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게임업계가 주요 수출 상대국인 중국 게임 시장 공략에 공을 들이면서 중국 대형 게임사 텐센트의 존재감이 부각되고 있다. 텐센트는 한국 게임사들의 현지 서비스를 돕는 한편 국내 게임시장 직접 진출, 국내 게임사에 대한 지분투자 등을 통해 영향력을 넓히고 있어 주목된다.
중국은 심의를 거친 해외 게임사 게임에는 ‘외자판호’를 발급해 서비스를 허가하고 있다. 한동안 한국산 신작 게임 지식재산권(IP)에 대한 판호 발급을 막아온 중국 당국의 전향적인 움직임에 국내 주요 게임사들은 현지 게임 출시를 줄줄이 예정하고 있다. 지난 1분기 현지에서 출시된 ‘던전앤파이터 모바일’ 등 한국 게임이 중국 현지에서 흥행에 성공하는 사례도 나왔다.
중국 국가신문출판서는 지난 6월 5일 펄어비스의 ‘검은사막’을 비롯한 외산 게임 15종에 대한 외자판호를 발급했다. 검은사막은 전 세계에서 12개 언어로 5000만 명 이상이 즐긴 펄어비스의 대표 IP다. 펄어비스는 중국 텐센트와 퍼블리싱 계약을 체결하고 중국 서비스 준비에 착수했다.
엔씨소프트도 텐센트와 손을 잡았다. 엔씨소프트는 지난해 12월 ‘블레이드앤소울2’의 판호를 발급 받고 현지 퍼블리셔인 텐센트와 함께 연내 출시를 목표로 현지화 작업을 진행중이다.
앞서 넷마블은 텐센트를 현지 배급사로 지난 2월 ‘제2의 나라: 크로스월드’라는 게임을 중국에 출시했다.
넥슨은 중국에서 국민게임으로 불리는 ‘던파’ IP를 기반으로한 ‘던전앤파이터 모바일’을 지난 5월 출시했다. 해당 게임은 출시 직후 중국 앱스토어에서 게임 매출 1위에 오른 이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출시 후 중국 iOS 일일 매출 순위에서 단 세차례를 제외하고 텐센트의 대표 게임 ‘왕자영요’를 제치며 매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 블룸버그는 던전앤파이터 모바일의 중국 시장 출시 첫 주 매출이 1억 4000만달러로 추산됐다고 분석했다. 중국 iOS 시장에서의 약 한 달간의 매출만으로 ‘던전앤파이터 모바일’은 올해 상반기 전 세계 매출 14위에 올라선 것으로 분석됐다. 시장에서는 지금까지 중국 iOS 시장에서 올린 매출은 3억 5000만달러(4846억원)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2022년 3월에 출시된 후 그동안 한국 시장에서 올린 매출의 두 배에 달한다.
K-게임이 주력하는 모바일게임 분야에서 중국은 단일 국가 최대 규모 시장으로 당장 ‘캐시카우’가 절실한 게임사들이 포기하기 어려운 시장으로 분류된다.
게임업계에서는 향후 중국 시장 진출을 꾀하는 한국 게임사들이 텐센트에 계속해서 ‘러브콜’을 보낼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 게임의 중국 진출이 가속화할수록 텐센트와 같은 중국 게임사(배급사)들의 영향력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전망이다.
중국에서 판호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인터넷 문화 경영 허가증’ ‘인터넷 출판 허가증’ 등이 필요한데 이는 해외 업체가 단독으로 발급받을 수 없다. 해외 업체는 단독으로 게임을 유통할 수 없고 중국 내 퍼블리셔와 반드시 협력해야 하는 구조다.
이처럼 현지 업체와 퍼블리싱(배급) 계약을 체결하는 형태로만 진출이 가능한 중국 시장 특성을 감안할 때 IP가 대규모 흥행을 거두지 않는 이상 들인 공력에 비해 실익이 크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IP를 중국 게임사에 단순 판매하는 구조에서는 국산 게임이 현지에서 흥행하더라도 이를 배급한 중국 게임사들이 더 많은 과실을 가져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제기된다.
