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 아이디어가 현실로’ 스타트업과 협업하는 식품업계, 새로운 먹거리 찾고 벤처기업은 부족한 자본력 메워
심희진 기자
입력 : 2020.10.08 10:52:38
수정 : 2020.10.08 10:52:58
코로나19로 외부 커피숍 대신 집에서 아메리카노, 라떼 등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면서 ‘홈카페’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하지만 다량의 카페인 섭취는 장소를 불문하고 신체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을 터. ‘커피를 마음껏 마시고 싶지만 건강이 염려된다’는 소비자들을 위해 달차컴퍼니가 크라우드 펀딩으로 신제품을 출시했다. 바로 무카페인 음료인 ‘검정보리 라떼’다.
검정보리 라떼는 커피 원두 대신 국내산 검정보리와 치커리 등을 이용해 카페라떼의 맛을 구현한 제품이다. 설탕이 아닌 알룰로스를 넣어 칼로리를 ‘제로(0)’ 수준까지 낮췄다. 검정보리 라떼에 사용된 우유는 락토프리 제품으로, 유당불내증(유제품에 함유된 유당을 체내에서 분해하거나 흡수하지 못하는 증상)을 앓고 있는 사람도 편하게 마실 수 있다. 현재 검정보리 라떼는 커피의 대체재를 원하는 직장인부터 모유수유 중인 여성, 카페인 섭취를 자제해야 하는 임산부 및 학생까지 다양한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달차컴퍼니 검정보리 라떼
하지만 검정보리 라떼가 시중에 출시되기까지 모든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푸드테크 스타트업인 달차컴퍼니는 ‘가짜 라떼’에 대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지만 기술력이 부족해 이를 현실화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수개월간 고전하던 달차컴퍼니에 손을 내민 기업은 삼양패키징이다. 페트병 음료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삼양패키징은 ‘아셉틱(aseptic) 충전 기술’을 보유한 곳으로 유명하다. 아셉틱 충전이란 상온에서 무균 환경을 조성한 뒤 음료를 병에 옮겨 담는 방식을 말한다. 삼양패키징 관계자는 “멸균 상태를 유지할 목적으로 고온에서 액체를 병에 채워 넣을 경우 맛과 향이 떨어질 수 있는데, 아셉틱은 상온에서 충전하는 형태라 음료의 풍미와 안전성 등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며 “영유아를 위한 액상 분유, 어린이 음료 등이 아셉틱 기술로 생산하는 대표 제품들”이라고 말했다. 덕분에 검정보리 라떼는 방부제를 사용하지 않고도 상온에서 9개월까지 보관 가능하다.
달차컴퍼니는 조만간 ‘검정보리 오리지널’ 제품도 삼양패키징과의 협업을 통해 아셉틱 방식으로 출시할 계획이다. 정유찬 달차컴퍼니 대표는 “검정보리 라떼라는 새로운 카테고리의 음료를 안정적으로 생산하기 위해선 높은 기술력을 보유한 파트너가 필요했다”며 “삼양패키징과 함께 품질 안전성을 더욱 개선해 해외 시장으로도 적극 진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잠백이 프로틴
▶실리콘밸리 업체와 상생하는 기업도 등장
이처럼 최근 들어 국내 스타트업과 식품업계가 손을 잡는 사례가 늘고 있다. 식품회사 입장에선 성장 가능성이 높은 파트너에 투자해 새로운 먹거리를 찾을 수 있고, 벤처기업은 큰 자본을 들이지 않고도 부족한 기술력을 메울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를 넘어서서 미국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스타트업과 상생하는 식품기업도 등장했다.
활발한 움직임을 나타내는 곳은 삼양패키징이다. 삼양패키징은 달차컴퍼니 외에 여러 스타트업과 함께 국내 음료 시장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잠백이의 ‘잠백이 프로틴’, 미트리의 ‘프로틴 업’, 에이플네이처의 ‘칼로바이 프로틴 에이드’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모두 삼양패키징이 다년간 쌓은 ODM(제조사 개발 및 생산) 역량을 바탕으로 레시피 기획부터 원료 구매, 가공, 생산까지 전 과정을 진두지휘한 제품들이다. 최근 홈트레이닝 열풍으로 단백질 음료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자 관련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만들었다. 아셉틱 기술로 단백질 음료를 생산할 경우 내용물 뭉침 현상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삼양패키징은 스타트업과의 동반 성장을 위해 소품종 대량 생산이 아닌 다품종 소량 생산 방식을 택하고 있다. 본래 음료 공정은 품목이 바뀔 때마다 생산 시설을 교체하고 청소까지 마쳐야 되기 때문에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 특히 아셉틱의 경우 무균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까다로워 수익성 측면만 고려했을 땐 소품종 대량 생산이 유리하다. 그럼에도 삼양패키징은 초기 주문량이 적을 수밖에 없는 스타트업의 특성을 이해하고 함께 발전하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다. 삼양패키징 관계자는 “최적의 공정 배치로 마케팅 역량과 아이디어에 강점이 있는 스타트업과 높은 시너지를 내고 있다”며 “앞으로도 음료시장의 발전을 위해 유망한 스타트업을 적극 발굴하고 이들과 적극 상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양패키징 광혜원 공장
하이트진로도 스타트업 투자를 활발히 이어오고 있는 기업 중 하나다. 최근 푸드 플랫폼 기업인 ‘식탁이있는삶(서비스명: 퍼밀)’과 지분 투자 계약을 체결한 것이 대표적이다. 2014년 10월 설립된 식탁이있는삶은 전국 170여 개 산지에서 우수한 품질의 신선식품을 발굴한 뒤 흥미로운 콘텐츠를 더해 이를 시중에 유통하고 있다. 현재 보유 중인 독점 협력사는 66곳, 독점 계약재배 품목은 20여 종에 달한다. 최근에는 단순 플랫폼을 넘어서서 직접 종자를 발굴 및 개량키도 한다. 대표 제품으로는 더단 초당옥수수, 대저토마토, 킹타이거 새우, 동굴 속 고구마 등이 있다.
