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모방은 나쁘고, 창조는 좋다고 생각한다. 짝퉁을 무시하고, 모조를 경멸하고, 카피를 얕잡는다. 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어떻게든 도전정신과 창의성을 불어넣으려 애쓴다. 특히, 요즘 한국 경제가 장기 침체 위기에 빠져들 조짐이 선연해지자 창조적 인재를 갈망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금까진 선진국을 모방하는 빠른 추격자 전략이 통했으나, 이제는 다른 나라를 앞서서 이끌어가는 창조적 선도자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혁신적이지 않다. 프랑스 사회학자 가브리엘 타르드의 <모방의 법칙>(문예출판사)에 따르면, 모방은 인간의 본성이다. 타인의 모습을 흉내내고 행동을 베끼며, 성과를 훔치고 가져와서 삶의 모델로 삼는다. “자발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통해 사고하는 것보다 피곤”하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덜 들이고 살아갈 수 있다면, 인간은 기꺼이 그 길을 좇는다.
타르드는 인간 사회가 모방의 공동체라고 말한다. 우리는 흉내내기 위해 모이고, 모방하기 위해 함께 산다. 우리 행동은 대부분 모방으로 이뤄져 있다. 아이들은 어른을 관찰하고 학습해 생존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한다. 어떻게 걷고 말하고 노는지를 배우고, 무엇이 좋은 행동이고 나쁜 행동인지를 학습한다. 모방 없는 창조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모방은 이해가 혁신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다윈의 미완성 교향곡>(동아시아)에서 케빈 랠런드 영국 세인트앤드루스대 교수는 진화생물학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모방이 어떻게 작동하고, 창조가 탄생하는지를 보여준다. 아주 작은 초파리에서부터 거대한 고래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물은 다른 개체를 모방함으로써 생존에 유용한 기술과 지식을 얻는다. 동물들은 먹이 획득, 서식처 확보, 짝짓기 등에서 관찰과 모방을 통한 사회적 학습을 시행착오 같은 비사회적 학습(창조)보다 훨씬 더 선호한다. 모방은 타인의 성과를 슬쩍 약탈한다. 관찰을 통해서 실패한 방법을 거르고 성공한 방법을 베껴서 생존에 유리한 정보를 저렴하게 얻어낸다. 물론, 약점이 있다. 자칫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정보, 관찰 모델한테만 적합한 정보를 베낄 수 있다. 특히, 가속적 변화가 일어나는 환경에선 모방의 실패 확률도 높아진다. 관찰하고 흉내내는 동안 주변 상황이 달라질 수 있어서다. 이럴 땐 질높은 정보를 얻으려면 위험한 환경에 뛰어들어 직접 지식을 생산함으로써 행동을 수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시행착오를 통해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내는 데는 큰 비용이 든다. 안전한 서식처를 찾으려면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먹이를 새로 찾으려면 위험 물질을 먹어야 하며, 포식자를 밝히려면 잡아먹힐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물론, 이런 과정을 거쳐 얻은 지식은 정확하고 믿을 만하며, 무엇보다 자신에게 최적화되어 있다. 혁신의 가치는 크고 달콤하다. 각각 장단점이 있기에 동물들은 모방할 때와 창조할 때를 전략적으로 선택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모방의 전략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 시행착오를 통한 학습 비용이 클 때 우리는 모방한다.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으면 시행착오가 유리하다. 저비용으로 정확하고 적합한 최신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거나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면, 섣부른 혁신보다 다른 이를 흉내 내는 편이 낫다. 실패 비용이 크기 때문이다.
둘째, 불확실할 때 우리는 모방한다. 익숙한 환경에선 경험이 유리하다. 문제도, 해결책도 빤한 일상에선 학습 비용을 들이지 않도록 좋은 습관 형성이 중요하다. 반면, 낯선 환경에 처해 무엇이 최선인지 모를 땐 다른 이들을 베껴야 한다. 나대다간 회복 못 할 피해를 볼 수 있다.
