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하겠다는 아내를 말리지 못한 남자는 유죄일까요, 무죄일까요. “차라리 자살하는 것이 낫다”며 늘 죽음을 입에 자주 올렸던 아내는, 끝내 어두운 산속으로 홀로 들어가 실종됐습니다. 목숨을 버린 것이지요. 성년이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남은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떠났으니, 남편의 죄보다는 아내의 죄가 더 클 겁니다.
아내가 자살을 택한 이유는 극심한 우울증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선택은 오히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유의 결과’였습니다.
폐허의 지옥으로 변한 세상, 삶을 지속하다간 무뢰한들에게 ‘강간’과 ‘죽임’을 당할 게 분명하다는 실존적인 사실이 아내를 자살로 이끈 동인이었습니다. 그런 아내는 심지어 남편과 아들이 자살에 동참하기를 희망했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아이 때문에 차마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를 지키는 일이 남자에겐 지상의 유일한 사명(使命)이었으니까요.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의 저명한 소설가 고(故) 코맥 매카시의 대표 소설 ‘로드’ 설정입니다. 문명이 파괴된 세상을 배경으로 아들과 고난의 여행을 떠난 남자를 뒤쫓는 걸작이지요. ‘로드’는 존 힐코트 감독이 동명 영화 <더 로드>로 연출하며 널리 알려졌습니다. 살인, 식인, 겁탈, 노예 등을 소재 삼았기에 흔한 디스토피아 작품처럼 보이는 측면도 없지 않지만, 막상 소설을 유심히 읽고 영화를 세세히 들여다보면 이 작품은 종교적인 상징과 은유가 한둘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에게 명작으로 남은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소설 ‘로드’와 영화 ‘더 로드’에 관한 종교학자들의 성서적 해석을 기저에 두고, 영화와 소설에 담긴 장치가 낳은 결과들의 의미 차를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아내가 자살하자 남자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따뜻한 남쪽으로 떠납니다. 거리 풍경은 그 자체로 지옥이었습니다. 잿빛 얼굴을 한 시체가 흔했고, 그 시체에서 쏟아진 내장이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악인들이 인육을 ‘삶아 먹은’ 흔적이었지요. 잡아먹을 떠돌이 짐승조차 눈에 띄지 않아 식량이 완전히 바닥나고, 마실 물조차 구할 길이 전혀 없자 미친 사람들은 인육을 탐냈습니다.
버석거리는 모래가 불어와 모공마다 찌들어가고 병균으로 더럽혀진 시커먼 때가 손톱에 덕지덕지 끼고 몸과 외투에서 쉰내가 났습니다. 그러나 식수조차 주어지지 않는 끔찍한 환경에서 ‘씻는다’는 건 말 그대로 사치였습니다. 해가 더 이상 뜨지 않는 하늘, 그리고 식인(食人)이 생존 조건이 된 세상, 그건 생지옥이었습니다. 세상은 완벽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런 세상엔 야만인이 된 악인 무리가 광견병에 걸린 개떼처럼 어슬렁거렸습니다. 악인들은 사람 신체를 한갓 ‘식량’으로 대했고 지하실에 사람들을 가둔 뒤 팔다리를 잘라 배를 채웠습니다.
잿빛 세상에선 인간이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타인을 살육한 뒤 인육을 삼키는 포식자, 아무리 생존을 위협받더라도 타인을 해치지 않으려 분투하다 결국 잡아먹히는 피식자.
길을 떠난 남자와 아이도 살해될 위험에 노출됐습니다. 악인에게 발각되면 남녀 불문 겁탈을 당한 뒤 노예로 부려지거나 식인의 대상이 되다 보니, 남자는 “차라리 따뜻한 남쪽 바다에 도착하면 이번 겨울을 버틸 수 있다”는 희망을 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남자와 아이는 자신들을 해하려던 악인 한 명을 권총으로 살해합니다. 또 유일했던 식량과 낡은 소지품을 훔쳐간 도둑을 추적해 똑같은 방식으로 복수하기도 하지요.
고난의 여정 끝에 남자와 아이는 해변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남자를 기다렸던 건 결국 죽음이었습니다. 여정에서 입은 상처 때문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함을 알고, 남자는 그곳이 자신이 ‘죽을 자리’임을 예감합니다. 아이의 손을 잡은 남자는 눈물을 흘리다 숨을 거둡니다.
코맥 매카시의 이 작품이 다른 아포칼립스 소설과 차별화되는 이유는,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 표정을 들여다보는 수준을 넘어서기 때문일 겁니다.
주인공 남자를 단지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묘사하는 대신, 그에게 ‘인류를 대신해 죽음을 맞은 성서의 예수’라는 이미지를 덧씌우기 때문이지요.
왜 그럴까요. 남자는 ‘희생’의 주체이고, 아이는 그 희생의 결과 살아남은 선한 인류라는 알레고리를 형성합니다.
거기에 ‘인간이 아무리 고통에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않는 신’이라는 설정을 비롯해 침몰해버린 노아의 방주로 해석되는 유조선 ‘파하라 데 에스페란사(희망의 새란 뜻)’가 작품에 등장하기도 합니다. 남자가 아이와 함께 가고자 했던 남쪽의 광대한 해변은 일종의 에덴동산이자 천국이며, 남자가 끄는 수레는 그런 점에서 골고다의 십자가이기도 하지요.
