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글로벌 게임업계의 가장 큰 화두는 생성형 인공지능(AI)이 될 것으로 보인다. 주요 게임사들의 내년도 사업 전략 역시 AI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세계 최대 게임업체 블리자드를 품은 마이크로소프트(MS)가 콘솔 게임 플랫폼 엑스박스(Xbox) 스튜디오를 위한 AI 도구를 개발하겠다고 밝혀 게임업계 이목이 집중됐다. 게임 제작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 도구로 게임 개발자는 AI 도구를 활용해 다양한 기능을 추가할 수 있다.
MS는 11월 6일(현지시간) 미국 AI 전문기업 인월드AI와의 파트너십을 발표했다. 인월드AI는 생성 AI 캐릭터 개발 기술로 유명한 회사다. MS의 벤처캐피털 자회사인 M12가 투자한 바 있다. 이번 파트너십을 통해 MS는 멀티플랫폼 AI 도구 세트를 개발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AI 디자인 코파일럿’과 ‘AI 캐릭터 런타임 엔진’개발 등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디자인 코파일럿을 통해 게임 개발에 생성형 AI를 접목하고 이를 런타임 엔진을 통해 실제 게임에 반영하는 형태다. 예컨대 AI 디자인 코파일럿에 명령어를 입력하면 게임의 뼈대가 되는 스토리(세계관), 캐릭터 스토리라인 등이 생성되는 식이다. 게임 개발자, 작가, 디자이너, 개발자 등 수많은 인력이 모여 개발하는 기존 방식보다 효율성이 높고 제작 시간도 크게 단축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인월드AI 최고경영자(CEO) 일리야 겔펜바인(Ilya Gelfenbeyn)은 “대규모 언어 모델과 생성형 AI의 출현이 게임 내 스토리텔링과 캐릭터를 위한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MS는 일단 해당 기능을 옵션으로 제공할 방침인 것으로 파악된다. AI 도구 사용을 게임 개발사의 선택으로 남겨두겠다는 것이다.
게임업계는 AI 기술을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다. 현재는 물밑에서 경쟁적으로 AI를 도입 중인 상황이다. 게임 개발에 AI를 적용하는 움직임은 내년부터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예컨대 게임의 세계관(시나리오), 게임맵, 캐릭터 일러스트, 아이템 등 게임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 개발에 AI가 활용될 수 있다. 생성형 AI를 활용하면 텍스트, 오디오, 이미지 등 콘텐츠를 새롭게 거의 무제한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하다. 기존 콘텐츠들의 패턴을 학습해 추론 결과로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임희석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생성형 AI, 게임 산업의 마지막 반등 트리거’ 보고서에서 “현재 생성형 AI에 대한 관심이 하드웨어와 파운데이션 모델 등에 집중돼 있지만 변화의 본질은 콘텐츠 생산성 증대에 있다”고 분석했다. 게임사들이 AI를 접목해 극도의 효율성을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콘텐츠(게임) 공급 증가와 산업 확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다.
게임사들은 게임 콘텐츠 제작에 AI를 활용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사람 얼굴을 다양한 스타일로 변환해주는 3차원(3D) 아바타 등 기술이 고도화돼 게임 제작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다는 기대감이 크다.
구체적으로 ▲이미지를 생성하는 이미지 AI툴 ▲NPC(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직접 조종할 수 없는 캐릭터)와의 커뮤니케이션(대화) 자동 생성 ▲유저의 플레이 패턴을 인식해 상호작용하는 강화된 캐릭터 ▲게임코드의 자동화 등 게임 개발 AI툴 ▲게임 시나리오를 짜주는 텍스트 AI 등 분야에서에 AI가 적용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넷마블, 엔씨소프트, 크래프톤 등 국내 대표 게임사들은 AI 기반의 ‘지능형 게임’ 개발에 속도를 높이는 한편 원천 기술 개발에도 나서고 있다.