중국에서 온라인 게임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판호 외에 ICP 허가증이 필요하다. ICP 허가증의 경우 외국인 투자자 지분 점유 비율 50% 이하 요건 등이 요구되고 취득 절차가 매우 복잡한 것으로 알려졌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국 게임사들이 중국 게임 업체에 IP만 파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지적이다.
업계에서는 퍼블리셔와 개발사의 통상적인 배분율은 7 대 3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IP의 영향력에 따라 개발사 배분율이 커질 수 있지만 최소 절반을 현지 배급사가 가져가는 구조다. K-게임이 중국에서 흥행할수록 현지에서 게임을 서비스하는 중국 게임사의 수익이 커지는 셈이다. 현지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흥행까지 좌우할 수 있는 텐센트의 경우 협상에서 우위에 설 수밖에 없다는 게 게임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게임업계 한 관계자는 “판호발급 등 중국 시장 진출이 워낙 어렵고 절차가 복잡한 가운데 퍼블리셔의 힘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국내 게임사들은 현지 퍼블리셔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중국의 거대 게임사들은 이를 게임 개발·인력확보 등에 재투자해 글로벌 시장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글로벌 조사업체 센서타워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모바일 게임 매출 순위 ‘톱10’ 중 6개가 중국산이었다. 특히 중국산 게임은 매출 1~3위를 싹쓸이했다.
한국 게임 IP는 텐센트의 ‘캐시카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센서타워 스토어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기준 텐센트가 서비스하는 모바일 게임과 비게임 앱을 합친 매출의 15%에 가까운 성과가 한국 모바일 게임에서 창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던전앤파이터 모바일’은 6.4%, ‘배틀그라운드’는 5%, ‘승리의 여신: 니케’는 3%의 매출 비중을 차지했다.
넥슨의 ‘던전앤파이터 모바일’을 비롯해 크래프톤의 대표 IP는 ‘배틀그라운드’ 역시 지난 수년간 한국 모바일 게임 중 해외 시장에서 가장 많은 매출과 다운로드 수를 기록하며 텐센트 매출에 기여했다는 분석이다. 또한 시프트업이 개발한 ‘승리의 여신: 니케’는 2022년 11월 출시 후 약 8억 달러가 넘는 누적 매출을 달성한 것으로 추정됐다.
현재 텐센트는 매출 규모와, 보유한 IP, 개발 인력의 수준 등 모든 측면에서 세계적인 게임 ‘공룡’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텐센트 실적은 지난해 매출액 6090억위안, 당기순이익 1576억 9000만위안으로 전년 동기 대비 각각 10%, 6% 증가했다. 지난해 4분기에만 게임 매출액 139억위안을 기록했다.
게임 분야에서는 중소형 기업에 불과했던 텐센트는 한국 게임사의 IP를 퍼블리싱하며 게임 사업을 키운 경험이 있다.
국내 게임업계 대표 장수 IP인 스마일게이트의 ‘크로스파이어(2007년)’와 넥슨 ‘던전앤파이터(2008년)’가 대표적이다. 한국 게임사들의 개발 역량을 확인한 텐센트는 공격적인 투자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텐센트는 자회사 ‘한리버 인베스트먼트’를 통해 넷마블 지분을 보유한 주요 주주다. 또 자회사 ‘이미지프레임인베스트먼트’를 통해서는 크래프톤 지분을 확보하며 주요 주주에 올라있다.
게임 개발사를 인수하거나 지분을 사들여 게임 부문 매출을 높이고, 이를 재투자하는 것이 텐센트의 전략이다. 유망 게임사를 사들여 상장 이후 차익을 노리는 경우도 있다. 한국 게임사에 대한 투자 성공방정식은 글로벌 시장에도 유효하다. 텐센트는 2015년 ‘리그 오브 레전드’ 개발사인 라이엇게임즈 지분 100%를 인수했다. 2016년엔 86억달러에 ‘클래시 오브 클랜’ 개발사인 슈퍼셀 지분 84%를 인수했다. 또 텐센트는 에픽게임즈 지분 40%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텐센트는 최근 상장에 성공한 국내 게임사 시프트업의 2대 주주이기도 하다. 시프트업의 2대 주주는 텐센트의 자회사 에이스빌이며, 지분율은 35.03%다.