허재균 하이트진로 신사업개발팀 상무는 “온라인 시장이 빠르게 커지고 국내 소비자들의 욕구가 다양해지면서 개성 있는 이야기들이 반영된 먹거리가 주목받고 있다”며 “특히 식탁이있는삶은 산지와의 직거래로 신선한 제품을 판매할 뿐더러 가격까지 합리적이라는 점에서 성장성이 높다고 판단돼 이번 투자를 결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10월 법인형 엔젤투자자로 선정된 하이트진로는 올해 5월부터 식탁이있는삶을 포함해 총 4건의 스타트업 투자를 단행했다. 법인형 엔젤투자란 중소벤처기업부 산하 한국벤처투자가 운영 중인 매칭펀드(컨소시엄 형태로 여러 기업이 자금을 공동 출자하는 것)의 일종으로, 기술력은 있으나 자본이 부족한 창업 초기 기업을 물질적으로 지원해주거나 경영 노하우를 가르쳐주는 것을 말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블루날루 본사에서 이상윤 풀무원기술원장(왼쪽)과 루 쿠퍼하우스 블루날루CEO가 업무협약을 맺고 있다.
첫 투자처는 F&B(Food&Beverage) 분야의 스타트업인 ‘아빠컴퍼니’다. 아빠컴퍼니는 전국 각지의 맛집 대표 메뉴를 반조리 형태로 판매하는 ‘요리조리’ 서비스를 운영 중이다. 온라인을 통해 약 200여 개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유통하고 있다. 인기 먹거리로는 부산 얼짱쭈꾸미, 공주 청벽집, 춘천 통나무집닭갈비 등이 꼽힌다. 아빠컴퍼니는 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독점 계약 상품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디연’과 ‘데브헤드’도 하이트진로가 지난 6월 지분 투자한 스타트업이다. 리빙테크 기업을 꿈꾸는 이디연은 소주잔 크기의 코르크 스피커, 디퓨저, 클렌저 등 가정용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데브헤드는 모바일 앱을 통해 스포츠 경기를 보면서 퀴즈 게임에도 참여할 수 있는 서비스인 ‘피키’를 만들었다. 야구를 시작으로 다양한 종목에 해당 서비스를 적용할 계획이다. 하이트진로 관계자는 “식음료에 국한하지 않고 여러 신성장 동력을 지속적으로 확보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며 “국내뿐 아니라 해외 스타트업 혹은 해외로 진출하려는 스타트업 등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농심,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으로 활발한 투자 행보
식품업계 최초로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을 만든 농심은 최근에도 활발한 투자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 온라인 커머스 기업인 ‘패신저스’와 헬스케어 기업인 ‘진원온원’ 등에 자금을 지원한 것이 대표적이다. 패신저스는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비보트’를 통해 채식주의·친환경·사회적 가치 등 3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패션, 식품, 리빙, 뷰티 관련 제품들을 판매하고 있다. 윤리적인 요소를 중시하고 상품 하나를 구매할 때도 브랜드의 콘텐츠를 꼼꼼히 살피는 밀레니얼 소비자들이 타깃이다. 진원온원은 장내 미생물의 균형을 맞춰주는 서비스인 ‘마이 세컨드 브레인’과 개인 도시락, 맞춤형 보충제 등을 추천해주는 서비스인 ‘마이어트’ 등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야쿠르트는 지난 8월 스타트업과의 협업을 위해 ‘와디즈’와 플랫폼 공동 활용에 관한 전략적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와디즈는 월간 방문자 수가 1000만 명에 달하는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으로, 아이디어와 기술은 있지만 자금이 없어 홍보 및 시장 테스트가 필요한 신생기업을 투자자와 직접 연결해주고 있다. 이번 협약으로 한국야쿠르트는 신제품 론칭 전 펀딩을 통해 수요 예측과 초기 시장 반응 등을 조사할 수 있게 됐다. 또 와디즈 제품 가운데 신선 및 건강 콘셉트에 부합하는 모델은 자사 온라인몰인 ‘하이프레시’에서도 직접 판매할 계획이다. 한국야쿠르트 관계자는 “타사와 플랫폼을 제휴키로 한 건 창립 이래 이번이 처음”이라며 “와디즈의 핵심 이용고객인 밀레니얼 세대와 접점을 늘리고 스타트업들의 유통 경로를 확대해주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야쿠르트, 와디즈와 플랫폼 비즈니스 ‘컬래버’를 맺었다.
