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태 기자의 ‘영화와 소설 사이’] 애플TV+ 드라마 <파친코> vs 이민진 소설 <파친코> | 야쿠자의 피, 선지자 호세아… <파친코> 원작에만 있는 것들
김유태 기자
입력 : 2022.04.26 17:27:01
수정 : 2022.04.26 17:27:36
애플TV+ 오리지널 드라마 <파친코>가 모습을 드러낸 뒤 출판 시장에는 <파친코> 원작을 둘러싸고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2018년 출간된 원작 <파친코>가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출판사 문학사상과의 판권 계약 연장 여부가 불투명해지면서 서점에서 판매가 중단됐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 정상을 차지한 소설이 서점가에서 자취를 감추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만약 새 출판사를 찾더라도 번역과 편집 과정을 거치려면 수개월의 시간이 필요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추천도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전미도서상 최종후보작인 소설 <파친코>는 도대체 어떤 힘을 내재하고 있고, 또 무엇이 다르기에 매번 화제의 중심에 서는 걸까.
2021년 9월 <파친코>를 쓴 이민진 작가와의 단독 인터뷰를 앞두고 소설을 깊이 완독한 바 있다. 당시 인터뷰에서 이민진 작가는 “나는 늘 역사적 불평등을 탐구하고 싶었고, <파친코>는 그에 대한 내 대답이었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애플TV+ 드라마 <파친코>가 개봉한 직후 소설을 다시 펼쳐 읽으며 밑줄을 그어봤다. 드라마 <파친코>를 아직 보지 않은 분은 <파친코>를 꼭 정주행한 뒤 이 글을 읽기를 권한다. 아이폰 유저가 아닌 안드로이드폰 유저는 구글 브라우저 크롬에서 원활하게 시청 가능하다.
▶두 개의 시간, 하나의 삶
이민진 작가가 구상부터 탈고까지 30년 걸려 완성한 소설 <파친코>는 ‘선자’라는 이름의 한국인 여성이 겪은 한평생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 없다’는 강렬한 소설 첫 문장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선자와 그의 가족은 역사의 파고에 휩쓸려 한국, 일본, 미국을 옮겨 다니며 살아간다.
절름발이 아버지와 하숙집을 하는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선자는 예기치 못한 임신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자이니치(在日·일본으로 이주한 한국인)가 된다. 자이니치라는 이유로 거지나 돼지보다도 못한 취급을 당하던 선자의 아들은 역시 ‘오직 살아남기 위해’ 불법과 탈법을 오가는 파친코 객장을 운영해 생계를 책임지며, 그렇게 아버지가 치욕을 참아가며 벌어들인 돈으로 아이비리그를 졸업하고 미국 금융회사에 다니던 선자의 손자는 다시 ‘오직 살아남기 위해’ 일본으로 귀국한 뒤 자이니치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마주한다. 드라마 <파친코>는 원작의 등장인물과 그들의 상황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지만 과감하게 삭제하거나 명장면을 대거 추가해 각색에 꽤 공을 들였다.
크게 달라진 점은 선자와 그의 가족이 겪은 일을 시간 순으로 들여다보는 소설과 달리, 드라마는 선자가 겪은 ‘두 개의 시간’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이다. 2021년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에 빛나는 배우 윤여정이 연기한 ‘노년의 선자’가 중심에 서고, 그 맞은편에서는 1995년생 배우 김민하가 열연한 ‘젊은 선자’의 삶에 카메라는 렌즈를 들이댄다. 한 여성과 그가 먹여 살리고자 했던 가족의 일대기에 초점을 맞추는 소설과 달리, 드라마는 한 여성의 삶을 동시 조망함으로써 젊은 선자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퍼즐처럼 끼워 맞추며 극을 진행시킨다.
