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6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삼성전기 부산사업장 현장을 찾았다. 자동차 전장용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 전용 생산공장을 점검하고 관련 사업전략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이 부회장이 삼성전기 부산사업장을 공개적으로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전기차 및 자율주행차 시대가 본격화함에 따라 전장용 MLCC 사업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이 부회장의 현장 점검은 관련 사업을 직접 살펴보고 미래 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주문하기 위한 행보로 풀이됐다.
7월 21일에는 국내 재계의 두 별이 만났다. 이 부회장이 현대자동차그룹의 연구개발(R&D) 심장부인 남양기술연구소를 방문해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과 미래 자동차 및 모빌리티 분야 협력 방안을 논의한 것이다. 지난 5월 13일 정 수석부회장이 삼성SDI 천안사업장을 방문해 이 부회장과 전고체 배터리 등 사업 협력을 논의한 이후 두 달여 만에 이뤄진 두 번째 회동이었다. 이날 양사 경영진은 전기차·수소차 등 차세대 친환경차, 도심항공모빌리티(UAM), 로보틱스 등 현대차그룹의 미래 핵심 신성장 분야와 관심 사안에 대해 의견을 나눈 뒤 연구개발(R&D) 현장을 둘러봤다. 특히 재계에서는 양대 그룹 총수가 두 달여 만에 두 차례나 만나 미래 자동차·전장사업에 대해 논의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향후 두 회사의 협력에 관심이 모인다. 전장사업은 이 부회장이 각별히 챙기는 삼성의 미래 핵심 먹거리 중 하나다.
특히 삼성은 차세대 스마트카 시대에 대비해 차량용 반도체, 이미지센서, 디스플레이, 오디오 등 전장부품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사실상 경영을 총괄한 직후인 2015년 전장사업팀을 조직하고 이듬해 글로벌 전장업체 하만을 80억달러(약 9조216억원)에 인수하는 빅딜을 주도하는 등 시장 선점을 위해 기민한 움직임을 보여 왔다. 자율주행에 핵심적인 5G·6G 등 차세대 통신기술과 인공지능(AI) 등 소프트웨어 역량과 관련 분야 핵심 인력 확보도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전장사업은 삼성전자뿐 아니라 다른 계열사에서도 전방위적으로 육성되고 있다. 하만은 인포테인먼트, 삼성SDI는 배터리, 삼성전기는 적층세라믹콘덴서(MLCC)·카메라 모듈을 맡고 있다.특히 이 부회장은 최근 삼성종합기술원, 삼성SDI, 삼성전기를 잇달아 방문해 자동차 배터리, 전장용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 등 자동차 전장부품과 관련한 현장 행보를 이어가면서 핵심 미래 먹거리인 전장사업 추진에 속도를 내고 있다는 평가다.
▶삼성전자-하만 전장 ‘시너지’ 본격화
삼성전자의 IT 기술과 하만의 전장 기술의 시너지 효과도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올해 1분기 하만의 ‘디지털 콕핏’ 글로벌 점유율은 30%로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삼성전자가 하만을 인수한 이듬해인 2018년 18.8%, 2019년 24.8%를 기록하는 등 점유율이 큰 폭으로 상승하는 추세다. 2015년 전장사업부를 신설한 삼성전자는 하만을 인수한 후 전장사업부와의 협업 체제를 구축하고 하만의 전장 제품에 자사 반도체, 센서, 디스플레이 등 글로벌 최고 수준의 정보기술력을 접목했다.