단순 투자를 넘어 텐센트는 니케의 국내외 유통·배급을 맡는 등 시프트업의 퍼블리싱 파트너로 지원 사격을 하고있다. 시프트업 내부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는 “무엇보다 텐센트가 변화의 속도가 빠른 게임업계에서 (시프트업의)자체 IP 개발 능력에 주목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텐센트를 필두로 넷이즈·미호요 등 중국의 주요 게임사들은 한국에 신작을 쏟아내며 시장을 적극 공략하고 있다. 이들이 앞세우는 IP가 과거 주를 이뤘던 방치형·캐주얼 장르가 아닌 높은 수준의 고품질 타이틀이라는 점에서 국내 게임업계의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중국 게임은 국내 게임 차트에서 선두에 수시로 오르는 등 흥행작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중국 2위 게임업체인 넷이즈 게임즈는 7월 10일 오픈월드 대규모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 ‘원스 휴먼’을 한국시장에 출시했다. 넷이즈 게임즈는 대작 게임 원스 휴먼 출시를 시작으로 올해 한국 시장에 안착한다는 계획을 세워뒀다. 지오위 넷이즈 게임즈 리드 게임 디자이너는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한국은 게임 이용자층이 탄탄하고 게임을 바라보는 눈도 높다”며 “한국 이용자들의 피드백을 원스 휴먼에 적극 반영해 시장에 안착할 수 있는 타이틀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미호요의 글로벌 브랜드인 호요버스는 7월 4일 한국을 비롯한 세계 시장에 ‘젠레스 존 제로’를 동시 출시했다. 중국 게임사들은 한국 시장을 위한 ‘현지화’에 공을 들이고 있다. 황란 호요버스 한국지사장은 언론 간담회에서 “호요버스는 한국 시장을 매우 중요하게 보고 있다”고 강조했다.
텐센트게임즈의 글로벌 브랜드 레벨 인피니트는 지난 6월 한국 시장에 ‘왕자영요’의 글로벌판 ‘아너 오브 킹즈’를 정식 출시했다. 텐센트는 전 세계 아너 오브 킹즈의 E스포츠 팀을 지원하는 ‘파트너십 프로그램’을 공개하면서 한국을 지원 대상에 포함시켰다.
2010년대 중반부터 한국이 강점을 가진 모바일 게임 분야에서 중국이 빠르게 치고 올라왔다. 중국 게임사들은 개발자 인건비가 훨씬 저렴해 게임 개발에 유리했고, 기술적으로 이미 한국 게임사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수준까지 올라왔다는 평가다. IP(지식재산권) 경쟁력 측면에서는 중국이 이미 한국을 넘어섰다는 시각도 있다. 중국의 대표 게임사인 텐센트, 넷이즈 등은 이미 시가총액은 물론 히트작 숫자와 시장 점유율에서도 글로벌 ‘1티어’ 게임사로 도약한 지 오래다.
중국의 자국 게임 우선주의와 시장 불확실성도 여전한 상황이다. 사드 사태 이후인 2018~2019년에는 한국 게임에 대해 단 한 건도 판호를 발급해주지 않았다. 한한령으로 한국 게임에 대한 판호 발급 중단이 장기화된 이후 국내 게임업계는 정부 차원의 지원 확대를 요구해왔다. 다만 게임업계에서는 한국과 중국이 FTA(자유무역협정) 후속 협상을 재개하기로 합의하면서 게임 판호 발급 확대, 외국기업 대상 퍼블리싱 허가 등 중국의 시장 개방이 확대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엿보인다. 중·장기적으로 한국 게임사도 중국에서 게임을 서비스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황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