주인공 남자의 사인은 종아리에 맞은 활로 인한 파상풍이었는데, 금속 활은 성서 속의 예수가 옆구리에 창을 찔린 바를 상기시킵니다. 바다에 도착하기 전까지 남자가 겪은 고행의 여정은 묵묵히 희생을 감내하며 ‘광야’와 ‘골고다’를 걸었던 예수를 기억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소설과 영화는 큰 의미 차를 형성합니다. 소설 ‘로드’엔 한 노인이 나옵니다. 코맥 매카시의 이 작품 속에서 이름이 등장되는 유일한 인물로, 아흔 살 노인의 이름은 ‘엘리’였습니다. 코맥 매카시 연구자들은 이 노인을 구약성경 열왕기에 등장하는 ‘선지자 엘리야’로 해석합니다. 이름이 비슷하기도 하고, 주인공 남자와 신에 관해 토론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실재 성서에서 엘리야는 신의 존재를 세상에 확언했습니다. 소설 ‘로드’의 엘리는 현대의 선지자로서 신의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점이 다소 다르긴 하지만요. “신은 없소”(193쪽),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에서는 신도 살 수가 없소”(196쪽)란 엘리의 말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소설과 영화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노인 엘리가 남자에게만 발설하는 자신에 관한 정보 가운데, 중대한 차이점이 발견됩니다.
소설과 달리 영화 ‘더 로드’에서, 엘리는 오래 전 죽은 자기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들려줍니다. “나도 예전에 아들이 있었지. 내 아들이었어.”(영화 속 엘리의 대사) 이때 주인공 남자가 그의 아들이 어떻게 사망했는지를 엘리에게 질문하자, 엘리는 잠시 침묵으로 허공을 쳐다보며 답합니다. “말할 수 없네.”
이 장면은 소설 ‘로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노인 엘리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설정은 영화에만 삽입됐습니다. 이는 무슨 의미일까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영화 속에서 노인 엘리가 말한 아들이 바로 ‘예수’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신의 입장(예수의 ‘아버지’)에서 죄악으로 물든 인간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한 아들 예수의 죽음은, 신조차 차마 입에 올리기 꺼려지는 끔찍한 기억이었을 겁니다. 자신이 만든 세상에서 인간은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올려 죽음에 이르게 했으니까요. 둘째, 영화 연출자가 엘리를 신으로 읽히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면 노인 엘리가 원작 소설에 등장하지도 않는 아들의 죽음을 언급하거나 아들의 사망 원인을 묻는 질문에 침묵할 이유가 없습니다. 구약성경 열왕기를 아무리 살펴봐도 엘리야에게 가족이나 아들이 있었다는 구절도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정리하자면 ‘노인 엘리-주인공 남자-아이’는 소설 ‘로드’에선 ‘선지자 엘리야-예수-인류’의 도식으로 은유되지만, 영화 ‘더 로드’에선 ‘신-예수-인류’로 변용됐다는 결론이 타당해집니다.
그렇다면 영화 ‘더 로드’ 속 노인 엘리는. 바로 ‘인간의 고통에 응답하지 못한 채 자신 역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무력한 신’을 은유하게 됩니다. 오래 전 아들의 죽음을 막아낼 수 없었고 자신 역시 ‘삶과 죽음의 결정권자’로서의 권능을 주장할 수 없을 만큼 나약해진 신. 그게 바로 엘리인 것이지요. (소설과 달리) 영화 ‘더 로드’의 주인공 남자는, 남쪽 바다로 향하는 여정 도중에, 자신이 그토록 찾아내고 싶었던 신과 결국 얼굴을 맞대고 대화한 것입니다.
‘희생’이라는 관점에서 주인공 남자를 예수로 보는 의견이 합당하다면 주인공 남자와 노인 엘리가 나누는 대화는 예수와 아버지(신)가 나누는 대화가 되겠지요. 두 사람의 질문을 응축하면 “왜 신은 인류의 고통에 응답하지 않는가”인데, 영화 ‘더 로드’는 둘의 대화를 통해 ‘무력한 신’이라는 주제를 형상화했습니다.
희생자 예수가 무력한 신(아버지)을 만나 확인한 건 ‘신의 죽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영화 ‘더 로드’는 무력한 신, 죽은 신을 대신할 인류 본연의 가치, 즉 신의 대체물을 구현하는 데 성공하기도 합니다.
그건 바로 인간의 선(善)입니다.
주인공 남자의 아들, 즉 아이는 끝내 인류에게 남겨져야 할 진짜 가치를 타인과 공유합니다. 이 부분은 소설에서도 동시적으로 표현되는 주제이지요. 인간 사회를 유지시키는 건 예수라는 메시아의 현재적인 재림(再臨)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남은 마지막 선의, 즉 영화에서 표현되기로는 ‘불’입니다.
‘예수의 재림’이란 성서 속 고유한 주제는, 메시아의 육체적인 부활이 아니라 결국 인간의 마음속에서 결코 꺼지지 않는 한줌의 선의임을 원작자 코맥 매카시는 발견합니다.
“신의 숨이 그(아이, 주인공 남자의 아들)의 숨이고 그 숨은 세세토록 사람에서 사람에게로(악인이 아닌 선한 사람들) 건네진다고.”(323쪽) 세세토록 이어지는 인류 내면의 영원한 선, 그게 바로 인간에게 필요한 최대치의 가치임을 코맥 매카시는 발견한 게 아닐까요.
[김유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