊어야 한다는 의사의 경고가 날아들었다. 그래서 끊었다. 그때의 금연에는, 아직 결혼도 시키지 못한 아들과 딸이 있는데 아비로서 자식들이 짝지어 사는 모습이라도 보고 죽어야 하지 않나 하는 절실함이 한 몫을 했다.
그런 얼마 후였다. 친척 할머니가, 몇 달 전까지도 이야기를 나누며 지내던 그 할머니가 갑자기 치매증상을 보이며 양로병원에 입원을 했다.
그런데 그 진행 속도가 가공할 정도로 빨라서 갑작스레 인지능력을 잃어가면서 식물인간이 되어 버렸다. 참 아름다웠고, 품격 있었고, 불의를 보면 머리끝까지 화를 냈고, 써놓은 글을 읽듯이 논리정연하게 말하던 일제시대 숙명여고 출신이었다. 육군사관학교 첫 졸업생 가운데 제일 먼저 전사한 호국영령의 미망인인 그녀가 그토록 쉽게 무너져서… 먹여주는 밥을 흘려가며 받아먹게 변한 모습을 보고 돌아오던 날 결심 아닌 결심을 했다.
나는 어느 날 탁! 죽자. 저건 인간의 삶에 대한 모욕이며 저주다. 내가 어쩌다 저렇게 삶을 마감하게 된다면 어쩔 것인가. 담배도 마구 피우고 일도 죽기 살기로 하며 미쳐서 살다가 어느 날 가 버리자. 그러면서 대놓고 다시 담배를 피웠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비웃을 일이지만 나로서는 결연하기 짝이 없는 삶에 대한 도전, 그건 포기가 아닌 도전이었다.
그 후, 내 몸을 보살펴 주는 모든 의사들이 그것 밖에 처방이 없다는 듯이, “담배 끊으세요” 라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위가 어떻게 되어도, 심혈관에 문제가 생겨도, 좌골신경통인지 우골신경통(!)인지 다리가 시려도 의사 ‘슨상님’들은 그저 “담배 끊으세요”가 처방의 제1조였다. 마치 담배를 피우면 고속도로에 서 있다가 덤프트럭에 받혀서 박살이 나 죽을 거고 담배를 끊으면 꽃 피고 과일향기 가득한 낙원에서 살 거라는 듯. 그리고… 지금,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서도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혹 지금 이 글을 읽으며 담배를 피우는 분이 계시다면 이 말만은 전해드리고 싶다. 금연에는 가족 특히 부인의 도움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 다들 담배는 그냥 한 순간에 죽기살기로 끊어야 한다고들 하지만 사람의 성격 나름이니, 나처럼 끊었다 피웠다를 반복하다가 어느 날 끊어 버리는 것도 방법의 하나라는 것. 담배를 피웠던 담당의사의 말에 의하면 금연 후 십 년이 지났는데도 꿈속에서 담배를 피울 때가 있었다니… 그토록 끈질기고 야비하고 가장 마음의 약한 부분을 너무 잘 알고 속삭이는 담배는 악마 그 자체라는 것!
담배여, 잘 있어. 지난 봄 흩날리는 벚꽃 그늘에 서서 한모금의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바라보던 세상의 황홀한 아름다움을 금연자들이 어찌 알겠느냐고 달래면서, 떠나가는 그를 위로해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