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원의 클래식 포레스트] 오스모 벤스케와 피에타리 잉키넨, 국내 양대 교향악단 장악한 핀란드 지휘자들
입력 : 2022.01.04 15:44:16
수정 : 2022.01.04 15:44:42
근래 세계 주요 교향악단들의 포디엄(Podium·지휘대)을 둘러보면 유독 ‘핀란드 바람’이 거세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의 에사페카 살로넨, 얼마 전까지 독일 쾰른의 서독일 방송교향악단을 이끌었던 유카페카 사라스테, 영국 BBC 심포니의 사카리 오라모, 파리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의 미코 프랑크 등은 이미 잘 알려진 인물들이고, 런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스웨덴의 예테보리 심포니를 동시에 맡고 있는 산투마티아스 로우발리, 아직 20대 중반의 나이에 노르웨이의 오슬로 필하모닉에 이어 프랑스를 대표하는 파리 오케스트라까지 꿰차며 기염을 토한 클라우스 마켈라는 급부상한 신진들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우리나라도 이러한 ‘핀란드 태풍’의 세력권에 합류했는데, 2020년 서울시향(오스모 벤스케)에 이어 2022년 KBS 교향악단(피에타리 잉키넨)까지 핀란드 지휘자를 수장으로 맞아들인 것이다. 바야흐로 국내 양대 교향악단을 장악한 두 핀란드 지휘자의 면면을 살펴보자.
오스모 벤스케 서울시향 음악감독
▶최고의 시벨리우스 스페셜리스트, 오스모 벤스케
1953년생인 오스모 벤스케는 처음에 클라리넷 연주자로 경력을 시작했다. 헬싱키 필하모닉의 수석 클라리네티스트로 활동하면서 시벨리우스 음악원에서 지휘 수업을 병행했고, 1982년 ‘브장송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지휘자로 변신했다. 그의 지휘 경력은 1988년 라티(Lahti) 심포니를 맡으면서 본궤도에 올랐는데, 2008년까지 지속된 임기 동안 스웨덴의 음반사인 비스(BIS) 레이블에서 모국의 국민 작곡가 시벨리우스의 거의 모든 관현악곡과 합창곡을 녹음하여 이 시대 최고의 ‘시벨리우스 권위자’로 등극하는 한편 핀란드의 지방 교향악단에 지나지 않았던 라티 심포니에도 국제적 명성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와 라티 심포니가 합작한 시벨리우스 음반들 가운데 공히 원전판과 개정판을 나란히 수록한 <바이올린 협주곡>(그리스의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다스 카바코스가 협연)과 <교향곡 제5번>은 특히 유명하다. 그는 지금도 명예지휘자로 라티 심포니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벤스케는 2003년 미국 미네소타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일대 전기를 맞이했다. 부임 직후 착수한 베토벤 교향곡 전집 음반(BIS)을 통해서 ‘시벨리우스(및 북유럽 음악) 전문가’라는 영예롭지만 동시에 족쇄와도 같았던 기존 이미지를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막 발간된 ‘베렌라이터 우어텍스트’ 악보를 사용한 일련의 베토벤 녹음에서 그는 참신하고 활기 넘치며 설득력 강한 연주를 일관되게 펼쳐보였고, 실내악적 내밀함과 교향악적 장쾌함을 절묘하게 아우른 해석으로 평단에서 ‘섬세하고 영감을 주며 통찰력 있는 지휘자’라는 평가를 이끌어냈다. 그 뒤로도 시벨리우스 사이클, 말러 사이클 등의 음반들을 내놓으며 꾸준히 평단과 애호가들의 이목을 끌고 있는 그와 미네소타의 파트너십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벤스케의 서울시향 데뷔는 2015년에 이루어졌는데, 당시 선보인 레퍼토리 중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은 특별히 깊은 인상을 남겼다. 기존의 ‘정명훈 스타일’과는 확연히 다른, 보다 참신하고 세밀한 해석과 담백하면서 생동감 넘치는 연주로 대호평을 이끌어냈던 것. 이후 2017년부터 매년 서울시향 무대에 오른 벤스케는 시벨리우스를 비롯하여 닐센, 브람스, 말러, 프로코피예프 등 다양한 레퍼토리에서 한결같이 완성도 높은 연주를 들려주며 신뢰감을 쌓았고, 코로나19 팬데믹 직전인 2020년 2월 말러의 <부활 교향곡>을 지휘하며 서울시향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했다. 그 후 벤스케는 입국할 때마다 자가 격리를 감수해야 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특유의 성실성과 인간미, 연륜에 기초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악단의 중심을 잡아주었다. ‘방역 지침’에 따라 공연 프로그램을 조정해야 하는 악조건도 하이든, 모차르트, 멘델스존, 브람스와 드보르자크의 세레나데, 실내악으로 편곡된 말러 등 편성이 작으면서도 음악적 밀도가 높은 작품들로 대처하며 악단의 내실을 다지는 기회로 활용했고, 상황이 조금 나아진 다음부터는 베토벤과 시벨리우스를 중심으로 근·현대 음악까지 포복을 넓히면서 특유의 담백하고 청량한 음색과 세밀한 앙상블, 열정적인 어프로치로 무장한 ‘벤스케표 서울시향’의 일신된 면모를 한층 본격화하고 있다.