▶한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
선자의 애인이자 아이 아버지인 한수는 진심으로 선자를 사랑했다. 하지만 한수에게는 사랑하지는 않아도 지켜야 할 가족들이 일본에 있었다. 마침 선자 하숙집에 머물던 젊은 목사 이삭은 혼전임신 소식을 우연히 듣고, 세인의 손가락질로 더는 조선 땅에서 살 수 없게 된 선자와의 혼인을 결심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삭의 형이 사는 오사카로 함께 떠난다.
드라마에선 이삭의 이런 결심의 과정이 압축적으로 묘사돼 있다. 원작엔 이삭의 난해한 결심에 관한 스토리가 자세하다. 이삭의 선택은 소설에서 대단히 종교적인 행위로 나타난다. 평양 부잣집 아들 이삭은 과거에 세 명의 미혼모가 걸어간 삶과 죽음을 근거리에서 목격한 바 있었다. 그중 두 미혼모는 배가 불러오자 자살했다. 식모였던 또 다른 한 미혼모는 남편이 죽어버렸다고 거짓말하며 자식의 근원을 숨겨야 했다. 비운의 기억을 가진 상황에서 이삭은 선자의 임신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때 이삭은 성경의 한 인물을 떠올린다. 선지자 호세아였다.
성경 ‘호세아서’에 따르면, 선지자 호세아는 ‘행실이 단정하지 못한’ 고멜과 혼인하여 자식을 낳는다. 이삭은 자신이 걸어야 할 삶의 방향이 호세아의 그것을 닮으리라는 사념에 휩싸이게 된다. 이삭은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호세아에게 ‘창녀’와 결혼하여 자기 자식이 아닌 아이들을 양육하게 하셨죠. 선지자 호세아를 가르치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파친코> 제1권, 105쪽) 드라마에서 생략된 이삭과 호세아의 전언은 무엇을 의미할까.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사랑은 가장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삭에게 선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삭은 한수의 자식을 품은 선자를 사랑함으로써 선자를 세속으로부터 구해냈다. 한 여성을 불행으로부터 구원하는 종교적인 행위가 되는 이유다. 이후 이삭은 자신의 삶 전체를 희생양 삼아 선자를 구한다. 성경에서 이삭이 신의 명을 따른 아브라함에 의해 제단의 제물로 바쳐질 뻔했다는 사실까지 떠올린다면 이삭의 이름에 담긴 의미까지도 이해 가능해진다.
▶선자에겐 ‘두 아들’이 있었다
드라마 <파친코>에서 변형된 또 다른 부분은 선자의 아들 모자수의 정체다. 선자는 한수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1931년 이삭과 오사카로 이주했다. 윤여정이 연기한 노년의 선자는 1989년을 살고 있고, 그런 선자 곁엔 파친코 사장 모자수가 항시 어머니를 따른다. 이런 설정만 본다면 모자수는 한수의 아들이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원작을 보면 모자수의 친부는 한수가 아니다. 모자수는 선자의 차남이다. 이삭의 아들인 것이다. 이제 이런 질문이 가능해진다.
‘선자의 첫째 아들, 그러니까 한수와의 관계로 낳은 아들은 어디에 있을까?’
소설 <파친코>에서 선자와 한수가 사랑으로 만든 아이의 이름은 노아였다. 선자는 이삭과 혼인한 뒤 한수의 첫째 노아를 출산했고 이삭과의 임신으로 둘째 모자수를 낳았다. 노아와 모자수는 생부가 다른 형제다.
소설에서 노아의 삶은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비극적으로 그려진다. 젊어서부터 음지를 드나들던 모자수는 일찌감치 파친코의 세계로 진출했지만 형 노아는 와세다대를 다니는 수재일 정도로 양지의 세계에 거주했다. 그런 노아를 아끼며, 친부 한수는 선자의 반대 속에서도 노아의 학비와 생활비를 댄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아버지 한수가 오사카의 흔한 사업가가 아니라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야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노아는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고 와세다대를 자퇴한다. 떠나기 전, 노아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쓴다.
