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K콘텐츠의 글로벌 도약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그간 주류였던 영화와 드라마, 음악(K팝)뿐 아니라 게임, 웹툰, 웹소설이 2차 콘텐츠로 부상하면서 ‘미디어믹스’가 활발히 이뤄지면서다. 넥슨은 영화 <어벤져스>를 연출한 할리우드의 세계적 영화 제작사(AGBO)의 최대주주로 등극하면서 게임과 영화를 아우르는 ‘킬러 IP’를 만들어 세계 콘텐츠 시장에서 ‘게임체인저’가 되겠다는 계획 실행에 착수했다.
한국이 종주국인 웹툰의 경우 네이버웹툰 등을 중심으로 IP 확장이 본격화하고 있다. 웹툰은 지식재산권(IP)의 글로벌 확장과 수익화에 가장 유리한 분야라는 평가를 받는다. 제조업에서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끊임없는 기술 고도화로 세계 가전 시장을 평정한 것처럼 한국 토종 콘텐츠 기업들이 킬러 IP를 적극 활용해 세계적인 종합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도약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인다.
넥슨이 할리우드의 세계적 영화 제작사(AGBO) 최대주주로 등극한 것은 한국 게임사가 세계 영화 산업의 심장부에 진출한 기념비적인 사례라는 평가다. 넥슨은 2022년 상반기 AGBO 지분 인수에 1억달러(약 1343억원) 규모의 전략적 투자 집행을 완료했다. 2022년 초 4억달러를 투입해 지분 38%를 매입한 이후 추가 투자를 단행해 지분 11.21%를 더 확보한 것이다. 이로써 넥슨은 AGBO에 대한 지분율 49.21%로 단일투자자 기준 최대주주에 올랐다. 넥슨이 추가 투자를 하기 전까지 최대주주는 현 경영진이었다.
AGBO는 마블 영화를 연출한 앤서니·조 루소 형제 주도로 설립된 영화 제작사다. 루소 형제는 <어벤져스(엔드게임, 인피니티 워)>, <캡틴 아메리카(윈터 솔져, 시빌 워)> 등 마블 최고 흥행작을 연출한 할리우드의 거물이다. 또 넷플릭스 인기 영화 <익스트랙션> 등을 제작하는 등 10억달러 이상 가치를 지닌 세계적 영화 제작사로 평가받고 있다.
넥슨은 그간 영화·TV를 비롯한 콘텐츠 분야에서 자체 IP를 강화하고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해외 진출 전략을 담금질해왔다. 이를 두고 넥슨이 마블 유니버스를 기반으로 만화, 영화, 게임까지 사업을 확장해온 ‘디즈니’의 사업 모델을 벤치마킹한다는 평가도 나왔다. 넥슨은 최근 수년간 미국 완구 회사 해즈브로와 엔터테인먼트 계열사를 보유한 일본 고나미홀딩스, 세가사미홀딩스 등에 투자를 단행하면서 IP 확대에 역량을 집중해왔다. 지난 7월에는 넥슨이 보유하고 있는 기존 IP 영향력과 가치의 확산을 목표로 ‘넥슨 필름&텔레비전’을 신설했다.
넥슨이 AGBO 최대주주로 등극하면서 관련 사업 조직인 ‘넥슨 필름 앤드 텔레비전’과 AGBO 간 강력한 사업 연대가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양사는 넥슨의 IP를 영화·TV시리즈로 제작하고 외부 IP를 게임으로 이식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논의 중이다. 콘텐츠 제작에 있어 세계 최고인 AGBO가 넥슨의 게임 타이틀을 활용해 시작부터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영화나 TV 시리즈 제작에 나설 수 있다는 얘기다. 넥슨은 던전앤파이터, 바람의나라, 카트라이더, 메이플스토리 등 게임 IP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
넥슨은 AGBO 작품을 기반으로 게임과 메타버스 사업을 확장하는 길도 열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넥슨은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인재를 대거 영입했다. 디즈니에 몸담으며 픽사와 마블, 루카스필름을 인수한 주역인 닉 반다이크 수석부사장이 대표적이다. 그는 글로벌 전략 수립, 인수·합병(M&A) 등 중책을 맡고 있는데 AGBO 투자를 시작으로 향후 다양한 IP 강화를 주도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종합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영위하는 회사의 의장 관점에서 게임은 엔터테인먼트와 관련한 모든 요소들이 함축된, 대단히 매력적인 콘텐츠다.”