▶독일 음악에 강한 젊은 피, 피에타리 잉키넨
1980년생인 피에타리 잉키넨은 헬싱키 시벨리우스 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지휘를 전공했고, 독일 쾰른 음대의 저명한 바이올린 교수인 자카르 브론을 사사하기도 했다. 일찌감치 소년 시절부터 지휘에 특출한 재능을 드러냈던 잉키넨의 지휘자 경력은 2008년부터 2015년까지 음악감독을 지낸 뉴질랜드 심포니 시절에 본격화했는데, 당시 낙소스(Naxos) 레이블에 남긴 시벨리우스와 라우타바라(핀란드 현대작곡가) 음반들, 그리고 이엠아이(EMI) 레이블에 남긴 바그너 음반 등은 패기만만하면서도 이미 성숙한 면모를 드러냈던 그의 청년기를 증언하고 있다.
잉키넨의 다른 핀란드 지휘자들과 차별화는 바그너, 브람스 등 독일 음악에 대한 이해와 이력이 남다르다는 점을 꼽을 수 있겠다. 그는 스스로 학창 시절 스승이 지휘하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접한 계기로 바그너 음악을 집중 탐구하기 시작했다고 밝힌 바 있고, 쾰른 유학 시절의 경험도 작용했을 것이다. 2013년 호주 멜버른 오페라에서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을 성공리에 지휘하면서 ‘바그너 전문가’ 타이틀을 얻었고, 그 결과 2021년에는 ‘바그너의 성지’인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입성했다.
현재 잉키넨은 독일의 도이치 라디오 필하모닉(DRP·2017년부터)과 일본의 재팬 필하모닉(JPO·2016년부터)을 동시에 맡고 있다. DRP에서는 독일 남서부 악단 고유의 전통을 흡수하며 한층 성숙한 면모를 드러냈고, JPO와는 브람스, 차이콥스키, 말러의 교향곡을 녹음하기도 했다. KBS 교향악단과의 인연은 2006년에 시작되었는데, 당시 26세였던 잉키넨은 시벨리우스의 <투오넬라의 백조> <교향곡 1번>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재차 초청받은 2008년에는 브루크너의 <교향곡 1번>을 지휘했다. 그리고 차기 상임지휘자 물망에 올랐던 2020년 가을 브람스의 <비극적 서곡>과 <교향곡 1번>에서 악단과 긴밀한 호흡을 연출하며 정공법에 입각한 중후한 해석, 풍부한 색채감과 뛰어난 입체감이 부각된 연주로 사뭇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 여세를 몰아 2022년 1월부터 KBS교향악단의 신임 음악감독으로 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KBS 교향악단
2022년 국내 교향악계는 두 핀란드 지휘자 간에 형성될 라이벌 구도를 중심으로 흥미로운 양상을 띨 것으로 전망된다. 벤스케의 노련미와 잉키넨의 신선미, 전형적인 핀란드 스타일의 중견과 독일적 스타일이 가미된 개성을 지닌 신진 간의 대결 구도라 할 수 있겠다. 특히 벤스케가 서울시향과의 무르익은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들려줄 <교향곡 5번>(4월)과 <4번>(5월), 잉키넨과 KBS교향악단의 의욕적인 행보가 돋보일 <레민카이넨 모음곡>(1월)과 <칼레발라 교향곡>(10월) 등 시벨리우스 프로그램에 대한 기대가 크다.
[황장원(음악 칼럼니스트,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