국내를 넘어서서 미국 실리콘밸리 푸드테크 기업과 손을 잡은 곳도 있다. 바로 풀무원이다. 지난 7월 풀무원은 세포배양 해산물 제조 스타트업인 ‘블루날루’와 업무 협약을 맺었다. 세포배양 해산물이란 어류에서 채취한 줄기세포를 생물반응기(bioreactor)로 길러낸 후 3D프린팅을 통해 용도에 맞는 식품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블루날루의 세포 기반 양식 기술은 유전자를 변형하지 않는 방식(non-GMO)인 데다 미세플라스틱, 독성물질, 수은 등의 오염물질이 전혀 없는 어종을 다양하게 생산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글로벌 팬데믹(전염병 대유행)으로 인류의 식량 공급체계 취약성이 여실히 드러난 요즘, 추적 가능하고 투명하며 안전한 방식으로 생산 가능한 세포배양 해산물은 먹거리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풀무원은 전반적인 사업 운영뿐 아니라 마케팅, 규제 관련 이슈 등 다양한 분야에서 블루날루와 협업해 세포배양 해산물을 국내 시장에 출시할 계획이다. 풀무원 관계자는 “전 세계적으로 어류 소비가 역대 최고 수준까지 늘어난 상황에서 맛과 질감, 영양성분 등을 모두 충족함과 동시에 환경까지 지킬 수 있는 먹거리는 세포배양 해산물”이라며 “빠른 시일 내에 대량생산 및 상용화가 가능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저스트 에그
▶대체육, 세포 기반 양식 등 푸드테크 활발
SPC삼립도 대체육 시장에 뛰어들기 위해 식물성 단백질을 연구하는 스타트업인 ‘저스트’와 독점적 업무협약을 맺었다. 2011년 미국 실리콘밸리에 설립된 저스트는 녹두에서 추출한 단백질로 달걀, 마요네즈, 드레싱 등을 생산하고 있다. 대표 제품인 ‘저스트 에그’는 콜레스테롤이 없고 포화지방이 낮아 채식주의자나 달걀 알레르기가 있는 소비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최근 윤리적·환경적 가치를 중시하는 소비 트렌드와도 부합한다.
SPC삼립은 저스트로부터 원료를 공급받아 연내 충청북도 청주에 위치한 SPC프레시푸드팩토리에서 국내용 제품을 생산한다는 계획이다. 소비자 채널뿐 아니라 파리바게뜨, 던킨 등 그룹 계열사를 통해 B2B(기업 간 거래) 시장에도 제품을 유통할 방침이다. SPC삼립 관계자는 “국제달걀위원회에 따르면 식물성 단백질 시장은 전 세계적으로 매년 10% 이상 성장하는 등 가능성이 무한한 영역”이라며 “이번 파트너십을 계기로 프라이, 패티, 오믈렛 등 식물성 단백질 카테고리를 확장해 국내 푸드테크 산업을 선도하겠다”고 말했다. 동원산업은 노르웨이의 연어 양식 스타트업 ‘새먼 에볼루션’에 65억원을 투자하고 지분 10%를 받았다.
패신저스 가치소비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비보트
2017년 설립된 새먼 에볼루션은 최적의 바다 환경을 육상에 구현해 친환경적으로 연어를 양식하는 기업이다. 해상 양식은 수온 변화나 해류 움직임에 많은 영향을 받지만, 육상 양식은 모든 조건을 제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5㎏짜리 연어 한 마리를 키우는 데 해상 양식은 최대 2년가량 소요되는 반면, 육상 양식은 1년이면 충분하다. 더 나아가 새먼 에볼루션은 ‘해수 순환’이라는 독자 기술로 기존 육상 양식의 한계마저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해수 순환 기술이란 연어의 배설물이나 사료 찌꺼기 등으로 오염된 양식장 바닷물을 35%만 새것으로 교체하고 나머지 65%는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정화하는 것을 말한다. 이전에는 육상 양식도 해수를 100% 갈아줘야 했지만 순환 기술 덕분에 그 규모를 대폭 줄일 수 있게 됐다.
새먼 에볼루션은 지난 5월 노르웨이 몰데 지역에 양식장을 건설 중이다. 해당 양식장은 2028년까지 3단계의 확장 공사를 거쳐 연 3만6000t의 생산 규모로 완공될 예정이다. 동원산업은 이번 투자 협약을 통해 대서양 연어 수입 경로를 안정적으로 구축하는 한편 지속 가능한 식량자원과 해수 순환 기술까지 확보하게 됐다. 동원산업 관계자는 “세계 각국의 스타트업을 다각도로 평가한 결과 전통적인 양식업의 한계를 극복한 새먼 에볼루션이 최고의 투자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지분을 사들였다”며 “환경에 미치는 영향까지 함께 고려하는 수산기업으로 성장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