“이 피는, 제 피는 조선인의 것이죠. 그런데 이제는 이 피가 야쿠자의 피라는 걸 알았어요. 내가 야쿠자의 돈을 받아서 학교를 다녔어요. 이 더러운 오명은 절대 씻어낼 수가 없어요.”(<파친코> 제2권, 122~123쪽)
공교롭게도, 촉망받던 미래를 접고 집을 나간 노아가 발을 들이게 되는 세계 역시 파친코 매장이다. 처음부터 음지에 머물렀던 동생 모자수든,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으로 일류대학을 다니던 형 노아든, 자이니치의 운명은 그들의 몸부림 이전부터 정해져 있다는 냉혹한 진실을 은유하고 있다. 노아의 모습이 드라마에서 어떻게 드러날지는 지켜볼 일이다. 소설에서 노아는 자이니치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극심한 회의를 느끼고 결국 권총으로 자살한다.
▶드러내지 않고 말하라
드라마 <파친코>엔 가슴 먹먹해지는 장면이 여럿 나온다. 특히 두 개의 장면이 압권인데 먼저 고국에 처음 돌아간 선자가 뭔가에 홀린 듯 바다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이다. 선자는 유년 시절 자신이 물질하던 바다로 들어가 허공을 바라보며 회환에 잠긴다. 검은 지평선을 바라보는 윤여정의 명연기를 보면 보는 이의 눈물을 자아낸다.
그와 비슷한 감정의 밀도를 가진 <파친코>의 또 다른 장면은, 아버지 묘지를 찾던 선자가 무려 58년 만에 복희 언니와 재회하는 장면이다. 복희는 선자 어머니인 양진이 하숙집에 늘 데리고 있던, 사고무친 고아였다. 젊은 선자는 복희네 자매와 늘 함께했다. 노년의 복희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배우 김영옥이 열연했다. 그 무참한 시절을 겪고도 살아남은 두 여인은 서로를 보자마자 부둥켜안고 꺼이꺼이 운다.
낡은 아파트 거실에 마주앉은 선자에게 복희는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넌지시 이야기한다. 복희는 “자신의 모습이 과거와 달라졌다”고 선자에게 말하며 과거를 이야기한다. ‘좋은 일자리가 있다’는 말에 만주 공장으로 떠났다가 귀국한 복희의 회고는 시종일관 암시적이다. 그래서인지 복희가 만주에서 정확히 어떤 일을 겪었는지가 드라마에선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소설에는 복희가 겪은 젊은 시절의 이야기가 좀 더 자세히 나온다. 선자 어머니 양진이 선자에게 건네는 대화를 보면 복희는 만주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내몰린 것으로 추정된다. 양진은 선자에게 말한다.
“둘 다 만주로 가서 돈을 번다는 생각에 흥분해 있어 가지고 어쩔 수 없었다 아이가. 시장에서 들은 얘긴데 공장으로 일하러 간 여자애들이 어딘가로 끌려가 일본 군인들에게 끔찍한 일을 당했다 카대.”(<파친코> 제2권 11쪽) 이 부분을 감안한다면 복희는 동생 동희와 함께 만주로 떠났다가 비극적인 일을 당하고 귀국해 조용히 지낸 것이다.
드라마의 배경이 1989년임을 상기하면 복희의 드라마 속 저 대사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낳는다. 한국 최초의 위안부 피해자 고 김학순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열고 사실을 증언한 게 1991년이었으니, 1989년은 아직 위안부 피해자가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런 결론이 가능하다. 드라마 <파친코>에서 배우 김영옥이 열연한 복희는 단지 부산 영도 시절 선자의 옛 지인인 복희 언니가 아니라 숨어 지내던 위안부 피해자 신복희다.
선자가 쏟는 눈물은 복희 언니가 겪은 끔찍한 고통에 대한 일말의 위로이며, 소설에 복희와 선자의 재회 장면은 전혀 없다는 점까지 기억한다면 이 장면은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드라마적인 숭고한 변형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