방탄소년단(BTS)을 전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키운 방시혁 하이브 의장이 게임 사업 진출을 선언했다. 세계적인 종합 엔터 회사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핵심 수익모델과 IP 창출원으로 게임 사업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에서다.
BTS를 앞세워 전 세계 음악 시장을 평정한 하이브가 자사가 보유한 ‘킬러 IP’인 ‘아티스트’ 자산을 기반으로 게임 사업에 진출하는 ‘영역 파괴’를 선언한 것은 게임·콘텐츠 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하이브가 세계적인 종합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도약하기 위해선 핵심 수익 모델과 IP 창출원으로 게임 사업이 필수적이라는 판단에 이 같은 결정이 이뤄진 것이라는 업계 해석이 나온다. 게임 분야에서 글로벌 성공 IP가 나올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방 의장은 “BTS의 경우 팀을 론칭했을 때 최선을 다하자는 목표밖에 없었고 여러 가지로 운이 따랐다”면서 “다시 게임으로 돌아와 말하면 조심스럽지만 잠재력이 큰 시장”이라고 답했다.
이와 관련해 하이브는 BTS 의존도가 높은 기존 음악 사업에서 게임, 웹툰, 메타버스, 대체불가능토큰(NTF) 등 새로운 영역으로 사업 다각화에 나서고 있다. 앞서 하이브는 2019년 리듬 게임 개발사인 수퍼브를 인수한 데 이어 2022년 초 게임 사업 부문을 분사(하이브IM)했고, 지난 6월에는 자체 개발한 모바일 게임 ‘인더섬 with BTS’를 출시하기도 했다. 또 하이브는 2020년 박지원 전 넥슨 대표를 최고경영자(CEO)로 영입했다.
킬러 IP를 기반으로 한 K콘텐츠 기업들의 사업 융합 전략에 속도가 붙을지도 관심사다. 컴투스는 SM엔터테인먼트 지분(4.2%)을 확보했다. 자사 게임 IP를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접목시키는 동시에 NFT·블록체인 등을 연계한 신사업에도 진출하기 위한 것이다. 스마일게이트도 게임 IP를 기반으로 한 영화, 드라마 등 영상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다. 2020년 중국 드라마 제작사 유허그미디어와 협력해 드라마 <크로스파이어>를 만들어 중국 텐센트 비디오 플랫폼을 통해 방영했다. 크래프톤은 2021년 배우 마동석이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그라운드 제로>, 배틀그라운드의 탄생 비화를 담은 다큐멘터리 <미스터리 언노운: 배틀그라운드의 탄생> 등을 선보였다. 아울러 웹툰 제작사인 와이랩과 게임 IP를 활용한 웹툰 작품을 만들고 있다.
기업들의 ‘슈퍼 IP’ 선점 경쟁이 치열해진 만큼 IP를 활용한 커머스 시장도 날로 급성장하는 추세다. 강력한 IP 하나만으로 영화, 게임, 애니메이션, 출판, 캐릭터 상품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수익 창출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별도의 마케팅 비용 지불 없이도 브랜드 광고 효과까지 얻을 수 있다 보니 ‘IP 커머스’는 기업에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는 평가다.
‘미디어 믹스’란 미디어 산업에서 지식재산권을 소설, 영화, 만화, 게임, 캐릭터 제품 등 여러 미디어로 출시하는 것을 말한다. 최근에는 미디어 믹스의 경계가 무너지는 추세다. 웹툰과 게임을 드라마·애니메이션으로 만들거나, 인기 웹툰을 게임으로 만드는 경우도 나오고 있다. 그야말로 ‘IP 빅뱅’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또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영화가 잇따라 흥행하며 ‘K웹툰’이 K팝에 이은 한류 중심으로 전 세계에 유통되고 있는 것도 IP 커머스의 대표적인 사례다. 업계 관계자는 “디즈니와 같은 강력한 IP 하나만으로 캐릭터, 브랜드, 콘텐츠 등 무한한 확장이 가능하다는 ‘원 소스 멀티유스(one source multi-use)’는 불확실한 경기 상황 속에서 수익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 기업에 매력적인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2023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한국의 ‘웹툰-웹소설-영상 IP’의 가치사슬(밸류체인) 시너지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된다. 가령 한국 웹소설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애니메이션으로 진화할 수 있는 것이다. 콘텐츠 사업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한국이 종주국인 K웹툰의 경우 드라마는 물론 애니메이션화에 용이한 신선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추세”라면서 “특히 일본의 애니메이션 기술력과 만나 시너지를 만들 경우 제2의 <건담> <드래곤볼>과 같은 작품이 충분히 나올 수 있다”고 분석했다.