셋째, 불만족스러울 때 우리는 모방한다. 현재 행동을 반복해 돌아오는 몫이 크다면 그 행동을 계속한다. 그러나 불만족의 반복은 대개 보상을 점점 나쁘게 하므로, 타인을 관찰해서 더 큰 보상을 주는 행동을 수집하고, 나에게 적합한 행동을 습득할 가망성을 높이는 게 유리하다. 더 나은 보상을 원하면 다른 이를 흉내내야 한다.
넷째, 다른 믿을 만한 정보가 없을 때 우리는 다수의 행동을 따른다. 시행착오나 관찰을 통해서 얻은 확실한 정보가 이미 있을 땐 그에 맞춰 행하는 게 좋다. 반면 정보의 유용성이 모호할 땐 다수 행동을 모방하거나 유명 개체를 모방하거나 성공 인물을 모방하는 게 좋다. 관습과 전통, 지위와 성취 등 사회적 단서를 좇는 건 경험상 무척 효율적 행동이다.
우리는 무차별적으로 모방하지 않는다. 보상이 줄어들 때 모방하고, 얼마나 오래된 정보인지에 바탕을 두고 현재 정보를 평가하며, 앞으로 그 정보가 얼마나 유용할지를 판단해 모방 효율을 끌어올린다. 모방은 길게는 수천년 이상 축적된 정보 필터링, 즉 엄선된 성공 모델만 이용하므로 아주 높은 확률로 큰 보상을 가져다준다. 반면, 혁신의 수익성은 전반적으로 낮다. 새로운 행동 패턴을 발명하거나 기존 행동을 맥락에 맞게 변형하려면 높은 실패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모방만으로 버틸 수 있다면, 인간은 스스로 배우지 않는다. 아주 빨리 조금만 학습한 후 죽을 때까지 그걸 반복해 써먹는 게 가장 이득이 높으니 이는 당연하다. 아무리 혁신을 강조해도, 사람들이 좀처럼 모험에 나서지 않는 이유다. 따라서 혁신을 북돋우고 창조를 활성화하려면 특별한 제도가 필요하다.
마이클 오브라이언 미국 미주리대 교수와 알렉스 벤틀리 영국 브리스틀대 교수의 <모방 사회>(교보문고)에 따르면, 혁신은 소수의 똑똑한 천재에 달린 게 아니라 집단 모방의 힘을 활성화하는 데 달려 있다. 모방이 없다면, 지식은 축적되지 않는다. 배우지 않는데 문화나 역사가 필요할 리 없다. 수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각자 다른 지식이 담겨 있고, 그들 사이에 교류와 소통이 활발하다면, 우리는 모방을 통해서 언제든 다른 사람의 정보와 지식을 활용할 수 있다. 모방은 성공했던 지식을 더 많이 누적해 다채로운 상황에서 활용할 가능성을 높인다. 이는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집단 전체의 적응성을 극적으로 높여준다. 따라서 혁신은 모방의 제도화, 즉 학습과 교육의 누적에서 피어난 꽃이다. 모든 발명과 발견은 과거의 성취를 모방해 이루어지기에, 인류 역사란 사실상 모방의 기나긴 연속체나 다름없다. 다수의 모방과 점진적 변이가 문명을 진화시킨다. “천재 1명이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란 말은 틀렸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골방의 천재가 갑자기 ‘유레카’를 외치면서 홀로 떠올린 게 아니다. 다양성을 증진하고 소통을 활성화하며 학습을 일상화하면, 창조는 그 안에서 저절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천재의 발굴과 육성보다 집단 모방을 둘러싼 제도의 개선에 집중해야 혁신을 이룰 수 있다. 무엇보다 혁신이 실패와 고통 없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고통의 비용을 사회적으로 감당하고 도전에 나섰다 실패한 이들을 돌보지 않는 공동체에서 창조는 좀처럼 생겨나지 않는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읽기 중독자. 출판평론가. 민음사에서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로 주로 읽기와 쓰기, 출판과 미디어에 대한 생각의 도구들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