하만이 보유한 전장사업 노하우와 방대한 고객 네트워크에 삼성의 IT와 모바일 기술, 부품사업 역량을 결합해 커넥티드카용 전장시장에서 글로벌 선두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삼성전자는 2022년께부터 전장부문 매출이 급성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양사는 2018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에서 공동 개발한 디지털 콕핏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디지털 콕핏은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을 통해 안전성 등 운전자에게 최적의 운전 환경을 제공하는 디지털 전장 부품으로 자율주행·전기차 시대를 맞아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하만은 디지털 콕핏 부문의 1분기 매출액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시장조사업체 리포트링커에 따르면 글로벌 자동차용 디지털 콕핏 시장은 2018년 139억달러(약 17조1300억원)에서 2025년 323억달러(약 39조8200억원)로 연평균 약 12.8%씩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2018년 390대였던 하만의 디지털 콕핏 생산량은 2019년 646만 대로 65.6% 급증했다. 삼성전자와 하만이 공동 개발한 5세대(5G) 이동통신 차량용 통신장비(TCU)는 2021년 양산되는 BMW의 전기차 ‘아이넥스트(iNEXT)’에 탑재된다. 5G TCU가 실제 차량에 적용되는 첫 사례이자 삼성전자와 하만이 공동 개발한 제품의 첫 수주다.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전장업계 선도 기업으로 오래전부터 탄탄한 입지를 구축해온 하만의 노하우에 역시 업계 최고 수준인 삼성전자의 디지털 기술이 더해지면서 거래처 확대가 쉽지 않은 자동차 업계에서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메모리 절대 강자 삼성전자, 車 반도체도 넘본다
메모리 절대 강자인 삼성전자는 자동차 반도체 시장 공략도 본격화하고 있다. 차량용 반도체 브랜드 ‘엑시노스 오토(Exynos Auto)’를 통해 커넥티드카, 고급 인포테인먼트 등에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반도체를 개발하고 있다. 특히 커넥티드카, 자율주행차 등의 확대에 따라 시장이 급성장할 것으로 보이는 차량용 반도체 분야는 삼성전자가 목표 달성을 위해 집중하는 분야다. 차량용 반도체는 인포테인먼트, 파워트레인 등 다양한 용도로 구분되며 ‘두뇌’ 역할을 하는 AP를 비롯해 메모리, 카메라, 각종 센서 등이 함께 활용된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차량용 반도체 시장은 네덜란드 NXP, 독일 인피니온 등이 앞서가고 있는데 독보적인 강자는 없다. 삼성전자는 글로벌 완성차업체로 공급처를 확대해 업계 1위인 NXP 등을 빠르게 추격한다는 계획이다.
일반적으로 차량용 반도체는 스마트기기에 탑재되는 제품보다 사용 환경과 수명 측면에서 더 높은 품질 수준이 요구되는데, 삼성전자는 그동안 쌓아온 기술력을 기반으로 자동차용 반도체의 제품 신뢰성을 고객사 요구 수준에 최적화한다는 전략을 세워놨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구 IHS마킷)에 따르면 2018년 글로벌 차량용 반도체 시장 규모는 418억달러(약 49조7000억원)이며 2024년에는 656억달러로 6년간 57%나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가 이미 차량용 반도체사업 확대에 본격 착수한 만큼 현대차와의 협력이 확대될 가능성도 주목된다. 삼성전자는 2018년 차량용 반도체 브랜드인 ‘엑시노스 오토’를 출시하고, 지난해 아우디에 차량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용 고성능·저전력 프로세서인 ‘엑시노스 오토 V9’을 공급하는 등 실적을 쌓고 있다. 현대·기아차도 아직 미미한 수준이지만 삼성전자의 차량용 메모리 반도체를 일부 장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장용 MLCC ‘3년 내 글로벌 톱2’ 목표
‘전자산업의 쌀’로 불리는 MLCC는 전기를 저장했다가 반도체 부품에 필요한 만큼 전기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핵심 전자부품이다. 이 중에서도 삼성이 미래 먹거리로 점찍은 전장용 MLCC는 최근 전기차·자율주행차 확산과 차량용 전장부품 수요 증가에 따라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이다. 자동차의 전장 확대로 MLCC 수요도 급격히 늘면서 자동차 한 대에 들어가는 MLCC가 1만 개를 넘어서는 등 전장용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 이 사업을 담당하는 삼성전기는 작년부터 미·중 무역분쟁 등 대외 이슈에 따른 수요 부진으로 MLCC 업황 악화를 겪었고, 코로나19라는 돌발 변수도 마주했다. 고부가가치 제품인 전장용 MLCC는 삼성전기의 반전 카드다.