네이버웹툰은 일본의 메이저 방송사인 TV아사히와 함께 네이버의 인기 웹툰 <바른연애 길잡이>를 드라마로 만들었다. 할리우드 유력 제작사를 인수한 넥슨이 게임 IP를 영화의 본산지인 미국에서 영화로 제작하는 식으로 IP 확장 전략에 나섰다면, 네이버웹툰은 애니메이션 명가인 일본에서 웹툰 콘텐츠를 애니메이션, 드라마로 만들어 세계 진출을 모색하고 있는 셈이다.
애니메이션 분야에서는 네이버웹툰 IP인 <외모지상주의>(외지주)가 지난 12월 초 넷플릭스를 통해 글로벌에 공개됐다. <외지주>는 네이버 웹툰 대표작으로 역대 네이버 웹툰 누적 조회 수 3위에 오른 작품이다. 이번 애니메이션화를 비롯해 모바일게임, 웹드라마(중국) 등으로 미디어 믹스된 바 있다. <외지주>는 넷플릭스 전 세계 TV 시리즈 인기순위 10위권에 진입하며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특히 <외지주>의 애니메이션화는 네이버웹툰과 글로벌 OTT와의 본격적인 협력으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은 넷플릭스 재팬이 제작과 배급을 이끌었다. 일본어 더빙으로 <귀멸의 칼날> 주연을 맡은 성우 마츠오카 요시츠쿠, <기동전사 건담>에서 주연을 맡은 타케우치 슌스케 등 초호화 성우진이 캐스팅됐다.
넷플릭스의 아시아 권역 애니메이션 사업은 넷플릭스 재팬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만큼 이번 파트너십의 의미가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네이버의 일본 웹툰 사업을 책임지는 라인디지털프런티어(LDF)는 내부적으로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연간 20개 이상의 프로젝트를 일본에서 자체 진행하는 것을 목표로 세워둔 것으로 파악된다.
플랫폼 양대 산맥인 네이버와 카카오가 웹툰과 웹소설을 중심으로 ‘킬러 IP’를 확보하기 위해 지금까지 3조원이 넘는 투자를 단행했다. 네이버의 경우 콘텐츠 자회사 네이버웹툰 등과 함께 지난 2년간 웹툰·웹소설 등 강력한 IP를 사들이면서 총 1조원이 넘는 자금을 투입했다. 대표적으로 2021년 3월 글로벌 웹툰 플랫폼 태피툰을 운영하고 있는 콘텐츠퍼스트에 약 334억원을 투자하며 최대주주(지분율 25%)로 올라섰다. 또 2021년 5월 세계 최대 웹소설 플랫폼인 왓패드(6500억원), 2022년 2월 국내 1위 웹소설 플랫폼 문피아(1082억원), 3월 일본 전자책 서비스 업체 ‘이북 이니셔티브 재팬(2000억원)’ 등을 잇달아 인수했다.
이에 질세라 카카오도 IP 투자에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카카오는 카카오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지난해에만 타파스(웹툰), 래디쉬(웹소설), 우시아월드(웹소설)를 인수하며 북미 웹툰 1위로 거듭나기 위해 속도를 내고 있다. 여기에 들어간 인수비용은 1조1450억원에 이른다. 2022년 5월 합병한 타파스와 래디쉬는 MAU가 420만 명, 북미 창작자는 10만 명에 달한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에선 지금까지 2조원 이상을 투자해 관련 플랫폼과 CP를 공격적으로 사들여 오리지널 IP 1만여 개를 확보했다. 카카오는 인기 웹소설 원작을 웹툰, 영화, 드라마, 게임 등으로 다양하게 제작하는 시스템인 ‘노블코믹스’를 운영하고 있다. 글로벌 누적 조회 수 142억 회를 돌파한 <나 혼자만 레벨업> <사내맞선>이 노블코믹스를 통해 탄생한 작품이다.
황순민 매일경제 디지털테크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