엔씨소프트는 지난 8월 국내 게임사 최초로 자체 개발한 AI 언어모델 ‘VARCO(바르코) LLM’을 공개했다. VARCO는 엔씨소프트가 만든 다양한 형태의 대규모 언어 모델(LLM)을 통합해 부르는 브랜드 명칭으로, ‘AI를 통해 당신의 독창성을 실현하세요(Via AI, Realize your Creativity and Originality)’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VARCO 브랜드로 운영되는 LLM은 크게 ▲기초 모델 ▲인스트럭션 모델 ▲대화형 모델 ▲생성형 모델로 나뉜다. 각각의 LLM은 매개변수(파라미터) 규모에 따라 성능이 구분되는데, 이번에 공개된 것은 13억개·64억개·130억개 모델 등 주로 개인과 기업이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소형·중형 규모의 한국어 전용 AI다. 가령 문서 요약, 정보 추출, 질의응답이 가능한 기본 모델부터 추론과 생성 능력에 집중해 서비스형 챗봇으로 진화할 수 있는 한층 고도화된 모델까지 다양하다.
엔씨는 ‘바르코’ LLM 기반 생성 AI 플랫폼 3종(아트·텍스트·디지털휴먼)을 묶어 ‘바르코 스튜디오’로 서비스할 예정이다. 예컨대 ‘바르코 텍스트’는 게임 캐릭터가 말하는 대사를 자동 생성할 수 있다. 또 ‘바르코 아트’는 몇 개의 지시문 입력만으로 게임에 적용할 다양한 2D·3D 이미지를 자동 생성한다. ‘바르코 휴먼’을 통해 실제 사람처럼 소통하는 게임 캐릭터를 창조할 수 있고, ‘바르코 오디오’를 통해 등장인물의 목소리, 혹은 배경음악까지 자동으로 생성하는 식이다.
엔씨는 2011년 국내 게임업계 최초로 AI 전담 조직을 세웠고, AI센터, NLP센터, 어플라이드 AI랩 등 삼각편대 조직을 만들었다. 현재 이 조직들은 일명 ‘NC AI R&D’로 통합돼 운영 중인데, 연구 인력만 300명이 넘는다. 엔씨의 R&D 비용 투자 규모는 2013년 1395억원에서 2022년 4730억원으로 10년 새 3배 이상 뛰었다. 이 기간 연평균 R&D 비용은 2802억원에 달한다. 엔씨는 현재 개발중인 신작 ‘프로젝트M’에 이용자와 상호작용이 가능한 디지털 휴먼을 도입할 것으로 점쳐진다.
넥슨은 AI를 통한 이용자 경험 강화에 집중하고 있다. 넥슨은 자사 AI연구소인 ‘인텔리전스랩스’를 통해 AI 게임 중계, AI NPC 서비스를 개발 중이다. AI가 게임 상황을 분석해 실시간 맞춤형으로 중계를 하는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기존에 녹음한 정형화된 패턴의 해설을 게임 중에 보이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AI가 플레이의 장면을 토대로 실시간으로 해설해 게임 몰입감을 높일 수 있다.
넷마블은 AI센터에서 게임 내 밸런싱 시스템, 이상탐지 시스템, 이용자 추천 시스템 등을 활용하는 시도를 하고있다. 크래프톤도 이용자와 게임을 할 수 있는 가상의 AI친구 혹은 ‘버추얼 게임 프렌드’를 내년 출시 목표로 준비중이다. 넷마블과 크래프톤은 각각 AI센터와 딥러닝본부를 운영하며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AI를 통해 게임 캐릭터가 인간과 대화를 나누고, AI와 함께 게임을 하는 것은 내년 게임업계의 가장 큰 화두가 될 수 있다. 이른바 ‘지능형 게임’의 등장이다. 지능형 게임은 게임 속 AI 플레이어가 이용자의 패턴을 학습해 지속적인 재미 요소를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게임업계에선 이를 게이머가 게임 속 가상 캐릭터와 실시간 소통하면서 실제 사람들과 함께 게임하듯 협력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서비스로 통칭하면서 ‘AI NPC(Non-Player Character)’라고 일컫는다.