삼성전기는 MLCC 시장에서 일본 무라타에 이어 글로벌 2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전장용 MLCC 시장은 무라타와 TDK 등 일본 업체들 점유율이 압도적이다. 전기제품에 이어 전장용 MLCC 시장에서도 글로벌 ‘톱2’에 올라서겠다는 게 회사가 내부적으로 세워놓은 목표다. 전체 매출에서 전장용 MLCC가 차지하는 비중도 2024년까지 30% 수준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삼성전기는 2016년 전장용 MLCC의 첫 양산에 돌입해 유럽·중국 등 주요 자동차업체와 거래하며 점유율을 점차 늘려 나가고 있다. 삼성전기가 부산사업장에 조성해 작년부터 가동에 들어간 5공장도 전장 전용으로 운영되고 있다.
삼성전기는 부산사업장에 전장용 MLCC 전용 신원료동을 짓고 있고, 중국 톈진에 전장용 MLCC 생산공장도 내년 양산 가동을 목표로 건설 중이다. 부산사업장을 신기종 개발, 원재료 혁신을 위한 재료 중심 단지로 육성하고, 중국 톈진공장을 전장제품 주력 양산기지로 운영할 계획이다.
삼성전기 2분기 실적 발표 후 콘퍼런스콜에서 천진 공장 가동 시점과 관련해 “하반기 내 마무리 공사 및 설비 셋업 등을 진행해 공장 가동을 위한 모든 준비를 완료하겠다”고 밝혔다. 삼성전기 관계자는 “시장 상황에 따라 IT와 산업용 MLCC라도 추가 수요가 있으면 하반기 중 공장 가동을 추진하겠다”고 전했다.일단 시장 수요가 있는 제품을 우선 생산하면서 수율을 높이고 향후 전장 수요가 회복됐을 때 천진 신규라인을 통해 증설에 나선다는 구상이다. 업계에서는 신원료동과 톈진 공장이 본격 가동되면 삼성전기의 전장용 MLCC 생산능력이 대폭 확대되면서 일본 업체들을 따라잡을 수 있는 강력한 추진력을 얻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최근에는 기술난이도가 높은 파워트레인용까지 개발에 성공하며 삼성전기는 자동차용 MLCC 전체 라인업을 구성하면서 ‘출격준비’를 마쳤다는 평가다.
ZKW 직원이 차세대 헤드램프 제품을 테스트하고 있다.
LG의 히든카드 ‘전장사업’
LG도 전장사업을 미래 핵심 먹거리로 키우고 있다. LG그룹의 핵심 성장동력은 전기차 배터리(화학)와 전장(전자)사업으로 평가된다. LG전자는 지난해 전장사업을 맡고 있는 VS(전장부품솔루션)사업본부에 가전사업의 투자 규모와 맞먹는 수준인 8985억원을 투입하는 등 전장사업을 미래 먹거리로 키우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음. 권봉석 LG전자 최고경영자(CEO·사장)은 “전장사업에서 2021년 흑자를 달성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VS사업본부는 올해 3분기에 601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하는 등 아직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적극적인 투자로 차세대 기술을 선점해 실적 개선을 이뤄낸다는 전략이다. 올해 초 LG전자는 전장사업을 조기에 끌어올리기 위해 사업 재편이라는 회심의 카드를 꺼내 들기도 했다. LG전자의 전장을 담당하는 VS사업본부는 인포테인먼트, 차량 소프트웨어와 자율주행 기술 개발, 모터 등에 집중하고 차량용 램프사업은 2018년 인수한 오스트리아 차량 램프업체 ZKW가 전담하도록 한 것이다. 잘할 수 있는 부문에 집중해 경쟁력과 효율성을 끌어올려 수익성을 개선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됐다.
LG전자는 2018년 ZKW를 인수하면서 ‘자동차 전장사업 성장’ 프로젝트에 속도를 높여왔는데 고성장이 예상되는 차량용 램프사업을 통합함으로써 성과를 높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성장동력으로 밀고 있는 VS사업본부가 ‘캐시카우’로 도약하면 가전사업에 이어 LG전자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온다.LG전자로부터 차량용 램프사업을 모두 넘겨받은 ZKW는 아시아 시장 공략에 속도를 높일 것으로 전망된다. 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LG전자가 전장 관련 사업에서 성장에 중점을 맞춰왔다면 이제는 수익성도 강화하겠다는 전략을 서서히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인수합병(M&A) 등 적극적인 투자로 차세대 기술 선점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