지난 6월 중국에서 출시된 게임 ‘역수한(넷이즈 개발)’의 경우 게임 NPC에 생성 AI를 도입한 사례다. 지능형 NPC는 플레이어의 행동과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한다. 이 게임은 캐릭터 커스터마이징에도 생성 AI를 도입했다. 게임 사용자가 원하는 외형을 문장으로 입력하면 묘사에 부합하는 캐릭터 얼굴이 생성되는 식이다. 또 게임 사용자는 게임 속을 탐험하면서 생성형 AI를 활용해 시를 작성할 수도 있다. 역수한은 출시 직후 매출 돌풍을 일으키며 생성 AI 게임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엔비디아가 지난 5월 공개한 아바타클라우드엔진(ACE)은 AI NPC의 도입 시점을 앞당길 트리거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엔비디아가 데모에서 공개한 캐릭터는 유저와 상호작용이 가능한 모습을 보여줬다. AI NPC가 게임 사용자와 자연스럽게 대화하면서 게임의 전개를 돕거나 퀘스트를 주는 식의 행동을 통해 게임 몰입감을 향상할 것으로 보인다.
엔씨소프트가 차기 신작에 접목할 ‘대화형 디지털 휴먼’에도 관심이 쏠린다. 게이머가 게임 속 가상 캐릭터와 실시간 소통하면서 실제 사람들과 함께 게임하듯 협력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서비스로 기대된다. 특히 멀티모달(복합정보처리) 기술이 강화된 디지털 휴먼으로 개발된다. 내년 1~2월께 시장에 공개될 전망이다.
게임사들은 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게임 개발에 AI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있다. 단연 가장 큰 이유는 비용(인건비) 문제다. 엔씨소프트는 2023년 3분기 연결 기준 영업비용 중 인건비로 1983억원을 지급했다. 7분기 연속 적자를 이어간 넷마블은 3분기 인건비로 1806억원을 썼다. 국내 게임업계의 경우 지속적인 구조 효율화를 통해 인건비를 줄여나가고 있지만 매출 대비 인건비 비중은 여전히 높은 편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기획·프로그래밍·아트 제작 전반에 AI를 도입할 경우 게임 제작의 효율성을 높이고,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다. 예컨대 트리플A급으로 불리는 글로벌 대작 게임의 경우, 게임 하나를 제작하는 데 200~300명의 대규모 인력이 투입되고 제작비가 1억달러를 넘어서기도 한다. 미래에셋증권은 게임 제작비 비중을 개략적으로 아트 부문 40%, 프로그래밍 부문 40%, 기획 부문 20% 수준으로 추정했다. 특히 생성형 AI를 통한 생산성 혁신은 아트와 프로그래밍 부문의 비용을 대폭 줄여, 게임사들의 제작비 부담을 줄일 것으로 예상된다.
도 있다. 디자인, 성우 같은 분야에서 생성형 AI를 활용하는 것이 문제라는 주장이다. 넥슨 자회사 엠바크스튜디오의 경우 자사 슈팅 게임에 AI 음성 해설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일부 성우, 개발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논란이 지속되자 엠바크스튜디오는 “성우 없이 게임을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가 아니다”라는 내용의 입장문을 발표했다. 미국 배우 노동조합은 블리자드, EA 등 게임업계를 상대로 파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생성형 AI 사용으로부터의 보호’를 요구사항으로 제시했다.
반대로 생성형 AI 도입으로 게임 개발자의 저변이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과거 막대한 인력과 비용이 들었던 게임 개발이 AI로 인해 간편해질 경우 벌어지는 일이다. 게임업계에서는 게임 개발 난도 하락→신규 게임 개발자의 증가→게임퀄리티 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기대하고 있다. 이와 함께 소규모 단위의 게임 개발사가 늘어날 수 있다. 실제로 1인 게임 개발자 ‘33게임즈’가 선보인 게임 ‘닥사RPG’는 서비스 50일 만에 매출 5억원을 달성했다. 업계 관계자는 “생성 AI로 인한 게임사 구조조정이 아직 국내에서 포착되고 있지는 않지만 개발자와 일러스트레이터 등의 입지를 중장기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황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